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가도 가도 왕십리 - 변두리 사람들의 끈질긴 역사 이야기
김창희 지음 / 푸른역사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예수쟁이이다.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다. 잘 났든 못 났든,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더라’한 만물을 사람들보고 다스리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지어 낙원에서 쫓겨난다. 이때 만물도 같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컹퀴를 내는’ 땅으로 된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내려보내어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한다. 이때 세상 만물도 같이 구원을 받길 원하신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 8:19~22”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 개인의 구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개인의 구원과 더불어 가능해지는 만물의 구원에 대해서 잘 생각하지 않는다. 김창희의 <가도가도 왕십리>는 한 지역이 한 사람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김창희는 이를 ‘지역성(placeness)’라고 애둘러 말하지만, 한 국가의 수도에서 시체가 빠져나가고 오물이 빠져나가는 문 근처 지역이 어떻게 ‘새 땅(요한 계시록 21:1, 4)’이 되어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땅은 수백년간 도성에서 나오는 시체와 오물을 받고, 신선한 청무와 배추로 돌려주었다. 왕십리(旺十理)를 한자로 쓰면 가운데에 십자가가 보인다.

김창희는 수십년간 기자로 살아온 대기자이다. 잠시 벌이가 좋았던 어느 시대의 기자는 지하철을 타지 않아서 서민을 모른다는 얘기가 있었다. 김창희는 발로 기사를 쓰는 타입인 거 같다. 이 책을 쓰기 위해 그가 찾아다닌 자료와 그가 인터뷰한 사람과 그가 현장조사를 한 발품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또한 철학과를 졸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답게 그 조각조각들을 굵은 선으로 또는 희미한 선으로 연결하여 ‘구원받은 왕십리’를 우리가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방식을 그는 ‘르포르타주’라고 부른다. ‘날 것 그대로’의 재료를 이용하는 글의 성찬이다. 그러고도 <가도가도 왕십리>라고 한다. 해도해도 더 많은 얘기가 있어 이 책은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하왕십리 696번지의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각 번지번지마다 사연이 있을 것 아닌가?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고, 청계천은 거꾸로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청계천이 한강과 만나는 언저리가 왕십리이다. 이 책에는 13가지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현재부터 과거로 거꾸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현재의 ‘나’로부터 시작해서 점점 사고의 지평을 넓혀가게 하는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같이 작가는 ‘나와 다르지 않는’ 사람의 얘기를 발굴하여, 독자인 ‘나’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자신감을 주려고 한다. 태견의 복원이라는 ‘돈 안되는 짓’을 필생사업으로 하여 결국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이루어낸 신한승의 얘기로 시작한다. 태껸자체가 중류이하 생활인들의 무예이다. 태껸은 빙글빙글 탈춤추듯 움직이고 ‘이크 에크’하면서 치명상을 입히지 않고 상대방이 스스로 굴복하도록 한다. 소설가 김동인과 만담가 장소팔을 연결하는 개념도 재미있다. 김동인은 순구어체로 글을 썼고, 장소팔은 하층민들의 이야기를 만담의 소재로 삼았다. ‘배따라기’ ‘광염소나타’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등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 입말의 한 원형으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김동인은 누구도 지켜보는 사람없이 임종을 맞아 그 시신은 왕십리 밭두렁에 엎어져 있었다고 한다.

펜으로 나라를 지키려한 김봉준과 칼로서 나라를 지키려한 지정천의 임시정부 활동을 읽으면서 해방전후에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의 역사를 다시 새길 수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뚜렷한 답이 없었던 사상적인 갈등속에서 정부로서 품격을 지키면서 외교활동과 자주 독립을 위한 투쟁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낸 이들을 잊지않게 한다. 정식 재판을 못 받고 장폐(매고문에 못이겨 사망)한 카톨릭 순교자들의 시신들과, 임오군란 관련 사형수들의 시신도 광희문을 통해 도성에서부터 버려져서 왕십리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런데, 작가는 그 이야기를 통해 광희문은 결국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음을 독자들이 깨닫게 한다. 죽으면 살리라.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광희문과 왕십리는 아픔을 딛고 우리에게 새희망으로 말을 걸고 있다. 고맙지 아니한가?’ 오랫동안 변두리였으나 이제 5개의 지하철노선이 모이는 왕십리역에서 한번쯤 새겨볼 말이다.

