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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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달 쯤, 오랜만에 들렀던 교보문고엔 한강 작가의 코너가 따로 크게 마련되어 있었다. 국내최초 맨부커상 후보! 라는 커다란 팻말도 보였다. 곧 발표가 나겠지만, 수상을 하든 하지 못하든 간에 무척 굉장한 일임에는 틀림 없는 듯 하다. 가끔 외국 서점에서 한국 작가들의 책을 찾으면 무척 반갑다. 요즘처럼 국경이 희미해진 세상에 외국인에게 싸이 알아? 김치 알아? 하는 것만큼 촌스러운 일인지도 모르지만, 호기심이 드는걸 어찌할 수 없다. 이방인이 보는 우리나라의 소설들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우리나라 소설을 좋아하는 것의 8할은 문장 때문인데, 알파벳으로 환원되어진 말들이 한글이 가진 고유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가지고 갈 수 있을까. 한글이 어떤 언어보다 완벽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한글만이 가지는 어떤 특이한 한계성이 어쩌면 언어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면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언어를 새롭게, 그리고 조화롭게 배열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 그런 일들은 대체로 배열을 담당하는 작가와, 그 배열의 의미를 해독하는 독자 사이에 세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의 이해를 필요로 하는데, 국경을 넘어서서 글자와 어순이 새로이 변형되는 순간, 많은 부분이 어그러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외국의 독자들이 내가 느끼는만큼의 충분한 감동을 느낄 수가 있을까 의심스러운 것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그런 번역에서 오는, 그리고 전혀 다른 문화에서 오는 이질감들은, 같은 문화권 출신이라면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감정을 전해주기도 한다. 사진을 찍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낯설게 하기'인데, 문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낯선 것들은 신선함으로 승화되어 이제껏 알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게 하니까. 이해가 되지 않으면 되지 않는대로, 오해라면 오해하는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어차피 인간은 타인을 전혀, 라고 해도 좋을만큼 알지 못한다. 문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어느 문화권이냐에 따라 독자로서 받게되는 감정의 낙차 마저도 독서의 한 부분(재미?)이 아닐까 싶다.


한강 작가라면 소설 『소년이 온다』로 유명하지만, 표지부터 너무나 예쁜 그 책을 나는 펼쳐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변명을 할 것도 없이 용기가 없고 비겁하기 때문인 것을 안다. 그치만... 그 책을 볼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는다. 역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 나에겐 아직 버겁다.

『소년이 온다』가 베스트셀러로 온 서점의 매대를 채우고 있었을 무렵,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내려놓고 말았다. 그리고 그 책 대신 읽었던 것이 『그대의 차가운 손』이었다. 그게 벌써 한참 전인데, 나는 그 책을 읽고 어떻게 된게 아무런 감상도 쓸 수가 없었다. 이 조용한듯 음울하다, 결국엔 폭주하고 마는 이야기를 읽고 나는 무엇을 느꼈던가...


이번에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많은 부분 『그대의 차가운 손』이 떠올랐다. 예술과 욕망을 한데 섞어버리는 것도 그렇고. 소란스럽지 않고 차분히 이야기를 끌고가는 톤도 그렇고, 그런 조용한 힘으로 인물들을, 사건들을 끝간데까지 밀어부치는 것도 비슷하다. 먹지 않는 사람과 너무 많이 먹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대비된다. 두 책을 굳이 비교하자면, 『채식주의자』의 국경이 훨씬 희미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결과주의 같아서 우습지만, 한마디로 한국인이 아니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그에 비해 『그대의 차가운 손』은 등장인물의 어린 시절 모습을 그리는 정서가 무척 한국적이다. 나는 그 눈에 그려지는 듯한 시골의 정경과 그 곳에 배어있는 절망감들이 마음이 아릴 정도로 참 좋았다. 


