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법
오한기 지음 / 현대문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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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책방의 김금희 작가편을 듣고 2016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사서 읽게 되었고, 결국.. 오한기 작가를 알게 되었다. 마지막에 실린 '새해'를 읽어버린 것이다. 무슨 끝판왕도 아니고, 작가 개성에 따라 여러 맛이나는 작품들을 연이어 보는 즐거움에 취해 있다가 마주친 작가의 작품은 실로 놀라웠다. 이 지극히 문학적인 소설을 어쩌면 좋을까. 이건 어떤 맛이라기보다, 짜지 않은 소금을 먹은 것 같은 황당함, 신기함, 어쩌면 조금은 경이로운 기분이었다. 
 
 85년 생이면 나보다도 어린데 어디서 무얼 먹고 보며 자랐길래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오한기 작가를 가리켜 한국문단의 김기덕이라는 정지돈 작가의 유명한 비유를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후장사실주의라는게 도대체 어떤 사상인지 감도 오지 않지만(배설의 문학이라는 뜻인가?) 무언가 아무말대잔치(..)같은 그의 문장들에 실려 떠내려가는 데에는 확실히 매혹적인 면이 있다. 거인의 나라에 들어선 미물이 된 느낌이랄까. 어쩌면 작가의 하룻밤 꿈 속을 걷는 것 같기도 하다. 

 소설 속 나의 존재는 엄청나게 현실적이지만, 주변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다. 그들은 마음껏 비웃고 침을 뱉고 총질을 해댄다. 나는 그저 멍하게 그것들을 바라볼 뿐, 엄청나게 무기력해서 엄청나게 현실적이다. 나는 나약하고 비겁하니까. 하지만 재밌는 것은, 그 수많은 방해에도 나는 절대 글을 쓰는 일만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난리의 시초가 그 '쓰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텐데도 결코. 그러다보면 그 난리를 처음부터 부추기고 지켜보고자 했던 것이 애초에 나의 의도였음을 깨닫게 된다. 모든 과정은 소설 쓰기로 귀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이야기 쓰기에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라면 이 이상한 소설들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나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오한기 작가가 마치 메타 소설계의 톨킨같다(...)고 느낀다. 어떤 작가가 '글쓰기' 라는 문학의 본질에 '판타지'라는 장르적 요소를 이렇게 묘하게 볶아낼 수 있을까 말이다. 어쩌면 비약일지도 모른다. 오로지 '소설쓰기'에 온 정신이 팔려 약간 이상해져버린 작가의 단순한 의식의 흐름에 내가 너무 깊이 감화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전혀 직선으로 나가지 않는 이야기의 방향성 사이로 불쑥 불쑥 드러나는 작가의 문학에 대한 태도를 엿보는 일도 즐겁다. 자꾸만 해석하고 싶고 찾아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과연 훌륭한 독자를 만드는 작가가 아닌가...싶다. 아주아주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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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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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쿠라 씨, 당신은 운이 좋아요. 처녀에다 독신에다 편의점 알바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는 당신이 내 덕분에 기혼자 사회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당신이 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할 테고, 주위에서 보기에 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게 모든 사람이 가장 기꺼이 받아들이는 당신의 모습이에요. 잘됐어요!"
-p.165

 

 

  후루쿠라 게이코는 소위 소시오패스라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정도는 아니지만, 사람들과의 평범한 상호작용에는 어려움이 있어 대학 졸업 후에도 취업은 하지 않고 18년 간 편의점에서 일을 해왔다.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추어 대응을 해야하는 일들에 비해, 편의점에서의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규칙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그녀는 이 일이 자신에게 천직이라 여긴다. 그러나 서른 여섯이 되도록 제대로 된 취업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그녀를 세상사람들은 걱정이란 이름으로 비난한다. 그런 그녀 앞에 또다른 종류의 '사회부적응자'인 시라하가 등장한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타인에 대한 집착이나 혐오로 표출하며 세상이 자신만을 제외하고 모두 잘못되었다고 믿는 사람이다. 둘은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이 '정상'임을 증명하기 위해 원치 않는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편의점엔 매뉴얼이라도 있지, 세상엔 매뉴얼도 없으면서 보이지 않는 규칙들을 지키지 않으면 인생의 낙오자 취급을 받고 만다. 세상의 매뉴얼을 읽는데 어려움이 있는 주인공은 그래서, 편의점의 명확한 규칙과 행동지침들에게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대로 행동하면 정상인이 된 것같은 느낌이 드니까. 주인공의 시선에선 세상의 '정상'이라는 것들이 당연하지만은 않다. 취업을, 혹은 결혼을 왜 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으면서 그저 다들 그러는데 너는 어째서 그러지 않느냐는 추궁은 아리송하기만 하다. 우리가 모두 살아내야 한다는 책임감 있는 삶, 착실한 삶이란 무엇일까. 회사에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매달 보험료를 내며 미래를 대비하는 삶? 오히려 정해진 규칙에 순종하며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이야말로 편의점에 진열된 상품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이 시대가 지나면 또 어떤 새로운 모습의 삶이 '정상'이란 이름으로 매대를 가득 채울런지.

