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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신학
김은혜 외 8인 지음 / 동연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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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들은 제 2 종교개혁의 마르틴 루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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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신학
김은혜 외 8인 지음 / 동연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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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SN이 첫 번째 책은 MZ 세대와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 책도 한국 교회에 매우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이번 책은 그것보다 훨씬 과감해졌다. 이 책을 읽고, 저자들에게 느끼는 저의 감정은 3가지이다.

 

첫째, 저자들은 고맙다. 개인적으로 엔지니어 크리스천으로서 나의 일의 영성이 무엇일지 궁금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없어서 외로웠는데 HTSN을 만나서 반가웠다. 기술신학은 일단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다

 

둘째, 저자들은 따뜻하다. 기독교에서 가장 첫째되는 계명은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개인의 구원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만물신학을 얘기한다.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창조세계에 존재하는 천하 만물의 구원을 말한다. 이 책은 모든 others, 모든 타자를 위한 책이며, 같이 진화하고 있는 모든 things, 모든 객체를 위한 활동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무섭다. 마르틴 루터가 인쇄술을 이용하여 5백년전에 종교개혁에 성공했다. 저자들은 제 2의 종교개혁에서의 마르틴 루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맞이하고 있는 메타버스, 인공지능, 생명공학 등은 인쇄술보다 더 파괴력이 큰 하나님의 계시이다. 오백년전 제 1의 종교개혁으로 교황의 권력은 개별 교회로 이동되었다. 2의 종교개혁으로 개별 교회의 권력은 어디로 이동할지 아무도 모른다.

 

왜 이들이 무서운지는 MZ세대들이 좋아하는 MBTI로 풀어보겠다.

 

우선 에너지 방향은 내향적인 I형보다는 외향적인 E형이다. 이 책은 열린 교회, 열린 신학을 말한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인간의 발이 확장되었고, 로봇으로 인간의 팔이 확장되었다면, GPT는 인간의 뇌를 확장하고 있다. 메타버스에서는 가상 행성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자아로 확장된다. 확장된 인간이 만나는 새로운 환경에 이 책은 열려 있다.

 

인식에 있어서는 감각으로 인식하는 S형보다는 직관으로 인식하는 N형이다. 이 책에는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는 창의적인 개념들이 제시된다. 전통적인 고체 교회의 한계를 극복하는 유연한 액체 교회를 제안하고 있고, 새로운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보편적 행복을 제안하고 있고, 따뜻한 인공지능이 되도록 기독교적인 아가페와 한국적 정을 학습한 정 많은 인공지능을 제안하고 있다.

판단 기능적으로는 감정적인 F형이 아니라, 사고하는 T형이다. 하이데거, 헤겔, 러셀, 푸코 등 근현대 철학자들이 쌓아온 지성의 토대위에서 신학자로서 인류세, 트랜스휴먼, 포스트휴먼, 초객체 등 21세기에 새로 마주한 개념들을 풀어내고 있다.

 

계획성에 대해서는 철저히 준비해서 공식적으로 결정하는 J형보다는 변화에 적응하는 P형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신학의 대상은 정말로 급하게 변하고 있는 무빙 타겟인 기술이므로 P형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다. ‘위험한 곳에 구원이 있다는 하이데거의 말대로 위험한 곳에 뛰어들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의 MBTIENTP라고 본다. ENTP의 특징은 박학다식하고 독창적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한가지 제언을 하고 싶다.

이 책에서는 도구를 사용하여 일하는 인간, , 호모 파베르와 기술에 대해서 말한다. 20세기에는 일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의 효율성을 지향했다면, 21세기에는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즐거움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의 가장 첫 질문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제 1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기술을 사용해서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에서 기술은 절대로 가치중립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협력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창조하는 기술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타락한 기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신학은 기술과 함께 서로 영향을 주면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까워가는 역동적인 구도가 되어야 한다.

