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마을 - 신장의 산문
류량청 지음, 조은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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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의 소설 ‘관촌수필’을 생각나게 하는 글이다. 가차타고 가면서 몇 초만에 옆으로 휙 지나가버릴 법한 시골마을에 무슨 사연이 그렇게 많은지 연작으로 여러 권 썼던 것으로 안다. 충청도 마을의 사람 하나하나, 그들간에 오가는 정과 사소한 갈등이 또하나의 우주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용된 단어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고, 나는 사용하는 단어의 수가 문화의 두께를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에 다음부터 농촌의 삶을 존경하기로 했었다. 이문구는 소설가 협회 사무실에서 무급으로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을 맞았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 좋아하는 이문구는 간이 나빠져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 꼭 그 같은 소설이었다.

‘한 사람의 마을’은 농촌에서 나서 농촌에서 20대까지 살았던 작가가 그의 고향을 추억하며 쓴 수필집이다.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지칠 때 두고두고 꺼내보고 싶은 책이다. 황사량은 변화가 없다. ‘황사량에서 서른이 되면 눈을 감고 살 수 있다. 불안하다면 7, 8년쯤 지나서 눈을 떠보면 된다. 무슨 신기한 일이 있을 턱이 없다.’ 그런 황사량이 작가를 통해 상상력과 호기심과 사랑으로 가득찬 세계가 된다. 땅굴집 벽으로 튀어나오는 나무뿌리에게서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해듣는다. 그는 사람을 관찰하고, 가축에게 공감하고, 풀이나 벌레들과 대화를 한다. 가축, 풀, 벌레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한다. ‘햇빛이 나무꼭대기나 지붕을 종종걸음으로 지나간다.’ 아침에 뜬 해가 동쪽으로부터 마을을 찬찬히 홅으며 빛이 퍼져가는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아침 햇살은 잡초를 뽑듯 지표면에서 어둠을 긁어낸다.’ ‘햇살은 나를 환히 비추어 따라다녔다’ 그가 의인화하는 대상은 모든 것이다. 바람, 나무뿌리, 밥짓는 연기, 그것들이 모두 감정과 생각을 가진다. 심지어는 시간마저도... ‘시간은 진즉 이 땅에 실망했다.’ ‘지금은 모든 추위가 나만 상대하고 있다.’

그의 머릿속에 시간과 공간은 무한히 축소되거나 확대된다. 어느 때는 몇 수십년이 파노라마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기도 하고, 짧은 순간이 정지된 듯 길게 서술되기도 하고, 온마을이 통째로 하나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하나의 풀벌레가 전 공간을 차지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사물을 보는 눈이 현미경이 되기도 하고, 망원경이 되기도 한다. 책의 중간까지 독자는 황사량에 푹 빠지게 되고, 책의 후반에서는 그 땅을 떠나 십수년 살다가 다시 돌아와서 쇠락한 그 마을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저자의 허전함과 회한을 같이 공감하게 된다.

번역을 한 조은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다. 섬세한 감성을 놓치지 않고 우리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었는지 신기하다. 나무뿌리를 통해서 마을의 얘기를 듣는 류량청만큼이나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https://blog.naver.com/dougsuh/224010808464  


‘햇빛이 나무꼭대기나 지붕을 종종걸음으로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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