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도 가도 왕십리 - 변두리 사람들의 끈질긴 역사 이야기
김창희 지음 / 푸른역사 / 2025년 9월
평점 :
나는 예수쟁이이다.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다. 잘 났든 못 났든,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더라’한 만물을 사람들보고 다스리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지어 낙원에서 쫓겨난다. 이때 만물도 같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컹퀴를 내는’ 땅으로 된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내려보내어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한다. 이때 세상 만물도 같이 구원을 받길 원하신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 8:19~22”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 개인의 구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개인의 구원과 더불어 가능해지는 만물의 구원에 대해서 잘 생각하지 않는다. 김창희의 <가도가도 왕십리>는 한 지역이 한 사람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김창희는 이를 ‘지역성(placeness)’라고 애둘러 말하지만, 한 국가의 수도에서 시체가 빠져나가고 오물이 빠져나가는 문 근처 지역이 어떻게 ‘새 땅(요한 계시록 21:1, 4)’이 되어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땅은 수백년간 도성에서 나오는 시체와 오물을 받고, 신선한 청무와 배추로 돌려주었다. 왕십리(旺十理)를 한자로 쓰면 가운데에 십자가가 보인다.
김창희는 수십년간 기자로 살아온 대기자이다. 잠시 벌이가 좋았던 어느 시대의 기자는 지하철을 타지 않아서 서민을 모른다는 얘기가 있었다. 김창희는 발로 기사를 쓰는 타입인 거 같다. 이 책을 쓰기 위해 그가 찾아다닌 자료와 그가 인터뷰한 사람과 그가 현장조사를 한 발품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또한 철학과를 졸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답게 그 조각조각들을 굵은 선으로 또는 희미한 선으로 연결하여 ‘구원받은 왕십리’를 우리가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방식을 그는 ‘르포르타주’라고 부른다. ‘날 것 그대로’의 재료를 이용하는 글의 성찬이다. 그러고도 <가도가도 왕십리>라고 한다. 해도해도 더 많은 얘기가 있어 이 책은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하왕십리 696번지의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각 번지번지마다 사연이 있을 것 아닌가?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고, 청계천은 거꾸로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청계천이 한강과 만나는 언저리가 왕십리이다. 이 책에는 13가지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현재부터 과거로 거꾸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현재의 ‘나’로부터 시작해서 점점 사고의 지평을 넓혀가게 하는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같이 작가는 ‘나와 다르지 않는’ 사람의 얘기를 발굴하여, 독자인 ‘나’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자신감을 주려고 한다. 태견의 복원이라는 ‘돈 안되는 짓’을 필생사업으로 하여 결국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이루어낸 신한승의 얘기로 시작한다. 태껸자체가 중류이하 생활인들의 무예이다. 태껸은 빙글빙글 탈춤추듯 움직이고 ‘이크 에크’하면서 치명상을 입히지 않고 상대방이 스스로 굴복하도록 한다. 소설가 김동인과 만담가 장소팔을 연결하는 개념도 재미있다. 김동인은 순구어체로 글을 썼고, 장소팔은 하층민들의 이야기를 만담의 소재로 삼았다. ‘배따라기’ ‘광염소나타’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등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 입말의 한 원형으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김동인은 누구도 지켜보는 사람없이 임종을 맞아 그 시신은 왕십리 밭두렁에 엎어져 있었다고 한다.
펜으로 나라를 지키려한 김봉준과 칼로서 나라를 지키려한 지정천의 임시정부 활동을 읽으면서 해방전후에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의 역사를 다시 새길 수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뚜렷한 답이 없었던 사상적인 갈등속에서 정부로서 품격을 지키면서 외교활동과 자주 독립을 위한 투쟁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낸 이들을 잊지않게 한다. 정식 재판을 못 받고 장폐(매고문에 못이겨 사망)한 카톨릭 순교자들의 시신들과, 임오군란 관련 사형수들의 시신도 광희문을 통해 도성에서부터 버려져서 왕십리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런데, 작가는 그 이야기를 통해 광희문은 결국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음을 독자들이 깨닫게 한다. 죽으면 살리라.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광희문과 왕십리는 아픔을 딛고 우리에게 새희망으로 말을 걸고 있다. 고맙지 아니한가?’ 오랫동안 변두리였으나 이제 5개의 지하철노선이 모이는 왕십리역에서 한번쯤 새겨볼 말이다.
‘하왕십리 696번지’는 우리 동기 이진성의 본적이다. 증조부인 농부 이성문이전 그의 조상이 누구였는지 밝혀진 것은 불과 수십년전이었다. 최초로 카톨릭 영세를 받은 이승훈의 죽음과 노론소론의 피비린내 나는 당쟁 사건과 연결된다. 멸문당한 이진성의 조상은 원래의 성을 버리고 경성 이씨로 살았다. 그리 보면 우리의 배우 이진성이 극단 성북동비둘기 연극 ‘샐러리맨의 죽음’과 ‘알바의 집’에서 ‘나와 다르지 않는’ 사람들의 얘기를 우리들에게 전달하고자 비지같은 땀을 흘린 것도 지극히 왕십리 ‘똥파리’다운 것이었다. 오늘날 세상을 향한 격쟁이다. (격쟁:조선시대 일반 백성이 궁궐 안으로 들어가거나 임금이 행차할 때에 징이나 꽹과리를 치며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는 것)
13개의 얘기중에 작가가 가장 아낀 것은 박지원의 <예덕선생전>일 것이다. 예덕, 더러울 穢, 큰 德, 즉, 더러움에서 덕을 찾는 엄행수의 얘기이다. 창밖 도로에 오물을 바로 투척했다는 프랑스 파리에서는 그래서 하이힐이 발명되었다고 들은 일이 있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화장실이 따로 없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와 다르게 ‘당당한 직업인’ 엄행수는 ‘무상수거 유상처분’의 방식으로 서울의 똥을 처리하였고, 덕분에 똥파리가 윙윙거리게 된 왕십리로부터 서울에 신선한 채소를 공급할 수 있게 하였다. 작가는 그에게서 ‘자유인의 향기’를 느낀다고 했다. 어느 학교 교훈과 교가를 생각나게 한다.
이 책은 성경이 말하는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 ‘나와 다르지 않는’ 사람들의 얘기를 한다. 읽다 보면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은 결국 알아가는 것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나도 진정한 예수쟁이이고 싶어진다.
광희문과 왕십리는 아픔을 딛고 우리에게 새희망으로 말을 걸고 있다. 고맙지 아니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