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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덮은 오늘이 20대 총선이라는 사실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공산당이 싫어요' 세대인 나에게, 공산주의를 진리라 추앙하는 『농담』속 배경은 무척이나 생소한 것이었다. 나에게 공산주의라 함은, 현재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이나, 페이스북 홈페이지에 접속할 수 없다는 중국내의 지나친 검열 같은 것일 뿐이다.
한 때, 그것이 유일한 진리라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농담』은 그 때의 이야기다.
어떤 사상도 완벽하지 않고 각자의 장단이 있겠으나 작가가 주시하고 있는 공산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사상을 구현함에 불가피하게 따라올 수 밖에 없는 집단주의와 몰개성화의 측면이다. 회의와 다수결을 통해 정해지는 결정들이 얼핏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시선이 그들을 만장일치로 유도한다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개인의 사생활이 결국 공적인 것과 다르지 않기를 기대하는 사회. 그 사회에서는 농담이 통하지 않는다.
재밌는 것은 그런 그들의 집단 의식이 얼핏 조금더 엄격한 모습의 종교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구성원을 하나의 진리에 동의시킨 채, 의심하지 않기를 기대한다는 점이 그렇다. 두 사회에서 모두 의심은 곧 죄가 되어 심판을 받고 죄인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 마땅하므로, 루드비크를 그들의 세계에서 추방한 것은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그가 홧김에 써갈긴 조소섞인 농담은, 역사의 사명감으로 들끓던 이들에겐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신실한 교인이라면, 믿음을 가지고 농담따위 하지않는 법이다.
지나친 농담을 내뱉기 전까지 사상이 굳건하고 신실한 공산당원이었던 루드비크는 그 일을 계기로 자신이 따르던 세계에서 축출된 후 오랜기간 몰락의 삶을 살았다. 그 후 다시 사회에 복귀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이 어느정도 성공에 이른 어느 오랜 훗날, 그는 자신의 억울한 과거에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인생이야말로 굴곡진 농담과 설명되어지지 않는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루드비크의 여자들인 루치에와 헬레나에 대한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다. 그의 곁에 현존하는 헬레나는 스스로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는데, 그녀야말로 삶이 보내는 그악스러운 농담의 가장 큰 피해자로 보인다. 오직 사랑만을 좇다가 실패한 후,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삶을 포기하기 위해 집어삼킨 알약이 변비약이었다니, 이만하면 농담도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비참하고 슬픈 여자다. 반면에 루드비크에게 어떤 하나의 관념으로 남은 루치에는 이 소설 안에서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이 주위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그녀 역시 비참하고 슬픈 삶을 살고 있지만, 루드비크에게 명확하게 해석되지 않은 채 남았기에 적어도 그에겐 대상화된 채, 그대로의 아름다움으로 남았다.
겹쳐지거나 스쳐가는 사건들을 네 명의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교차해서 보여주는 부분이 많은데,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경험하면서도 전혀 다른 해석으로 각자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재미있다. 본인이 처한 상황과 가치관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동일한 사건을 조금씩 다르게 바라본다. 가까이 있어도 이토록 먼 타인과 나인데, 대의를 따른다는 명목하에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게끔 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인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한때는 세계의 전부였던 가치들이 시간 앞에서 점점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밀려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인간에게 절대적인 가치나 기준은 존재하지 않고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반대로 생각하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어떤 하나의 사상에 절대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소용없는 짓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하지만 그 신념이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야 루드비크는 과거와 화해하고, 새로이 다가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읽으면서 내가 책에 압도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워낙에 읽는 이를 KO시키는 작가지만, 첫 소설다운 기세가 느껴지는 듯 하다. 푹 빠져들어 읽게 된다.
베끼고 싶은 구절이 너무 많다.
