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대, 라 벨르 에뽀끄 3 - 만화로 떠나는 벨에포크 시대 세계 근대사 여행 아름다운 시대, 라 벨르 에뽀끄 3
신일용 지음 / 밥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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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부터 3편까지를 기승전결로 나누면, 3편에 결에 해당한다. ‘라 벨르 에뽀끄라는 제목이 아름다우니 비극으로 맺어지는 것이 더 극적이다. 3권에 제국주의적 침략과 당시 최고의 문명국간의 전쟁을 배치한 것은 참 잘한 선택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픽션이 아닌 다큐멘타리이므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죽은 수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르네상스 이후의 인문학과 과학의 발전과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위대한 약속을 하는 듯 했다.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서 이성의 시대가 되었으니, 자연을 정복하여 모든 이들에게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약속이다. 그 약속의 실현에 대한 희망을 상당히 접게 한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다.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았는데, 파괴력은 엄청나게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 벨르 에뽀끄는 그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한껏 부풀었던 희망의 시대였다.


유럽에서의 풍요로운 라 벨르 에뽀끄를 위해 제국주의의 수탈이 있었고, 기독교 문화권이 아니면, ‘타자로 보고, 전혀 논리도 없이, 무절제한 욕망에서 비이성적인 침략을 하였다. 성경의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교도의 도시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대포와 함께 선교사들이 도착해서 전도하고, 전도가 되지 않는 이들은 구약의 가르침대로 마음대로 살상하고 약탈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중국을 나누어 먹는데 협력하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서로 맞붙게 되는 것이 흥미롭다. 3권에서 나오는 2차 아편전쟁, 노일전쟁, 1차 세계대전에서 각국 플레이어들에 빙의하여, 전쟁 이야기를 맛깔나게 이끌어 가는 작가의 능력이 대단하다. 컴퓨터 게임에서처럼 죽어도 다시 리셋하면 살아나는 것이라면 전쟁은 매우 흥미진진한 게임인 것이다. 작가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심리하에 흥미진진한 게임을 벌렸던 것을 보여준다. 그것을 위해 잘 발굴되어 서로서로 잘 짜여진 디테일을 준비하고, 작가의 상상력으로 버무려서 맛을 더한다. 하나의 예로 연합군의 틈바구니에서 뉴 플레이어 일본이 우습게 보이면 안된다라고 다짐을 하는 장면이 재미있다.

 

전쟁이 없는 기간이 오래되면, 남자들의 권력이 하락한다고 한다. 매우 가부장적인 말이다. 전쟁 이야기가 대부분인 3권은 그런 면에서 힘이 곧 정의인 가부장적 사고에서 작가는 이야기를 끌고 간다. 따라서, 패배자인 중국과 조선은 조롱의 대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 민초들의 저항이었던 의화단 운동도 희화적으로 그려진다. 그 민중의 저항은 아마도 마우저뚱의 대장정으로 연결되어 오늘의 중국을 이루어낸 힘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작가가 1권에서 파리코뮌을 다루었던 것에 비하면 의화단에 대한 평가는 의외로 인색하다. 마찬가지로 조선을 다루는데도 제국주의적 사고에 근거한 식민사관적인 면이 엿보인다. 명성황후로 부르지 않겠다는 것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조정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읽을 수 있지만, 그렇다면, 어떤 나라는 제국이고, 어떤 나라는 왕국인가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한다. 반인류적이고, 비이성적이라도 다른 나라를 넘어뜨릴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제국이 되는 걸까?

 

미국의 통킹만 사건은 양차대전이후에도 인류의 반성은 철저하지 못하여, 가부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철학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또한 미국에서 군산복합체(military industrial complex)가 아직 기승을 부릴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군국주의 프러시아에서 군대가 국가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하듯 군산복합체가 국가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음모론만으로 치부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다큐멘타리에서 작가의 철학을 읽으려고 하는 것은 옳은가? 그가 제공하는 것은 피카소가 몽마르뜨에 계속 머무르지 않고, 끌리쉬의 큰 저택으로 이사간 것처럼 팩트일 뿐인데... 더구나, 가 피카소의 창작의욕을 약화시키지 않은 것도 팩트이다. 그러나, 팩트의 선택과 배치, 좀더 들어가서는 설명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작가의 철학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 철학의 후로꾸(fluke)로 멘쉐비키와 볼쉐비키를 설명하는 것이 재미있다.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국이 세워지는 것으로 연결된다. 영국과 러시아가 유럽과 극동 아시아간에 해상무역로와 육상무역로를 놓고 경쟁하는 것은 최근의 남북통일과도 관련되는 대목이라 관심이 갔다.

아비뇽의 여인들(1907)을 현대 미술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표현 기법과 주제면에서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피카소는 주로 파리에서 살았지만, 미술의 새로운 시대를 열면서 주인공을 고향의 여인들로 삼은 것이 재미있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랍비가 되면서 신약의 시대가 열린 것처럼... 예술은 라 벨르 에뽀끄를 지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옛 것은 사라진다. 때로는 말없이, 때로는 러시아의 마지막 짜르처럼 화약냄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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