 

성경이후에도 하나님이 창조를 계속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이 창조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하나님은 즐거워 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보며보기에 좋았더라할 수 있는 그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는 길잡이가 바로 신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한번 저자들의 과감한 모험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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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의 종교적 회귀 - - 벤야민, 데리다, 레비나스, 아감벤, 지젝, 들뢰즈, 가타리
신명아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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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데리다의 해체론에서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

그리스도 탄생이후 거의 2천년간 모든 나라에서 일인당 국민 소득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가 19세기 산업혁명때부터 하키스틱같이 급격히 상승했다. 하키스틱을 눕히고 보면 끝에 공을 치는 부분에서 급격히 올라간다. (골프채도 비슷하게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이 추이에 동참하여 반세기정도에 100배정도로 소득수준이 높아졌다. 그러한 급격한 변화는 개인과 사회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100년전 대부분 ‘쌍놈’으로 불리웠던 ‘개인’의 절대적인 자존감은 ‘하키스틱’만큼 높아졌다. 여전히 상대적인 자존감의 문제는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가 엄청나게 높아진 자존감의 총량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우선 사회는 포스트모던 시대가 되어 분출된 자존감의 숨통을 틔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러한 급격한 변화를 현대철학이 수용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그 변화의 방향을 선도할 수 있는가? 그런데, 하키스틱을 선물을 준 과학기술과 대척점에 서있다고 얘기되온 종교성으로 회기라니?

나는 현대철학은 근접할 수 없는 먼 나라 얘기로 생각해왔다. 신명아 교수의 책도 역시 글은 한글이었지만 완전 외계인의 언어였다. 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구체적으로 퇴직 후 교육선교에 참여할 것인가인데, 여기에 대입하여 책을 읽어 내려갔더니 의외로 통하는 면이 있었다. 아니, ‘그래 보였다’가 맞을 것이다. 철학이란 어느 쪽을 만져도 무엇인 것 같은 코끼리 아니겠는가? 나는 꼬리를 잡고 ‘이게 로프같아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Stairway to heaven이 아니라, rope to the heaven.

해체의 대상은 변한다. 그것은 인간의 원죄로 읽힌다. 끝없이 ‘쓴 뿌리를 내는 대지’이다. 우리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무엇은 그 순간부터 우리를 옥죄는 자가면역 질환이 된다. “자가면역 질환은 세균, 바이러스, 이물질 등 외부 침입자로부터 내 몸을 지켜주어야 할 면역세포가 자신의 몸을 공격하는 병입니다. 자가면역은 인체의 모든 장기와 조직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정치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이 ‘자가면역 질환’이라는 단어로 명쾌히 설명된다.

자기면역 질환을 진단하는 방법은 미디어에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소련이 붕괴하는데 반정부운동자간 팩스 통신이 힘을 발휘했고, 튀지니에서부터 불었던 민주화 운동인 재스민 혁명이 페이스북 같은 SNS로 가능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독교는 이 면에서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유대교나 코란의 번역을 거부하는 이슬람에 비해 우월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을 독일어로 변역해서 모든 이들에게 배포함으로써 가능하였다. 그런데, 최근 deep fake와 같이 미디어를 교란하는 사탄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것보다도 미디어 뒤편에 숨어있는 대기업 또는 패권주의 국가들 같은 빅 브라더가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자가면역 질환은 해체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나를 위협하는 자가면역인지 나를 보호하는 정상적인 면역 시스템인지 구분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책 제목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떠올리게 한다. 데리다는 아브라함-이삭의 사건을 들어 이를 설명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모리아산을 오르며 끝까지 고민하지 않았을까? 이게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가, 사탄의 역사인가, 아니면 욥이 당했던 하나님과 사탄의 합작 농락일까? 그리스도인은, 혹은, 실존적 단독자는, 극도의 ‘불안’속에서 혼자서 결단해야 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이 결단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한다. 대세에 따라 ‘이방인’이 되었고, 그저 햇빛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변명한다. 그런데, 이 불안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신의 자유의지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좁은 길을 택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필요하다. 그 보상을 줄 수 있는 근거로 데리다는 메시아성(性)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메시아는 여기에 도달한 이들에게 같은 동역자로 인정해준다. “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다.”