『채식주의자』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주부였던 영혜가 어떤 계기(꿈)로 인해 인간(동물)의 폭력성에 질려버렸다는 듯, 육류를 모조리 끊고 채식만 하다가, 결국은 물과 햇빛만으로 사는 식물이 되고자 한다. 『채식주의자』는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어떤 트라우마가 점점 인간을 잠식해가며,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세편의 중편 소설이 연작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하나의 사건을 세 명의 시선으로 약간의 시차를 두고 바라보는데, 행위의 중심에 있는 영혜는 세 가지 이야기에서 똑같이 관찰되어지는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영혜의 변화를 발견하는 남편, 그 변화를 이용하는 형부, 변화의 결과로 결국 소멸하는 영혜를 바라보는 언니.


조용조용 가만가만 섬세하게 한문장씩 앞으로 가는 듯한 작가의 글들을 읽으면, 숲 속 호숫가를 산책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언뜻 호젓하고 고요한 풍경 가운데, 그 심연을 헤아릴 수 없는 짙은 초록빛이 있다. 어느샌가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돌이 표면에 작은 파장을 만드는데, 그 파장이 잔잔했던 호수에 점점 더 격렬한 파도를 만들어 결국 걷고 있던 날 삼키고 마는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작가의 조용한 속삭임에 나는 홀려 버린 것 같다.

 

 

 



 저 여자가 왜 우는지 나는 몰라. 왜 내 얼굴을 삼킬 듯이 들여다보는지도 몰라. 왜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의 붕대를 쓰다듬는지도 몰라.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p.60-61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 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꿇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 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 모습을. 결국 산 반대편 길로 내려가 집이 있는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타고 그들은 저물녘의 낯선 길을 달렸다. 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저녁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p.191-192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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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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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듣는 팟캐스트 빨간책방에 숏컷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코너가 생겼다. 신진 작가들이 게스트로 나와서 자신의 소설을 직접 낭독하고 인터뷰도 하는데, 처음 들었을 땐 그저 재밌네, 하고 흘려 듣다가 점점 빠져들고 말았다. 손보미, 김엄지, 이상우 등등.. 말이 신진 작가지, 면면이 화려한 캐스팅이다. 그러나 이름은 많이 들어봤어도 막상 읽어본 작가는 없었다. 독서라는게 은근히 시간과 공을 잡아먹는 일이다보니 잘 알지 못하는 작가의 책에는 사실 손이 잘 가지 않았다. 휘리릭 훑어만 보고도 이거다, 고를 수 있는 내공도 없고. 결국 아는 작가의 책만을 주로 읽곤 했었는데, 이 코너를 통해 새롭고 재밌는 작가들을 알게 된 것이 큰 기쁨이다. 그들이 직접 낭독해주는 글들을 들으면서 아, 이 사람 이야기는 꼭 읽어보고 싶다, 하고 귀기울이게 되는 순간이 좋다. 딱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이 김금희 작가였다. 낭독해주었던 글은 어떤 아버지에 관한 것이었던 것 같고, (아마도 시간과 장소가 잘 맞아떨어진 것도 있겠으나) 작가의 인터뷰를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곧바로 작가의 책을 사러 근처 서점으로 갔다. 책 제목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지만 어쩐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꽂혀있는 책등을 꼼꼼히 살폈다. 초중고 수험서에 좀더 치우쳐있는 동네 서점이라 그런지 문학 팻말이 붙은 책장이 그리 많지는 않았고 그 책장들을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그리고 지그재그로까지 훑어내린 후, 이 곳엔 김금희 작가의 책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시무룩하게 돌아서려던 찰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각종 수상작품집들을 열어봤는데 한군데, 2016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에서 후보작으로 올라있는 작가의 이름을 드디어 찾을 수 있었다. <보통의 시절>, 김금희. 줄거리는 편한 사람 하나 없이 각자 몫의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네 남매의 소극같은 하루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의 문장들엔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자조와, 그대로를 안아주는 따뜻함이 유머로써 배어있었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에는 정겨울 정도의 부산스러움과 은근히 정곡을 찌르는 예리함이 활기찬 리듬을 만들어 주었다. 아, 또 읽고 싶다, 해서 그제서야 알라딘에서 작가의 이름을 치고 구입한 책이 2016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다. 이번엔 후보가 아닌 수상자로써 첫 번에 실린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읽고 나는 다짐했다. 김금희 작가의 책을 모두 사서 봐야겠다, 앞으로 나오는 책들도 모두 봐야겠다,고. 이런 연애소설이라니. 너무 멋지고 예쁘다. 애절하게 울고 짜고 하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허무가, 가짜가, 껍데기가 가득한 세상에서의 사랑. 너무 쉽고 가벼운 현대 시대의 대명사였던(그래서 어른들의 마른 걱정을 샀던) 패스트 푸드 같은 것에도 꾸역꾸역 추억은 쌓이고 사랑은 여전히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 피시버거는 그렇게 사라졌지만,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고요."