‘하왕십리 696번지’는 우리 동기 이진성의 본적이다. 증조부인 농부 이성문이전 그의 조상이 누구였는지 밝혀진 것은 불과 수십년전이었다. 최초로 카톨릭 영세를 받은 이승훈의 죽음과 노론소론의 피비린내 나는 당쟁 사건과 연결된다. 멸문당한 이진성의 조상은 원래의 성을 버리고 경성 이씨로 살았다. 그리 보면 우리의 배우 이진성이 극단 성북동비둘기 연극 ‘샐러리맨의 죽음’과 ‘알바의 집’에서 ‘나와 다르지 않는’ 사람들의 얘기를 우리들에게 전달하고자 비지같은 땀을 흘린 것도 지극히 왕십리 ‘똥파리’다운 것이었다. 오늘날 세상을 향한 격쟁이다. (격쟁:조선시대 일반 백성이 궁궐 안으로 들어가거나 임금이 행차할 때에 징이나 꽹과리를 치며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는 것)

13개의 얘기중에 작가가 가장 아낀 것은 박지원의 <예덕선생전>일 것이다. 예덕, 더러울 穢, 큰 德, 즉, 더러움에서 덕을 찾는 엄행수의 얘기이다. 창밖 도로에 오물을 바로 투척했다는 프랑스 파리에서는 그래서 하이힐이 발명되었다고 들은 일이 있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화장실이 따로 없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와 다르게 ‘당당한 직업인’ 엄행수는 ‘무상수거 유상처분’의 방식으로 서울의 똥을 처리하였고, 덕분에 똥파리가 윙윙거리게 된 왕십리로부터 서울에 신선한 채소를 공급할 수 있게 하였다. 작가는 그에게서 ‘자유인의 향기’를 느낀다고 했다. 어느 학교 교훈과 교가를 생각나게 한다.

이 책은 성경이 말하는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 ‘나와 다르지 않는’ 사람들의 얘기를 한다. 읽다 보면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은 결국 알아가는 것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나도 진정한 예수쟁이이고 싶어진다.

광희문과 왕십리는 아픔을 딛고 우리에게 새희망으로 말을 걸고 있다. 고맙지 아니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사람의 마을 - 신장의 산문
류량청 지음, 조은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문구의 소설 ‘관촌수필’을 생각나게 하는 글이다. 가차타고 가면서 몇 초만에 옆으로 휙 지나가버릴 법한 시골마을에 무슨 사연이 그렇게 많은지 연작으로 여러 권 썼던 것으로 안다. 충청도 마을의 사람 하나하나, 그들간에 오가는 정과 사소한 갈등이 또하나의 우주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용된 단어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고, 나는 사용하는 단어의 수가 문화의 두께를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에 다음부터 농촌의 삶을 존경하기로 했었다. 이문구는 소설가 협회 사무실에서 무급으로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을 맞았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 좋아하는 이문구는 간이 나빠져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 꼭 그 같은 소설이었다.

‘한 사람의 마을’은 농촌에서 나서 농촌에서 20대까지 살았던 작가가 그의 고향을 추억하며 쓴 수필집이다.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지칠 때 두고두고 꺼내보고 싶은 책이다. 황사량은 변화가 없다. ‘황사량에서 서른이 되면 눈을 감고 살 수 있다. 불안하다면 7, 8년쯤 지나서 눈을 떠보면 된다. 무슨 신기한 일이 있을 턱이 없다.’ 그런 황사량이 작가를 통해 상상력과 호기심과 사랑으로 가득찬 세계가 된다. 땅굴집 벽으로 튀어나오는 나무뿌리에게서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해듣는다. 그는 사람을 관찰하고, 가축에게 공감하고, 풀이나 벌레들과 대화를 한다. 가축, 풀, 벌레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한다. ‘햇빛이 나무꼭대기나 지붕을 종종걸음으로 지나간다.’ 아침에 뜬 해가 동쪽으로부터 마을을 찬찬히 홅으며 빛이 퍼져가는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아침 햇살은 잡초를 뽑듯 지표면에서 어둠을 긁어낸다.’ ‘햇살은 나를 환히 비추어 따라다녔다’ 그가 의인화하는 대상은 모든 것이다. 바람, 나무뿌리, 밥짓는 연기, 그것들이 모두 감정과 생각을 가진다. 심지어는 시간마저도... ‘시간은 진즉 이 땅에 실망했다.’ ‘지금은 모든 추위가 나만 상대하고 있다.’