하키스틱만큼 높아진 개인의 자존감으로 개인개인들은 수많은 결정을 해야 한다는 운명에 놓여졌다. 그런데, 이때 대부분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닌 ‘이방인(gentile)’이 된다. ‘자유에로부터 도피’에서 파시스트의 도래가 좋은 예이다. 결정은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트랜드라는 말에 귀기울이고, 실증적인 데이터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 결과는 넓은 길을 택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면, 메시아주의이다. 메시아주의는 타성에 젖은 신앙이다. 인류가 이룬 성취에 대한 교만에 빠지고, 욕망을 우상화하고, ‘내가 먹을 것, 마실 것’ 걱정을 달고 살면서 ‘이웃사랑’은 잊어버린 신앙이다. 모두 해체할 대상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좁은 길을 택한 이들이 끝에 도달하여 성취감을 느낄 때, 그들도 또한 교만에 빠져 해체할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수많은 죄중에서 가장 나쁜 죄를 교만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 우린 언제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 언제든 지고 있는 십자가를 땅에 내팽게칠 수 있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해체불가능한, 아니, 해체불필요한 ‘메시아성’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주시옵소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말을 선포하듯, 데리다의 철학도 아프게 다가온다. 그 자신도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철학자의 철학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방향을 정해도 좋은 것일까? 다시 이 책이 ‘외계인의 언어’로 멀어지려 하는구나. 시지이프의 바위는 다시 저 깊은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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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이야기 - The Story of Modern & Contemporary Art
신일용 지음 / 밥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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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이들에게 현대미술은 불편하다. 신일용은 이 불편함을 덜어주려고 이 만화책을 만들었다.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인상파 그림이라고 하며,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린 사실화보다는 약간 변형한 인상파 그림에 재미와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나, 극도로 신경질적인 뭉크 그림이나, 소변기를 가져다 놓고 미술이라고 한다든지, 포르말린 어항에 상어를 넣은 것 등을 보면 당황하고, 본심과 다른 얘기를 해야하는 것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신일용은 이러한 불편함을 이해한다. 그도 우리와 같이 그러한 불편함을 가지고 출발하였던 것 같다.

미술에 관한 만화책이지만, 베토벤이 어느 악보에 써놓았다는 ‘Mus es sein?’(꼭 그래야 하나?)로 시작해서, ‘Mus es sein?’으로 끝난다. 그러고 보면, 신일용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mus es sein인 것 같다. 이 책은 선형적으로 가지 않고 소용돌이형으로 상승하며 범위를 넓혀간다. 역사적인 순서보다는 논리적인 흐름과 인과관계가 중요하다. 미래의 일이 복선으로 깔리기도 한다. 전작인 ‘동남아 이야기’에서처럼 이번에도 겉모습보다는 그 아래에서 흐르는 시대 정신 또는 역사적 배경을 캐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이 노는 거 같지만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이 공부하는 방법인 거 같다. 흥분하지 않고, 휩쓸리지 않고 겉모습에 속지 않으면서, 종합적으로 맥락을 잘 잡아서 한 가닥만 당기면 나머지 것들이 저절로 생각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여러분들도 신일용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기 바란다. 더 이상 현대 미술에 불편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의 원칙 1은 쉽게 하자, 원칙 2는 군더더기가 없게 하자라고 한다. 그렇게 했다.

미술의 3번의 혁명을 거쳤다고 한다. 1차 혁명은 5백여년전 르네상스와 같이 시작되었다. 신에게서 해방되어 종교적이지 않은 대상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2차 혁명은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이다. 사실적으로 그려야 한다는 미메시스(mimesis)에서 해방되었다. 3차 혁명은 아름다움에서 해방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대략 1960년 이후로 본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경제 또는 사회적인 변화와도 때를 같이 한다. 1차 혁명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와 같이 시작되었다. 2차혁명은 대부분의 선진국이 19세기 말 이후 소득이 급속도로 상승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모든 나라의 소득수준은 19세기까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하키 스틱 그래프라고 한다. 골프채 곡선이라고 해도 되는데, 헤드부분에서 갑자기 꺽이는 선이다. 대량생산이 시작되고,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과 더불어 민주주의가 정착되다가 전체주의가 발생하는 시점이다. 이때 모더니즘이 시작되었다. 또한, 3차혁명인 포스트모던시대가 시작되는 1960년대는 2차대전후 베이비 붐이 끝나는 시기이며, 신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시작되고 공동체 의식이 축소되던 시기이다. 이 책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커머셜리즘으로 나뉜다.

1. 모더니즘(20C 초반)

귀족 중심에서 민중 중심으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사진술의 발달로 사실화가 설 땅이 좁아지고, 그림의 대상에 서민의 삶이 포함되었고, 주석 튜브가 발명되어 야외에서 유화를 그릴 수 있게 된 환경에서 인상파가 등장했다. 인상파는 향후 여러 갈래로 영향을 끼친다. 면의 형체를 중시하는 폴 세잔의 그림은 피카소의 큐비즘을, 원시의 색채를 사랑한 폴 고갱의 그림은 색채 혁명아 마티스의 야수파에 영향을 미쳤다. 그 변화의 순간순간에 우리가 자주 보아오던 그림들이 등장한다. 신일용 책이 주는 재미중에 하나는 그 그림들에 들어간 능청스러운 신일용의 위트를 즐기는 것이다.