같이 실려있는 다른 작가의 작품들도 정말 좋다. 하나하나 다 좋다. 이제까지 읽어보지 못한 종류의 것들을 읽는 느낌이 마치, 여러 국적의 맛좋은 요리를 한번에 먹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다. 한 작가의 단편집이 아니라 여러 작가의 단편을 같이 보는 것은 이런 매력이 있구나, 싶고 이상문학상이나 현대문학상 수상집과는 조금 다른, 젊은 작가들의 신선하고 재기발랄한 톤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다음 맛은 뭘까, 기대하면서 책장을 넘기는 기쁨이 있었다. 이런 글을 쓰는 작가들이라니, 나는 절대로 소설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낭패감도 들었고, 그저 읽고 기뻐하기에도 벅찬 나같은 무지렁이 독자와는 다르게, 같은 이야기를 읽고 세밀하게 그들의 세계를 파헤치는 평론가들의 해석에도 주눅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당분간은 계속해서 읽는 즐거움에 빠져 있고 싶어서 일기장에 정용준, 장강명, 오한기의 이름을 적어 놓는다.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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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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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덮은 오늘이 20대 총선이라는 사실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공산당이 싫어요' 세대인 나에게, 공산주의를 진리라 추앙하는 『농담』속 배경은 무척이나 생소한 것이었다. 나에게 공산주의라 함은, 현재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이나, 페이스북 홈페이지에 접속할 수 없다는 중국내의 지나친 검열 같은 것일 뿐이다.


한 때, 그것이 유일한 진리라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농담』은 그 때의 이야기다.

어떤 사상도 완벽하지 않고 각자의 장단이 있겠으나 작가가 주시하고 있는 공산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사상을 구현함에 불가피하게 따라올 수 밖에 없는 집단주의와 몰개성화의 측면이다. 회의와 다수결을 통해 정해지는 결정들이 얼핏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시선이 그들을 만장일치로 유도한다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개인의 사생활이 결국 공적인 것과 다르지 않기를 기대하는 사회. 그 사회에서는 농담이 통하지 않는다.


재밌는 것은 그런 그들의 집단 의식이 얼핏 조금더 엄격한 모습의 종교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구성원을 하나의 진리에 동의시킨 채, 의심하지 않기를 기대한다는 점이 그렇다. 두 사회에서 모두 의심은 곧 죄가 되어 심판을 받고 죄인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 마땅하므로, 루드비크를 그들의 세계에서 추방한 것은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그가 홧김에 써갈긴 조소섞인 농담은, 역사의 사명감으로 들끓던 이들에겐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신실한 교인이라면, 믿음을 가지고 농담따위 하지않는 법이다.


지나친 농담을 내뱉기 전까지 사상이 굳건하고 신실한 공산당원이었던 루드비크는 그 일을 계기로 자신이 따르던 세계에서 축출된 후 오랜기간 몰락의 삶을 살았다. 그 후 다시 사회에 복귀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이 어느정도 성공에 이른 어느 오랜 훗날, 그는 자신의 억울한 과거에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인생이야말로 굴곡진 농담과 설명되어지지 않는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루드비크의 여자들인 루치에와 헬레나에 대한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다. 그의 곁에 현존하는 헬레나는 스스로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는데, 그녀야말로 삶이 보내는 그악스러운 농담의 가장 큰 피해자로 보인다. 오직 사랑만을 좇다가 실패한 후,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삶을 포기하기 위해 집어삼킨 알약이 변비약이었다니, 이만하면 농담도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비참하고 슬픈 여자다. 반면에 루드비크에게 어떤 하나의 관념으로 남은 루치에는 이 소설 안에서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이 주위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그녀 역시 비참하고 슬픈 삶을 살고 있지만, 루드비크에게 명확하게 해석되지 않은 채 남았기에 적어도 그에겐 대상화된 채, 그대로의 아름다움으로 남았다.


