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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 잃은 사회 - 사회를 지탱하는 도덕의 붕괴와 공동체의 해체
이철우 지음 / 시크릿하우스 / 2025년 8월
평점 :
나는 고백한다.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부끄러운 일을 했다. 그것을 이제는 지우지 못 하니 애써 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새록새록 떠올라서 괴롭다. 내 경우 군대 쫄병때 건빵 훔쳐먹다 나보다 나이 어린 선임에게 욕 먹으며 빠따 맞은 게 그중 하나이다. 대학 졸업하고 가서 남들보다 2년 늦게 갔으니, 선임이 나보다 한두살 어렸었다. 70년대말 대학캠퍼스에서 가방 열어보라는 이에게 누군지도 묻지 않고 바로 열어 보여준 것도 부끄러운 일에 속한다. 건빵 훔쳐먹은 거 보다 나이 어린 선임에게 맞은 게 더 부끄러우니 사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수치심과는 거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가방 열어보여 준 것도 내가 적극적으로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은 아니니 이 책에서의 수치심과는 거리가 있다. 사실 이 책에 나오는 수치심과 관련된 일중에 수영장에서 오줌싼 거 정도외에는 여기 쓸 수 없다. 정말로 부끄러워 여기 쓰지도 못 하는 것이 책 한 권 분량정도 된다.
고등학교때 윤리선생님이 칠판에 동심원 3개를 그리고, 가운데가 법, 그 다음 윤리, 가장 바깥쪽이 관습(?)이라고 하였다. 그 시절부터 한참동안 그 그림이 유효하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 그림이 많이 일그러진다는 것을 느낀다. 관습은 조각조각나고, 윤리는 점점 얇아지고, 법이 커지면서 한쪽으로 삐져나왔는데 오히려 그 부분이 커지면서 전체를 덮으려는... 기묘한 그림이 되는 거 같다. 이 책은 나의 그런 느낌을 아주 구체적으로 아주 종합적으로 잘 정리해놓았다.
책에는 최근 여러 매체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내용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다. 진영논리, 사법엘리뜨, 검찰공화국, 조국 가족, 부정선거 음모, 김건희, 사이코패스, 계엄, 젠더 전쟁, 성공지상주의, 사법카르텔, 전관예우, 광우병 데모, 유상증자, 도덕불감증, 학부모 등쌀, 선민의식, 위선, 익명성, 알고리즘, 확증편향 등등. 이 책은 민영환의 자결 얘기로 시작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서양의 죄책감과 동양의 수치심을 비교하면서 문화권별 차이를 비교하여, 우리 사회의 병폐를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수치심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다는데 수치심이 없어졌다니 이 시대에는 돌연변이가 있어난 것이다. 사회심리학을 전공한 저자는 사회의 구석구석을 돋보기로 관찰하여 증거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각각의 조각조각들을 수사관이 수사하듯 칠판에 여기저기 붙여놓고 그것들을 관통하는 시대적 심리상태를 진단하였다. 결론은 ‘수치심을 잃은 사회’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 상태가 지속되면 사회가 붕괴한다고 경고한다. 사회 붕괴이전에 개인적으로 돌연변이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이익을 극대화하지 못하면 부끄럽다. 법기술자들은 부당하지만 법적무결하게 이익을 취한다. 수치심이 없는 것은 능력이고, 뻔뻔함은 전략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극장에서 앞 사람이 일어나면 가려지니까 뒷 사람도 하나둘 일어나듯이 붕괴되는 쪽으로 진전된다.
진영논리에 대한 실험이 재미있다. 대학생들을 무작위로 편을 나눈 후, ‘수당을 자기편:다른편 = 15$:13$과 7$:1$로 한다면 어느 것을 택할래?’할 때, 대개 후자를 택한다고 한다. 내가 손해보더라도 상대방이 이익보는 꼴을 못 보는 것이다. 나도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진영논리에 대한 부분을 읽고 내가 지지하는 어떤 이의 자세한 판결죄목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나도 확증편향이 있었음을 깨닫고 균형추를 약간 움직였다. 아주 약간...