그의 머릿속에 시간과 공간은 무한히 축소되거나 확대된다. 어느 때는 몇 수십년이 파노라마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기도 하고, 짧은 순간이 정지된 듯 길게 서술되기도 하고, 온마을이 통째로 하나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하나의 풀벌레가 전 공간을 차지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사물을 보는 눈이 현미경이 되기도 하고, 망원경이 되기도 한다. 책의 중간까지 독자는 황사량에 푹 빠지게 되고, 책의 후반에서는 그 땅을 떠나 십수년 살다가 다시 돌아와서 쇠락한 그 마을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저자의 허전함과 회한을 같이 공감하게 된다.

번역을 한 조은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다. 섬세한 감성을 놓치지 않고 우리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었는지 신기하다. 나무뿌리를 통해서 마을의 얘기를 듣는 류량청만큼이나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https://blog.naver.com/dougsuh/224010808464  


‘햇빛이 나무꼭대기나 지붕을 종종걸음으로 지나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치심 잃은 사회 - 사회를 지탱하는 도덕의 붕괴와 공동체의 해체
이철우 지음 / 시크릿하우스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고백한다.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부끄러운 일을 했다. 그것을 이제는 지우지 못 하니 애써 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새록새록 떠올라서 괴롭다. 내 경우 군대 쫄병때 건빵 훔쳐먹다 나보다 나이 어린 선임에게 욕 먹으며 빠따 맞은 게 그중 하나이다. 대학 졸업하고 가서 남들보다 2년 늦게 갔으니, 선임이 나보다 한두살 어렸었다. 70년대말 대학캠퍼스에서 가방 열어보라는 이에게 누군지도 묻지 않고 바로 열어 보여준 것도 부끄러운 일에 속한다. 건빵 훔쳐먹은 거 보다 나이 어린 선임에게 맞은 게 더 부끄러우니 사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수치심과는 거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가방 열어보여 준 것도 내가 적극적으로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은 아니니 이 책에서의 수치심과는 거리가 있다. 사실 이 책에 나오는 수치심과 관련된 일중에 수영장에서 오줌싼 거 정도외에는 여기 쓸 수 없다. 정말로 부끄러워 여기 쓰지도 못 하는 것이 책 한 권 분량정도 된다.

고등학교때 윤리선생님이 칠판에 동심원 3개를 그리고, 가운데가 법, 그 다음 윤리, 가장 바깥쪽이 관습(?)이라고 하였다. 그 시절부터 한참동안 그 그림이 유효하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 그림이 많이 일그러진다는 것을 느낀다. 관습은 조각조각나고, 윤리는 점점 얇아지고, 법이 커지면서 한쪽으로 삐져나왔는데 오히려 그 부분이 커지면서 전체를 덮으려는... 기묘한 그림이 되는 거 같다. 이 책은 나의 그런 느낌을 아주 구체적으로 아주 종합적으로 잘 정리해놓았다. 

책에는 최근 여러 매체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내용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다. 진영논리, 사법엘리뜨, 검찰공화국, 조국 가족, 부정선거 음모, 김건희, 사이코패스, 계엄, 젠더 전쟁, 성공지상주의, 사법카르텔, 전관예우, 광우병 데모, 유상증자, 도덕불감증, 학부모 등쌀, 선민의식, 위선, 익명성, 알고리즘, 확증편향 등등. 이 책은 민영환의 자결 얘기로 시작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서양의 죄책감과 동양의 수치심을 비교하면서 문화권별 차이를 비교하여, 우리 사회의 병폐를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수치심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다는데 수치심이 없어졌다니 이 시대에는 돌연변이가 있어난 것이다. 사회심리학을 전공한 저자는 사회의 구석구석을 돋보기로 관찰하여 증거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각각의 조각조각들을 수사관이 수사하듯 칠판에 여기저기 붙여놓고 그것들을 관통하는 시대적 심리상태를 진단하였다. 결론은 ‘수치심을 잃은 사회’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 상태가 지속되면 사회가 붕괴한다고 경고한다. 사회 붕괴이전에 개인적으로 돌연변이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이익을 극대화하지 못하면 부끄럽다. 법기술자들은 부당하지만 법적무결하게 이익을 취한다. 수치심이 없는 것은 능력이고, 뻔뻔함은 전략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극장에서 앞 사람이 일어나면 가려지니까 뒷 사람도 하나둘 일어나듯이 붕괴되는 쪽으로 진전된다.