모더니즘에서는 ego의 등장이 중요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그런데, 각각의 생각은 다르고, 자기 생각을 크게 외치는 메니페스토의 시대이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세계의 중심이 미국으로 이동할 때, 미술도 그랬다. ‘아름다운 시대, 라벨르 에포끄’의 아름다운 주인공들이 무도한 나치에게 밀려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구겐하임이 미술 수집의 중심이 되고, 그린버그가 미술 비평의 거두가 되었다. 그의 판단으로 아방가르드(전위부대, 고급 문화)와 키치(저급 문화, 이발소 그림)가 구분되었다.

이 책에서는 미국이 유럽에 가진 열등감, 미술계가 음악계에 가지던 열등감에 미술의 역사가 영향을 받는 것을 잘 표현하였다. 미술계의 알 카포네라고 할 수 있는 그린버스에게서 가장 큰 수혜를 받은 것은 잭슨 플록이며, Jack the Dripper(뿌리는 잭)으로 불리웠는데 이는 Jack the ripper(미국 서부시절 총잡이 ‘목 따는 잭’)의 패러디이다. 그린버그는 formalism을 주장했는데 이는 자연이나 음악과 무관하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형체를 말한다. 추상이든, 구상이든 칸트가 말하는 보편적인 감동을 줄 수 있으면 미술이다. 이 책에서 용어의 오역으로 아시아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을 지적한다. 앞서 큐비즘은 입체파의 ‘입체’와 관련이 없고, formalism은 형식주의라고 번역되었지만 형체주의라고 하는게 더 좋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2. 포스트모더니즘(1960~)

언어와 로고스간 위계질서의 파괴, 거대 담론의 파괴 등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을 설명하는데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현대 철학이 동원된다. 신화백은 어려운 철학을 차용한 어려운 미술 이야기를 그림으로 재미있게 풀어간다. 역시 그림은 그림으로 설명하는 게 좋은 거 같다. 남녀의 위계질서를 포커 카드에서 King과 Queen의 한끗 차이 순서로 풀어내는 것을 보고는 무릎을 치게 된다.

수많은 책에서 가장 액기스가 되는 명언들을 뽑아내어 일타강사처럼 설명한다. What you see is what you see, from purity to plurality, 작가주의 없는 minimalism, 모더니즘의 표현주의에서 포스트모던의 개념주의(conceptualism)의 차이 등등. 그런데, 개념미술은 뒷배경을 알아야, 이해가 된다고 하니 이렇게 만화책으로 이야기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백남준과 같이 플럭서스 운동을 한 것으로 유명한 요셉 보이스의 한 그림은 3페이지를 할애해서 배경을 설명한다. 2차대전때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오지에서 추락했는데, 유목민들이 살려내었다. 이것을 말로 하면 매우 지루했었을 것이다.

3. 커머셜리즘

여기서는 ‘브랜드’가 큰 글자로 다가온다. 장 보들리야드가 폼재며 설명한 ‘기호적 가치’가 빠져나갈 수 없는 거미줄같은 카르텔에 걸려서, 보통 사람들은 생각도 못 하는 가격으로 그림들이 팔리는 생태계를 조롱한다. 그 카르텔에는 갤러리, Saatchi(사치!)로 대표되는 콜렉터, 딜러, 경매, 아트 페어, 비엔날레, 도큐멘타, 뮤지엄 등이 포함되는데 이는 만화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수사관들이 칠판에 수없이 붙인 포스트잇과 연결된 선과 선으로 사건 개요를 파악하듯이... ‘좋은 미술이 비싼 게 아니라, 비싼 미술이 좋은 것이다’로 요약된다. 루브르나 구겐하임같은 뮤지엄도 유목민의 나라에 프랜차이즈로 생겨난단다. 맥도날드가 각 도시에 생겨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브랜드를 키우기 위해 그야말로 ‘별 짓’을 다하는 재미있는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벽에 테이프로 바나나를 붙여놓은 작품이 어떻게 1억5천만원에 팔릴 수 있었을까? 그것을 낼름 집어먹은 이는 누구이며, 어떻게 되었을까?