전에 외국인들과 다니면서 관찰한 건데 빨간불에 차가 없을 때 나라마다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일본과 미국 친구들은 차가 없더라도 빨간불이면 길을 건너지 않았다. 그런데, 유럽 친구들은 차 없으면 바로 건넜다. 한국인들은? 때때로 달랐던 거 같다. 요즘 나는 아파트 근처의 좁은 건널목에서 어린 아이들이 보고 있으면 안 건너고 안보면 건넌다. 수치심이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갑자기 심하게 없어졌을까? 그런 지도 모른다. 어느 선진국에도 없는 비상계엄을 하는 대통령까지 나왔으니... 그런데, 정치적으로 얘기해보면 각국에서 극우들이 득세하는 것은 수치심이 없어지는 현상 아닐까? 20세기초 사진 기술이 처음 나왔을 때, 어느 나라나 관계없이 사진에 우연히 찍힌 보통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어딘가 자신이 없어 보이는 표정이다. 쉽게 부끄러움을 느낄 사람들로 보인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모두들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그것의 긍정적인 부분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주장할 수 있도록 평등해졌고, 자신의 삶을 만족하고 있게 된 거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의 부정적인 모습은 수치심이 없어진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20세기초에 발명된 거대한 담론 또는 이데올로기는 모두에게 강요되어, 질서를 유지했었다. 그것이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세계대전을 낳았고, 자기 나라 국민 수백만을 학살하는 공산국가를 낳았다. 질서있는 침묵이 극우 파시스트와 극좌 공산주의를 낳았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세상의 진리는 하나이어야 한다는 믿음에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벌였다. 까뮈의 <전락>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가 전락한 이유는 센강에 뛰어들 거 같이 보이는 여자를 뒤로 하고 걸어간 것 때문이었다. 뫼르소의 살인에는 비교되 안되는 건데... 각자의 생각이 달랐어도, 수치심이 지금보다는 더 강했던 것 같다. 그런데, 거대 담론과 이데올로기는 위험한 것을 알게된 세계는 각자의 생각이 모두 다 옳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되었다. 모두다 발언권을 얻으며, 아무리 얼토당토 않은 얘기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전근대적인 꼰대가 된다. 자극적으로 뻔뻔해야 조회수를 올린다. 어떻게 하면 저자가 말하는 ‘부끄러움을 부끄러워 하지 않기’가 가능할까? 나는 해결책을 모르겠다. 역사의 정반합은 돌이킬 수가 없어서 누구네 집 숟가락의 숫자도 아는 마을 공동체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의 상황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뜨거워지고 있는 지구처럼 모두에게 책임이 있고 모두가 나서야 할 것이다. 비슷한 움직임으로 ESG(Environments, Social, Governance) 지표가 있다. 환경과 사회와 지배구조를 건강하는 기업이 더 지속가능성이 있으므로 더 투자를 받을 수 있게 한다는 취지이다. 바로 수치심의 제도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게 뭐 되겠어’하지말고 ESG 제도의 확대를 응원하자.
한줄기 희망적인 실마리를 MZ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2004년에 우리나라에는 프랑스 대혁명과 비슷한 ‘바트해방전쟁’이 있었다. 리니지2라는 게임에서 10명의 독재자를 수천명의 헐벗은 민중이 힘을 모아 몰아내었다. 모두 정의감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게임을 만드는 회사가 그간의 잘못을 깨닫고 착한 행동을 하자 우쭈쭈해주는 MZ 커뮤니티가 있었다. 게임회사 스마일게이트는 게임 ‘로스트아크’ 고객들과 약속을 착실히 지켰다. 이에 로스트아크 커뮤니티는 개발자들이 다니는 판교역에 응원광고를 실었고, 회사앞에 커피트럭을 보내어 응원하였다. 게임회사의 ‘수치심’을 회복시켜준 사건이었다. 스타크래프트나 오버워치 같이 유명한 게임을 만든 블리자드라는 회사가 있다. 그 회사에서 게임 만들 때 보상시스템을 만드는데 상과 벌중에 상을 더 중요시 한다고 한다. 응원봉 시위도 감격스럽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사는 한 소녀의 실연 극복담인데 시위에서는 신난 리듬으로 희망을 주는 노래가 된다. 북풍한설에 키세스, 커피선결제!! 아직 희망이 있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젊은이들을 응원해주자. 그래서, 수치심이 능력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가도록 도와주자.
이익을 극대화하지 못하면 부끄럽다. 법기술자들은 부당하지만 법적무결하게 이익을 취한다. 수치심이 없는 것은 능력이고, 뻔뻔함은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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