진영논리에 대한 실험이 재미있다. 대학생들을 무작위로 편을 나눈 후, ‘수당을 자기편:다른편 = 15$:13$과 7$:1$로 한다면 어느 것을 택할래?’할 때, 대개 후자를 택한다고 한다. 내가 손해보더라도 상대방이 이익보는 꼴을 못 보는 것이다. 나도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진영논리에 대한 부분을 읽고 내가 지지하는 어떤 이의 자세한 판결죄목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나도 확증편향이 있었음을 깨닫고 균형추를 약간 움직였다. 아주 약간...

전에 외국인들과 다니면서 관찰한 건데 빨간불에 차가 없을 때 나라마다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일본과 미국 친구들은 차가 없더라도 빨간불이면 길을 건너지 않았다. 그런데, 유럽 친구들은 차 없으면 바로 건넜다. 한국인들은? 때때로 달랐던 거 같다. 요즘 나는 아파트 근처의 좁은 건널목에서 어린 아이들이 보고 있으면 안 건너고 안보면 건넌다. 수치심이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갑자기 심하게 없어졌을까? 그런 지도 모른다. 어느 선진국에도 없는 비상계엄을 하는 대통령까지 나왔으니... 그런데, 정치적으로 얘기해보면 각국에서 극우들이 득세하는 것은 수치심이 없어지는 현상 아닐까? 20세기초 사진 기술이 처음 나왔을 때, 어느 나라나 관계없이 사진에 우연히 찍힌 보통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어딘가 자신이 없어 보이는 표정이다. 쉽게 부끄러움을 느낄 사람들로 보인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모두들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그것의 긍정적인 부분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주장할 수 있도록 평등해졌고, 자신의 삶을 만족하고 있게 된 거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의 부정적인 모습은 수치심이 없어진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20세기초에 발명된 거대한 담론 또는 이데올로기는 모두에게 강요되어, 질서를 유지했었다. 그것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세계대전을 낳았고, 자기 나라 국민 수백만을 학살하는 공산국가를 낳았다. 질서있는 침묵이 극우 파시스트와 극좌 공산주의를 낳았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세상의 진리는 하나이어야 한다는 믿음에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벌였다. 까뮈의 <전락>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가 전락한 이유는 센강에 뛰어들 거 같이 보이는 여자를 뒤로 하고 걸어간 것 때문이었다. 뫼르소의 살인에는 비교되 안되는 건데... 각자의 생각이 달랐어도, 수치심이 지금보다는 더 강했던 것 같다. 그런데, 거대 담론과 이데올로기는 위험한 것을 알게된 세계는 각자의 생각이 모두 다 옳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되었다. 모두다 발언권을 얻으며, 아무리 얼토당토 않은 얘기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전근대적인 꼰대가 된다. 자극적으로 뻔뻔해야 조회수를 올린다. 어떻게 하면 저자가 말하는 ‘부끄러움을 부끄러워 하지 않기’가 가능할까? 나는 해결책을 모르겠다. 역사의 정반합은 돌이킬 수가 없어서 누구네 집 숟가락의 숫자도 아는 마을 공동체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의 상황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뜨거워지고 있는 지구처럼 모두에게 책임이 있고 모두가 나서야 할 것이다. 비슷한 움직임으로 ESG(Environments, Social, Governance) 지표가 있다. 환경과 사회와 지배구조를 건강하는 기업이 더 지속가능성이 있으므로 더 투자를 받을 수 있게 한다는 취지이다. 바로 수치심의 제도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게 뭐 되겠어’하지말고 ESG 제도의 확대를 응원하자.