나는 마르케타에게 동의하지 않았고, 도움을 거절했고, 그리고 그녀를 잃었다. 그러나 그렇게 확실히 나는 정말 결백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나는 분명 계속해서 이 사건이 전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굳게 믿으려 했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엽서의 그 세 문장을 내 심문자들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 문장들은 내게 공포의 주제가 되었다. 허풍기 서린 가면을 쓰고 있으나 그 문장들은 어쩌면 정말로 대단히 심각한 어떤 것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결코 당 내부와 일체가 되어 섞인 적이 없다거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단지 단순한 결정에 따라 '혁명가들에게 다가간' 것이라는 사실 등을 말이다. (혁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말하자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로 느껴졌다. 혁명가다 하면 혁명 운동과 일체가 되는 것이며, 또 하나는 혁명가가 아닌 경우로 다만 혁명가이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끊임없이 자신이 혁명과 일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죄의식을 느낀다.)
지금 그때의 내 상황을 생각해 보면 신도들에게 근원적이고도 영원한 죄인임을 상기시키는 기독교의 저 막강한 힘과 비슷한 데가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바로 그런 식으로 나는(우리 모두가 그랬다.) 혁명과 당 앞에서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래서 장난으로 썼다 해서 내 엽서가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길들게 되었으며, 머릿속에서 자아 비판의 검토가 시작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 세 문장은 그저 우연히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이 아니다. 이미 예전에 동지들은 내게 '개인주의의 잔재'를 비난하곤 했다.(그들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내 지식, 대학생이라는 신분, 지식인으로서의 내 미래에 자만하여 내가 너무 오만해졌다는 생각, 전쟁 중에 수용소에서 돌아가신 노동자였던 내 아버지도 나의 냉소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의 노동자 정신이 내게서 고갈되어 버렸다는 데 대해 탄식하며 자책했다. 나는 여러 가지 잘못을 스스로 비난하다가 결국 벌을 받아야 한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러한 내 노력들은 오로지 단 하나, 당에서 축출되어 당의 '적'이라 낙인 찍히지 않는 것만을 향한 것이었다. 내가 십 대에 이미 선택했던 것,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 그것의 적으로 공인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절망적으로 보였다.
p.81-82
모두 끝났다. 공부, 운동에 동참하는 것, 일, 우정, 모두. 사랑도, 사랑을 찾아헤매는 것도 끝이었고 한마디로 의미 있는 인생의 행로 전체가 끝난 것이었다. 내게 남은 것은 시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 그것을 나는 이전의 그 어느 때부다 더 내밀하게 알아 가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알았던 시간, 일로 사랑으로 온갖 노력들로 탈바꿈된 그런 시간, 내가 하는 일들 뒤에 살그머니 숨은 채 얌전히 있어서 그저 무심코 받아들였던 그런 시간이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옷을 다 벗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자신의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게 만들어(이제 나는 순수한 시간 순수하게 텅 빈 시간을 살고 있었으므로) 내가 단 한순간도 그것을 망각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 무게를 느끼도록 하고 있었다.
p.93-94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말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도 모두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반면에 가장 드문 것이기도 하다. 그러자면 자신 속에 형성되어 있는 정신적 태도라든가 꾸며낸 행동과 몸짓들을 버리고 아주 단순하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내가 (단번에, 준비도 없이)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수많은 가짜 얼굴들 뒤에서 눈먼 사람처럼 늘 길을 더듬던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것은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 기적 같은 해방으로 느껴졌다.
p.111
그러고 나서 문이 닫혔다. 우리 둘뿐이었다. 블라스타는 스무 살이었고 내 나이도 그리 더 많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가 이제 막 문턱을 넘어섰고 이 마술적인 순간부터 그녀의 매력은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듯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리라 생각하였다. 그녀에게서는 곧 떨어질 나뭇잎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나뭇잎의 추락은 시작되었다. 나는 그녀가 이제 단지 한 송이 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며, 지금 이 순간에 벌써 앞으로 도래할 열매의 순간이 그녀 속에 현전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 속에서 나는 어떤 준엄한 질서 속으로 합류해 들어가고 거기에 동의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때는 알지도 못했던 내 아들, 어떤 모습인지 예감할 수조차 없었던 블라디미르를 생각하고 있었다.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를 통해서 먼 그의 후손들을 보고 있었다. 마침내 블라스타와 함께 침대 깊숙이 몸을 누이며 나는 인류의 저 지혜로운 영원성이 그 포근한 품에 우리를 품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p.254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p.493
2016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