겹쳐지거나 스쳐가는 사건들을 네 명의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교차해서 보여주는 부분이 많은데,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경험하면서도 전혀 다른 해석으로 각자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재미있다. 본인이 처한 상황과 가치관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동일한 사건을 조금씩 다르게 바라본다. 가까이 있어도 이토록 먼 타인과 나인데, 대의를 따른다는 명목하에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게끔 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인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한때는 세계의 전부였던 가치들이 시간 앞에서 점점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밀려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인간에게 절대적인 가치나 기준은 존재하지 않고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반대로 생각하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어떤 하나의 사상에 절대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소용없는 짓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하지만 그 신념이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야 루드비크는 과거와 화해하고, 새로이 다가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읽으면서 내가 책에 압도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워낙에 읽는 이를 KO시키는 작가지만, 첫 소설다운 기세가 느껴지는 듯 하다. 푹 빠져들어 읽게 된다.


베끼고 싶은 구절이 너무 많다.



 나는 마르케타에게 동의하지 않았고, 도움을 거절했고, 그리고 그녀를 잃었다. 그러나 그렇게 확실히 나는 정말 결백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나는 분명 계속해서 이 사건이 전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굳게 믿으려 했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엽서의 그 세 문장을 내 심문자들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 문장들은 내게 공포의 주제가 되었다. 허풍기 서린 가면을 쓰고 있으나 그 문장들은 어쩌면 정말로 대단히 심각한 어떤 것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결코 당 내부와 일체가 되어 섞인 적이 없다거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단지 단순한 결정에 따라 '혁명가들에게 다가간' 것이라는 사실 등을 말이다. (혁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말하자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로 느껴졌다. 혁명가다 하면 혁명 운동과 일체가 되는 것이며, 또 하나는 혁명가가 아닌 경우로 다만 혁명가이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끊임없이 자신이 혁명과 일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죄의식을 느낀다.)

 지금 그때의 내 상황을 생각해 보면 신도들에게 근원적이고도 영원한 죄인임을 상기시키는 기독교의 저 막강한 힘과 비슷한 데가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바로 그런 식으로 나는(우리 모두가 그랬다.) 혁명과 당 앞에서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래서 장난으로 썼다 해서 내 엽서가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길들게 되었으며, 머릿속에서 자아 비판의 검토가 시작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 세 문장은 그저 우연히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이 아니다. 이미 예전에 동지들은 내게 '개인주의의 잔재'를 비난하곤 했다.(그들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내 지식, 대학생이라는 신분, 지식인으로서의 내 미래에 자만하여 내가 너무 오만해졌다는 생각, 전쟁 중에 수용소에서 돌아가신 노동자였던 내 아버지도 나의 냉소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의 노동자 정신이 내게서 고갈되어 버렸다는 데 대해 탄식하며 자책했다. 나는 여러 가지 잘못을 스스로 비난하다가 결국 벌을 받아야 한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러한 내 노력들은 오로지 단 하나, 당에서 축출되어 당의 '적'이라 낙인 찍히지 않는 것만을 향한 것이었다. 내가 십 대에 이미 선택했던 것,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 그것의 적으로 공인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절망적으로 보였다.

p.81-82


 모두 끝났다. 공부, 운동에 동참하는 것, 일, 우정, 모두. 사랑도, 사랑을 찾아헤매는 것도 끝이었고 한마디로 의미 있는 인생의 행로 전체가 끝난 것이었다. 내게 남은 것은 시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 그것을 나는 이전의 그 어느 때부다 더 내밀하게 알아 가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알았던 시간, 일로 사랑으로 온갖 노력들로 탈바꿈된 그런 시간, 내가 하는 일들 뒤에 살그머니 숨은 채 얌전히 있어서 그저 무심코 받아들였던 그런 시간이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옷을 다 벗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자신의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게 만들어(이제 나는 순수한 시간 순수하게 텅 빈 시간을 살고 있었으므로) 내가 단 한순간도 그것을 망각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 무게를 느끼도록 하고 있었다.