한줄기 희망적인 실마리를 MZ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2004년에 우리나라에는 프랑스 대혁명과 비슷한 ‘바트해방전쟁’이 있었다. 리니지2라는 게임에서 10명의 독재자를 수천명의 헐벗은 민중이 힘을 모아 몰아내었다. 모두 정의감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게임을 만드는 회사가 그간의 잘못을 깨닫고 착한 행동을 하자 우쭈쭈해주는 MZ 커뮤니티가 있었다. 게임회사 스마일게이트는 게임 ‘로스트아크’ 고객들과 약속을 착실히 지켰다. 이에 로스트아크 커뮤니티는 개발자들이 다니는 판교역에 응원광고를 실었고, 회사앞에 커피트럭을 보내어 응원하였다. 게임회사의 ‘수치심’을 회복시켜준 사건이었다. 스타크래프트나 오버워치 같이 유명한 게임을 만든 블리자드라는 회사가 있다. 그 회사에서 게임 만들 때 보상시스템을 만드는데 상과 벌중에 상을 더 중요시 한다고 한다. 응원봉 시위도 감격스럽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사는 한 소녀의 실연 극복담인데 시위에서는 신난 리듬으로 희망을 주는 노래가 된다. 북풍한설에 키세스, 커피선결제!! 아직 희망이 있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젊은이들을 응원해주자. 그래서, 수치심이 능력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가도록 도와주자.

이익을 극대화하지 못하면 부끄럽다. 법기술자들은 부당하지만 법적무결하게 이익을 취한다. 수치심이 없는 것은 능력이고, 뻔뻔함은 전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이 한 일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잘잘법>이라는 유튜버 채널의 영상들에서는 기독교 신앙과 일반적인 이성과 철학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무조건 ‘믿슙니다’하는 신앙을 나는 위험하게 생각하고 있다. 일전에 어느 신학교수가 직관없이 이성적인 논리로도 믿음에 이를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을 나는 좋아한다. 따라서, 읽는 글이 성경밖에 없다면 오히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철학을 비롯해서, 소설이나 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의 얘기이며, 그것들이 인간과 인간이 이루고 있는 사회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사고의 틀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오직 ‘믿슙니다’만 하게 되면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에서 벗어나 고립된 섬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나의 건물과 비교할 때, 일반적인 이성과 철학이 성경과 함께 기본적인 뼈대를 형성하며, 그 뼈대가 튼튼해야 제대로 된 건물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은 가슴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팔다리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서 나는 김기석 목사의 설교를 좋아한다. 설교에 일반 소설과 시를 많이 인용하는 김기석 목사가 읽어보라고 두 권의 책을 권했는데, 하나는 이승우의 소설책 <사랑이 한 일>이고 또 하나는 르 클레지오의 책이다. 르 클레지오는 프랑스 작가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생명력이 넘치는 한 소녀의 일생을 그린 <황금 물고기>가 대표작이다.

<사랑이 한 일>은 신앙 서적과 일반 소설의 중간 지점에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묵상하는 과정을 소설집으로 만든 것이다. 몇 천 년전 일어났던 일이 성경에 적혀있다. 대부분 중요한 내용만 간결하게 기술하고 빠르게 얘기가 전개된다. 작가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의 입장에서 여러 갈래로 자세히 상상해본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입장에서 소돔성에 천사가 찾아 온 날을 생각해보는 ‘소돔의 하룻밤,’ 하갈입장에서 이스마엘과 함께 쫒겨난 날에 오고 간 생각을 그린 ‘하갈의 노래,’ 이삭의 입장에서 자신이 제물로 바쳐지는 일을 회상하는 ‘사랑이 한 일,’ 야곱이 속임수로 축복을 받아내간 일을 분석해보는 ‘허기와 탐식,’ 그리고, 야곱이 들판에서 천사를 만난 이야기 ‘야곱의 사다리’가 나온다. 각각이 완결된 단편 소설이지만, 다섯 편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의 장편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돔의 하룻밤’은 하나의 동기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변주곡이 나타나는 흥미로운 형식으로 쓰여있다. 전체 6장으로 구성되는데 각 장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지만 2~4개로 변주된다. 인간의 원죄가 군중심리로 증폭되는 것을 보여준다. 교만해져서 외부의 판단을 무시한다. 군중은 욕망의 기계(또는 노예)가 되어 그들과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할 때 그들은 죄의식이 마비된다. 마비된 죄의식을 생각나게 하는 낯선 사람들을 혐오하는 것이다. 도시와 산에서 산을 택했던 아브라함이 10명의 의인이 있으면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겠냐고 하나님께 물었을 때, 그 10인에 도시를 택했던 롯이 포함되어 있었을까? 운명의 하룻밤의 다음 날 롯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소돔을 빠져나가면서도 도시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않는다. 도시에서는 인간이 욕망의 기계가 되어 가는 것을 깨닫지 못 한다. 그러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고, 두 도시가 유황불로 멸망하자 ‘아주 작은 성‘을 떠나 산으로 숨는다.