이러한 거대한 생태계를 신화백은 ‘거대한 주가 세력’이라고 일갈한다. 이른바 작전세력이 있고, 작전들이 재미있게 그려진다. 미술계뿐만 아니라, 돈과 인기는 있지만 고상함이 필요한 셀럽들도 가담하고, 갖가지 노이즈 마케팅도 등장한다. 마네는 앞치마에 물감자국이 가득했지만, 현대의 미술가는 말끔하게 차린 세일즈 맨 또는 그림 생산을 지휘하는 공장장으로 그려진다. 조영남의 화투 그림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데 유용해서 여러 번 등장한다. (허울좋은?) 개념이 중요한 시대이므로 대신 그리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지 못 한다. 앞으로 chatGPT로 그린 그림은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벌써 어느 미술전에서는 AI가 그린 그림이 상을 탔다고 하지 않는가?

언젠가 읽은 책 ‘혁명을 팝니다.’가 생각난다. 체 게바라의 파란만장한 스토리의 힘을 스타벅스 홍보에 사용하였다. 미술계에서 뿐만아니라 이제 모든 그럴듯한 스토리(텍스트)는 상품화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신화백이 소개한 일화 중에 얼굴없는 그래피티 화가 뱅크시 얘기가 재미있다. 뱅크시가 그린 종이 그림이 경매에 붙여진 적이 있단다. 경매 낙찰 후 분쇄기 동작하도록 해놓았다. 그런데, 그 분쇄기가 중간에서 멈추어 일부만 분쇄가 되었다. 몇 년 후 그 그림의 가격은 18배로 뛴다. 어디까지가 작전이었을까?

책을 덮고 신화백이 얘기해준 미술의 커머셜리즘이 우리에게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Mus es sein? 내가 읽은 ‘모든 것이 가상이다’ ‘한계비용제로시대’에서는 디지털 시대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한다. 고흐의 해바라기의 진품은 수백억원에 팔리지만, 복제품은 거의 무료로 구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이다. 즉, 음악은 연주되고 사라지므로 소유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미술의 ‘진품 아우라’도 사라진다. ‘디지털 아우라’의 시대에는 소유(to-have)의 의미가 사라지고, 존재(to-be)가 중요해진다는 낙관론을 얘기하는 이들도 있다. 나아가, 게임을 즐기는 MZ들은 감성(to-feel)과 경험(to-experience)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누구나 그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기술이 급하게 바뀌고 있다. 메타버스는 이를 도울 것이다. NFT(Non-Fungible Token)는 이를 방해하는 도구일 수도 있고, 이를 도우는 도구가 될 수 도 있다. 미술가들은 시대를 앞서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ego를 감상하던 시대가 있었다. 이제 보통 사람들의 ego 하나하나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베토벤이 그랬고, 신화백이 이 책을 쓰면서 그랬듯, 우리도 항상 이 말을 기억하며 힙하게 살아보자. Mus es s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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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아일랜드 시인동네 시인선 210
강성철 지음 / 시인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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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면 우리에게서 무엇이 빠져나간단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란다. 자연스럽게 죽음을 다가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단다. 근육세포가 1년이면 10%가 빠져나가면서 팔과 가슴에 뼈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근육이 빠지면, 관절에 무리가 가서 목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무릅이 아프다. 뇌세포도 점점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흔히 알고 있던 연예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 아주 친숙한 영어 단어의 스펠링이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심지어는 평생 같이 살아온 마누라의 존함까지도 언뜻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이것은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행이 긴장과 자극을 주면 늦춰진다. 70대, 80대인데도 보디빌딩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울퉁불퉁한 근육위에 올려져 있는 쭈글텅 얼굴이 기괴하기도 하지만, 그 미소는 부럽다. 70대의 패션모델은 백발과 주름과 균형잡힌 몸매가 젊은 패션모델이 주지 못하는 원숙미를 풍기기도 한다.

이제부터는 빠져나가는 것을 허용하느냐, 아니면, 적절한 긴장과 자극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가는 자신의 선택이 되었다. 그 선택은 노욕이라고 하는 대책없는 욕망의 결과일 수도 있고, 품위있게 익어가고 싶다는 의지일 수도 있다.