p.93-94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말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도 모두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반면에 가장 드문 것이기도 하다. 그러자면 자신 속에 형성되어 있는 정신적 태도라든가 꾸며낸 행동과 몸짓들을 버리고 아주 단순하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내가 (단번에, 준비도 없이)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수많은 가짜 얼굴들 뒤에서 눈먼 사람처럼 늘 길을 더듬던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것은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 기적 같은 해방으로 느껴졌다.

p.111


 그러고 나서 문이 닫혔다. 우리 둘뿐이었다. 블라스타는 스무 살이었고 내 나이도 그리 더 많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가 이제 막 문턱을 넘어섰고 이 마술적인 순간부터 그녀의 매력은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듯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리라 생각하였다. 그녀에게서는 곧 떨어질 나뭇잎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나뭇잎의 추락은 시작되었다. 나는 그녀가 이제 단지 한 송이 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며, 지금 이 순간에 벌써 앞으로 도래할 열매의 순간이 그녀 속에 현전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 속에서 나는 어떤 준엄한 질서 속으로 합류해 들어가고 거기에 동의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때는 알지도 못했던 내 아들, 어떤 모습인지 예감할 수조차 없었던 블라디미르를 생각하고 있었다.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를 통해서 먼 그의 후손들을 보고 있었다. 마침내 블라스타와 함께 침대 깊숙이 몸을 누이며 나는 인류의 저 지혜로운 영원성이 그 포근한 품에 우리를 품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p.254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p.493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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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아말리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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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외도를 목격하고 울음을 터뜨리던 마흔 일곱살의 여자 안은 그 일을 계기로 신변을 모조리 정리하고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몰래 집을 팔고 그의 짐들은 상자에 담아 사무실로 부쳐 버린다. 음악가인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피아노 세 대를 파는 것을 끝으로 16년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그녀는 집을 떠나 유럽 곳곳으로 이동하며 여행 아닌 여행을 한다. 마치 곤충이 탈피를 하듯이, 도시를 떠날 때마다 그 곳에서 입고 썼던 물건도 같이 버린다. 그렇게 의식처럼 몇 번의 이동과 변화를 반복하던 그녀는, 나폴리 근처 이스키아 섬에서 빌라 아말리아를 발견하고 첫눈에 반해 그 곳에 오랫동안 머무르게 된다. 바다와 하늘이 가득 펼쳐져 있는 곳에서 그녀는 행복을 느끼게 되고, 오랫동안 손에서 놓았던 작곡도 다시 시작하면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한동안 유행했었던 <Eat, Pray, Love>가 생각나기도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소설 안에 삶에 대한 예찬은 없다. 오히려 삶이란 죽음과 손을 맞잡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듯, 이미 죽은, 죽어가는, 결국 죽게 되는 사람들의 연속이 있다. 여러가지 형태의 죽음이 안의 인생을 통과해간다. 아름다운 빌라 아말리아를 결국 떠나게 되는 계기도 죽음에 있고, 그 끊임없는 고통과 슬픔을 음악으로 치환하며 그녀는 음악가로서 나름의 성공을 거둔다.


새로운 삶은 그녀에게 작곡가로서의 자아를 찾아준다는 면에선 긍정적일 수 있으나, 사실 어떤것이 옳은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어떤 삶에서든 고통은 비슷한 정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안의 어머니가 평생을 기다렸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던 남편, 그러니까 안의 아버지와 그녀가 어머니의 죽음 후 40년 만에 만나는 장면에서 나는 그렇게 느꼈다. 아버지가 아무리 딸의 음악적 재능을 자랑스러워하고 추켜세워도, 아버지에게 받은 그녀의 상처와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니까..


소설의 시점이 꽤나 특이하다. 시종일관 3인칭 같았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 '내'가 등장해 안과 마주친다.


파스칼 키냐르 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는데 밀란 쿤데라가 연상되기도 하고 묘사하고 서술하는 문장들이 굉장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돈많은 예술가의 삶에 대한 투정 같아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탈리아에, 이스키아섬에 가고 싶어졌다.

"엄마, 택시를 불러야겠어요."