’소돔의 하룻밤‘과 ’하갈의 노래‘의 공통점은 무리를 떠난다는 것이다. 롯이 천사의 충고에 의해 무리를 떠나지만, 하갈은 아브라함의 비정한 결정에 따라 무리를 떠난다. 이 이야기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하갈은 사막 한가운데서 쓰러져서 과거를 회상한다. 그녀는 평평한 것을 좋아하지만, 운명은 그녀를 심하게 굴곡진 인생으로 밀어넣었다. 아브라함은 신에 기대어 자신을 변명한다. ‘신이 너를 사랑하는 것을 잊지 마라’라고 했지만, 그의 신을 믿지 않는 그녀와 이스마엘에게는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잊지마라’라는 말이 더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고통을 위장한다. 하갈은 믿지않는 신, 즉, 아브라함의 신은 아버지(아브라함)의 사랑을 아들(이스마엘)에게 보여주는 막는 신이다. 사라의 질투와 그에 따른 아브라함의 비정함을 허용하는 신이다. 그런데, 그 신이 사막 한가운데에서 나타나 삶을 포기하려는 하갈에게 나타난다. 그들에게 우물을 주시고, 이스마엘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너무 많아 셀 수 없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하나님이 돌보신다.

‘사랑이 한 일’은 사랑의 역설에 대한 얘기이다. 이 이야기는 6개의 장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모두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한 것이 이삭이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으므로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반으로 갈라 자신에게 바치라고 한다. 가장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바친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했다. 그 시험은 하나님이 자유로움을 버리고 아브라함의 결정에 종속되는 부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이삭은 어땠을까? 소설에서 이삭은 진작부터 아버지의 고통을 눈치채었지만, 예배를 ‘함께’했다.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마라’로 아버지와 하나님 간의 사랑이 확인된 후,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돌아가고, 이삭은 혼자 그 산에서 밤을 새웠다. 그날 밤 하나님은 많은 얘기를 이삭에게 한다. 이삭은 사색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얘기는 성경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삭은 말로 설명하는 순간 달아나 버리는 진실을 간직한 채 채울 수 없는 허기를 가지게 되었다.

‘허기와 탐식’에서는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된 이삭이 어느 날 맏아들인 에서를 불러 말했다.’로 시작하는 3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야곱, 에서, 리브가의 입장에서 좀더 자세히 들어간다. 왜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 요리를 좋아했을까? 자신이 태어남으로써 버림을 받은 이스마엘에 대한 죄책감때문이라고 한다. 에서의 쌍둥이 형제 야곱이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것에서 기시감을 느껴서 맏아들에 대한 동정이 생겨난다. 이에 더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아브라함이 버린 이스마엘과 버릴 뻔한 자신은 동병상린을 느낀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과의 최고의 사랑을 위해 인간의 법과 도리가 훼손된 경우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이삭은 광야에 사는 이스마엘을 찾아가서 야생고기의 맛을 본 후 야생고기를 탐식하게 되었다. 에서는 이 아버지를 위해 야생 고기를 항상 구해온다. ‘큰아이가 작은아이를 섬길 것이다’라는 눈에 보이지 않은 약속의 세계를 인정은 하지만 이해할 수 없어서 계속 탐식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은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선택을 받은 야곱은 고난의 길로 접어든다. 노숙하는 그에게 ‘야곱의 사다리’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하늘과 닿는다는 면에서 비슷하지만, 아래에서 올라간 바벨탑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었다. 하나님의 진노때문이었는지 인간간에 서로 다른 말을 하면서 불화가 일어났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는 자기보다 자기를 더 잘 아는 하나님이 있으며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 명령하고 약속을 한다. ‘명령은 듣는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고, 약속은 말하는 사람의 자유를 제한한다.’ 하나님은 명령하고 약속함으로써 야곱과 서로 자유를 제한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도 하나님의 사다리는 내려올 수 있다. 야곱은 그 지역의 이름을 배델,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곳이 베델이라면 어느 곳이나 베델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을 택하기만 한다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이 한 일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의 사랑의 역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