66세의 강성철 시인이 ‘슬픈 아일랜드’라는 시집을 내었다. 그런데, 그 시집은 슬프지 않다. 그리고, 아일랜드처럼 외롭게 떠 있는 것을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과거와 미래, 동양과 서양, 자연과 인간, 자식과 부모 모두가 서로 어우러지는 모습을 그린다. 이것은 같은 나이의 우리들에게 긴장을 요구하며, 크나큰 자극이 된다. 원숙하게 늙자고 한다. 나에게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허용하지 말자고 한다.

그림으로 비교하면, 그래피티에 비교하고 싶다. 경찰이 오는지 망을 보아가며, 급하게 그리는 그래피티. 도시의 음침한 골목의 벽을, 흉물스럽게 서있는 콘크리트 기둥을 현란한 예술로 승화시키는 거리의 그림. 고상한 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스프레이를 사용하여 그린 그 그림들. 이 시들은 또한 소변기를 걸어놓고 예술이라고 했던 뒤샹의 ‘샘’을 생각나게 한다. 이것도 시인가? 시에 이런 단어가 들어가도 되는가? 시인이 국문학과를 나오지 않아서 그런가? 그래도, 강 시인은 우리나라 시단에서 방귀깨나 뀌는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단다. 피카소의 그림이 초등학생 그림보다 무엇이 나은지 모르는 나야 받아들일 수 밖에...

‘슬픈 아일랜드’는 우리가 어릴 적에 명절이면 받는 종합선물과 같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과자가 들어있다. 각자 좋아하는 과자를 하나쯤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에게도 ‘어여와, 아무 거나 골라서 하나 먹어봐’하고 있다. 그 과자의 성분이나, 유해 색소가 있는지 없는지, 당뇨에 좋은지 나쁜지 생각할 거 없이 그냥 덥썩 입에 물고 먹기 좋게 되어있다. 그래서, 잠들어가는 뇌세포를 쉽게 자극한다. 현란한 말장난에 어느덧 내 뇌세포들은 춤추고 있다.

시에 문외한인 내가 시를 읽은 감상을 써보고자 한다. ‘슬픈 아일랜드’에는 크게 나눠서 3종류의 시들이 내게 다가왔다. 첫째는 깔깔거리는 시들, 둘째는 피식피식대는 시들, 셋째는 마음이 좀 아려오는 시들.

먼저, 깔깔거리는 시들을 한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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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노총각들이 낄낄거리면서 바지춤을 내리고 소피를 본다.

오줌 줄기를 쳐다보며 눈이 휘둥그래진 처녀 들국화들

그들의 봉긋한 젖가슴을 허수아비들이 쳐다보자

싫지않은 듯 호호호 웃으며 흰 눈을 치켜뜨는 처녀 들국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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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들국화 운동회’라는 시이다. 가을들판에 나가면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운동회를 하듯 떠들썩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부는 가을 들판에서는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대개 슬픔을 씹게 될텐데, 왁자지껄한 운동회가 생각나다니 시인이 자연에 가지는 애정이 놀랍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넘어 ‘나는 경탄한다. 고로, 나는 살아있다.’라고 하고 싶다. 이런 류의 시로 ‘칠월 칠석’에서는 별이 초롱초롱한 밤하늘이 왁자지껄한 잔치판이 되고, ‘샤려니 숲길’은 더이상 조용한 숲길이 되지 못 한다. 치톤피드는 그만 됐고, 삼나무들과 손잡고 춤을 주자고 한다.