 " 날 안아주렴!"

 안은 일어났고, 가서 엄마와 포옹했다.

 늙은 여자에게는 역겨운, 과도한, 악취가 풍기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지극한 애정이 있는 법이다. 노파가 끌어안으면, 포옹 자체가 우리를 아프게 한다. 노인의 뼈가, 가벼운이 얇음이, 덥수룩한 머리칼이, 머리핀이, 브로치가, 팔찌가 우리를 찌르므로.

 "네가 간다니 난 목록이나 작성하련다."

 안은 커피 잔을 찻잔에 내려놓고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관절염으로 굵어지고 변형되고, 인접한 바닷바람에 끊임없이 부식된 손가락으로 빅Bic 볼펜을 꼭 쥐고서 장볼 것들을 적느라 열심이었다. 가사 도우미에게 건네줄 목록이었다. 이델스텐 부인은 입술을 오므렸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공들여 글씨를 써내려갔다. 당근, 풀상추. 글자를 똑바로 쓰기 위해서였다.

p.58

 

 만일 운명이라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장소에서 생겨난 충동이라면, 그래서 한 존재를 사로잡고, 그 존재가 충동의 본성을 한순간도 깨닫지 못하면서  그것을 따르게 되는 것이라면, 그녀에겐 운명이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자각한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나는 결연히 그곳으로 달려간다. 어떤 것이 내게 결여된 그곳에서 내가 헤매고 싶어지리라는 느낌이 든다."

p.123

 

 다음은 안 이덴의 말이었다.

 "바닷물 속에서 퍼지는 빛이 있답니다. 심연 한가운데서 솟구치는 것 같은 섬광. 절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육체 아래, 해초 밑, 이스키아의 암석 그늘에서만 희롱하는 빛. 이 빛은 어쩌면 화산의 기원에 속한 것 같아요. 정말로 태양에서 비롯된 게 아닌 듯한 빛이 여기서 헤엄치는 육체를 어루만지거든요."

 해수욕 시간이 되면, 그녀는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수영복 위에 호텔의 하얀 면 가운을 걸치고, 호텔의 하얀 플라스틱 샌들에 발을 밀어 넣었다.

 자신의 방 테라스 바로 빝의 암석들을 지나갔다.

 오솔길은 없었다.

 플라스틱 재질의 작은 샌들이 떨어진 솔잎들 위에서 미끄러졌다.

 그녀는 호텔 가운을 그곳에 세워진 아무 쓸모없는 쇠 난간에 걸쳐놓고서 바다로 들어갔다.

p.133-134 

 

"이따금, 곡의 어느 한순간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강렬한 아름다움에 고통이 섞여들었죠.

  나는 더이상 옴짝달싹 못했고, 내 삶은 멈췄어요.

  어린애는 아름다움을 만나면 우선 몸이 마비돼요. 아연실색한거죠. 그 안에서 죽어가는 거에요."

p.195

 

안 이덴의 말이다.

 "음악은 악기의 도움 없이 내 안에서 만들어져요. 고개를 똑바로 들고, 거의 일어난 자세로, 앞으로 내민 입안에서, 상체의 모든 공간에서 말이죠. 음악도, 오르가슴과 마찬가지로, 머리 바로 위에서 생겨나는 거예요. 악기 앞에서, 악기의 도움으로, 악기를 위해 작곡된 곡은 하나같이 악기가 낼 수 있는 소리를 따르고, 악기로 향하게 되는 탓에 더 이상 음악이 아니에요. 몸은 버림을 받은 거죠. 그것은 악기가 거둔 성과에 불과해요. 모근 악기는 길을 잃고 헤매요. 심지어 목소리도 그래요. 목소리라고 여겨지는 목소리, 노래되는 아리아로 발현되는 목소리조차, 우리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며, 길을 잃고 헤매는걸요."