내 뇌세포를 자극하여 빠져나가지 못 하게 강력한 힘을 준 두 번째 종류의 시들은 피식피식거리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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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가 퇴계에게 줄을 대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였고,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자와 칸트를 비롯한 대륙의 합리주의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에 반해 에피쿠로스학파의 소피스트들, 영국의 실용주의자인 밴덤, 흑묘백묘론으로 중국을 실용주의로 몰고 간 덩샤우핑은 현실적으로 율곡에게 줄을 대었다. ... (슬픈 아일랜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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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슬픈 아일랜드 연작이다. 시집에는 슬픈 아일랜드 8까지 나온다. 이 시들은 내가 요즘 관심가지고 보는 메타버스를 생각하게 한다. 메타버스는 가상세계인데, 여기서 버스는 universe에서 따왔다. 강성철의 메타버스에서는 과거와 현재, 조선과 그리스, 자연과 인간이 마주잡이로 뒤섞인다. 메타버스를 넘어 멀티버스이다. 슬픈아일랜드에서도 나왔지만 프르스트의 의식의 흐름이랄까, 새벽녘에 가끔 꾸는 꿈처럼 엉망친창으로 느낌과 연상들이 뒤섞인다. 그런데, 그것이 묘하게 아, 우리가 이렇게 화합할 수도 있는 걸 공연히 뭘 나눠서 싸우고, 울고 웃고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잭슨 플록의 흩뿌린 페인트보다는 생각을 하고 배치한 단어들이다. 박정희가 시저가 되고, 김재규가 블루투스가 된다. 그 사이에 심수봉도 끼어든다. 시인의 머리에서 출격을 가다리며 넘실대던 생각의 파편들이 봇물치듯 터져나와서 축제의 행렬처럼 골목을 꽉채우며 넘쳐난다. 알고봤더니, 시간으로 멀리 떨어진 것들도,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들도, 사상적으로 멀리 떨어져있던 것들도 다 친구였여! 이 시들은 문명과 역사에 대한 시이다. 전문가의 시평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시는 문명/역사를 등한시 해왔다. 관심밖이라기 보다는 시적 형상화가 그만큼 어렵다.” 그런데, 정작 이 시들은 내게 무지무지 쉽게 읽힌다는 게 그의 능력이 아닌가 싶다.

세 번째로 다가오는 시는 마음을 아리아리하게 하는 시들이다. 그가 등단하던 때부터 가지고 있던 느낌이다. 1991년 첫 시집 ‘아담아, 네 어디 있느냐’에 실린 ‘아버지 술 드세요’와 비슷한 맥락의 시이다. 30년이 지난 후 그 느낌이 많이 익어서 승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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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대나무였다 ... 머릿살, 장살... 나의 뼈대를 만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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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비상해야만 했던 시절엔

뻥 뚫린 가슴으로 바람이 자꾸 빠져나가

...

뻥 뚫린 가슴으로 인해 남보다 쉽게 하강할 수 있음을

...

끈질긴 인연의 팽팽한 연줄 끝에 매달려 있는 아버지가

... (방패연)

나는 잘 공감하기 어려운 슬픈 가정사가 있었고, 그것을 삭혀내는 과정이다. 그중에 ‘재산 상속 포기 청구’는 절창이다. ‘구절초 어머니’와 ‘물고기 아버지’가 비슷한 감성에서 쓰인 시이다.

강성철의 시는 시를 모르는 내게도 감상문을 쓰게한다. 전문가인 우대식(시인)의 시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의 시적 전범을 마치 자신의 시로 착각하여 뻐꾸기를 자기의 친자식처럼 키우는 미친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팽팽한 시적 긴장을 유지한다. 이것은 참다운 삶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 걸림없는 자유자재, 종횡무진의 필법으로 읽는 이들은 모처럼 색다른 체험을 할 것이다.”

‘걸림없는 자유자재, 종횡무진’은 다음 구절을 보면 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첫 시집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에서 ... 지나가는 계집애들 뒷꽁무니나 쫓아다니며 “커피있으면 시간 좀 마실까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시적 긴장은? 상징은? 운률은? 그런 거 다 빼고 언어유희로만 시가 되는가? 모든 사람은 시인인가? 그럼 내가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도 시가 되겠네?

아마 그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싶어하는 거 같다. 팝아티스트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에 만화가 들어간 건 새발의 피이다. 단어 차별 금지! 즉, 시어와 시어가 아닌 것을 구별하지 않고 시가 된다고 주장한다. 킹 목사의 연설을 생각나게 한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right down in Georgia to Mississippi and Alabama,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will be able to live together as brothers.” 그에게 모든 단어는 평등하게 시어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삶도 시이다.

이번 시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둥글다는 것’이다. 둥근 것중에 ‘어머니의 등’은 시인의 다른 시에서 같은 의미로 나온다. 이 시에서 먼저 몇 가지 둥근 것을 얘기한다. 아침이슬, 노래기와 쥐며느리, 노숙자, 그들을 일일이 돌아본 뒤,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다음 구절을 썼다. '가슴 뭉클'도 감정 근육을 튼튼히 하는 좋은 '자극' 아니겠나?

“둥글다는 것은 모난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자기방어일 것이다”

"둥글다는 것은 모난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자기방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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