p.315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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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평범한 일상과 밀착되어 있는 이야기들은 읽는이에게 어떤 감정도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젖는지 모르는채 스며드는 인간의 위선과 위악의 자국들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되어 자꾸만 들여다보게 할 뿐이다. 크고 작은 부조리가 쓴웃음이 나는 농담처럼 여기저기 심겨져 있고, 작가는 그 허위의 그림자를 섬세하고도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욕망과 좌절이 번갈아 삶에 들이치는 험난한 여정 속에서, 작가는 그러나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선량한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어린 소녀에서 젊은 나이의 여성으로 내가 지나온 나이를 갖고 있어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다. 물론 아주 굉장한 나이먹은 여자들도 등장하지만 일단 이야기를  이끄는 사람들은 모두 어리거나 젊은 편이다. 이 책이 첫 출간되었을 때의 작가 나이가 30대였던걸 생각하면 연결이 되는 부분이다. 주인공들의 무대 배경은 별다를 것 없는 일상 속인데, 그 일상들이 현재 내가 인식하고 있는 북미권의 생활방식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이질감이 흥미롭다.


김애란의 『비행운』이 떠오른 것은, 아마도 이 소설집에서 시대감이 상당히 또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비행운』속 단편들이 2000년대를 20대로 살아간 여자라면 겪어봤거나 들어봤거나, 꾸며낸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있었을 법한 이야기들이어서 무척 공감하면서, 또 감탄하면서 읽었었다. 이를테면 시간이 많이 흘러 후세 사람들이 2000년대 20대로 살던 여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해할 때 내밀면 딱 좋겠다 싶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았었다, 하면서.


마찬가지로 4-50년대 캐나다 사람(특히 여자)들은 어떻게 살아을까, 궁금하다면 이 책을 보면 될 듯하다. 폭풍이 몰아치는 로맨스나 위기의 고비를 넘고 또 넘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매일매일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엿보고 싶다면. 그때도 어쩌면 지금과 똑같이 비겁한 사랑과 작은 배신들이 넘쳐났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에게서 받게 되는 알 수 없는 감동은 뭘까. 아마도 이 모든 위선과 위악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저 밑바닥에 고이 지닌 단 한 톨의 선량함에의 희망 때문 아닐까....


가장 좋았던 단편들은 <태워줘서 고마워> <붉은 드레스-1946> <그림엽서> <주일오후> 인데, 모두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나이를 가진 여자들이 겪는 어떤 처절한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좀 다른 내용 중 좋은 것으로는 표제와 동명의 단편 <행복한 그림자의 춤> 그리고 <나비의 나날> 두 가지인데 이 두 편은 인간이 가진 위선에 대한  짜릿한 통찰이 있어 아주 재밌게 읽었다.

 

 그 뒤  몸에 찾아드는 나른함과 한기, 그리고 분리.

 서로 떨어져 무지근한 몸으로 각자 덤불을 털어내고 매무새를 가다듬고, 헛간을 나와 달은 졌으되 그루터기만 남은 평평한 밭들도 미루나무들도 별들도 변함없이 그대로 있음을 발견하고 그 무모한 여정을 끝낸 다음 한기에 오슬오슬 떨던 우리도 여전히 그대로라는 걸 발견하고, 차로 돌아가 두 사람이 널브러져 자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트리스테(쓸쓸함)이다. 트리스테 에스트.(쓸쓸해지는 것이다.)

 그 무모한 여정. 처음이라서였을까?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올라서였을까? 아니다. 그건 로이스 때문이었다. 사랑을 할 때 어떤 사람은 조금만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꽤 멀리까지 가서 신비주의자처럼 아주 많은 것을 내던지기도 한다. 그 사랑의 신비주의자, 로이스가 이제 꼬깃꼬깃 구겨지고 추운 모습으로 완전히 자기 안에 갇힌 사람처럼 자동차 좌석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내가 로이스에게 하고 싶었던 모든 말들이 머릿속에섬만 요란하게 헛돌고 있었다. 널 보러 또 올게, 기억해, 사랑해 이런 말들을 나는 하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 놓인 공간을 절반조차도 제대로 건너지르지 못할 것 같았으므로, 다음번 나무 앞에서, 다음번 전신주 아에서는 말하리라 나는  마음먹었다. 그러나 번번이 못했다. 다만 도시에 더 빨리 닿도록 속력을 높여 무섭도록 빨리 차를 몰았을 뿐이다.

 

p.158-159, <태워줘서 고마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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