 대단한 감동은 없지만 휘리릭 읽기 좋다. 제목처럼 책도 내용도 가볍다.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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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낚시통신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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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대녕 작가의 첫 책을 찾아 읽었다. 94년도에 나온 책이라고 하는데 워낙에 점잖고 뭐랄까 좀 고전적인 문체를 쓰는 작가라 그런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느낌이다. 하긴 94년도면 벌써 22년 전이구나. 가끔 연도를 가늠해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러 버렸을까.....


 예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나는 이런 한국말의 예스러운 말투와 분위기를 무척 좋아한다. 떠올리면 낭만적이고 설레기까지 한다. 내가 있는 곳과 같은 장소, 그러나 다른 시간 속에서 비슷한 듯 전혀 다른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이 즐겁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야 지금과 다를바 없었을테지만 밖으로 표출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고, 그 약간의 벌어진 틈새를 들여다 보는 것이 재밌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이 책을 읽을 때도 설레고 좋았다. 


 10개의 단편이 묶여 있는 두툼한 두께의 소설집인데 사라진 것(혹은 사람)이나 알 수 없는 것(혹은 사람)을 찾아 다니는 이야기가 많다. 와중에 남과 여 사이에 일어나는 모종의 사건이나 감정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는 것은 좀 의외였다. 이것을 로맨스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니면 남자가 생각하는 로맨스란 이런 것인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여자들은 저마다의 비밀을 몸 속에 품고 그를 찾아와 유혹한다. 남자는 여자를 받아주지만 끝끝내 이해에 닿을 수는 없고, 여자는 어떠한 대답도 남기지 않고 한순간 사라져 버린다. 관계 속에서 여자들은 머무는 힘과 떠나는 힘을 동시에 갖고 있는 반면, 남자는 수동적인 느낌이 강하고 또 여성의 유혹에 약하다! 남자가 쓴 연애 소설이란 무척 흥미롭구나.


 "어려서 한때 경주에서 살았는데 가끔 버스를 타고 동해삼척까지 갔다가 도로 내려오곤 했어요. 별 볼일도 없이 말예요. 동해삼척에서 포항까진 바닷길이라서 정말 근사하잖아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지 싶어요. 하지만 울진 왕피천에 은어가 산다는 얘긴 처음 듣네요. 아무튼 마음이 힘들 때마다 그 길을 오르락내리락했던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픽,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 혼자 왕피천으로 은어낚시를 가게 되면 나 또한 그 바닷길이 좋아 경주까지 내려가곤 하지 않았던가. 물론 경주에 가면 석굴암을 볼 수 있다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긴 했다. 나는 반가운 눈을 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젠가 서로 비껴 지나갔거나 혹은 같은 버스를 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무슨 말인가 하여 그녀가 뜨악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그렇고 그렇다는 얘기를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린 정말 근사한 인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네요."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불현듯 애달프고 그리운 생각들이 몰려왔다. 나는 바닷길을 함께 회유하고 있는 그녀와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그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터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얼른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 끝으로 한참이나 모래를 매만지고 있었다. 한동안 나는 은어 생각에 빠져 있었던가.
 그러고 나서 예기치 않게도 폭음을 하고 난 아침처럼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증류상태가 찾아왔다. 나는 갑작스레 텅 빈 상태가 되어 무릎에 턱을 괸 채 바다 위에서 출렁대고 있는 달빛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러갔던가.
 문득, 그녀의 손이 내 어깨 위로 슬그머니 올라왔다. 마치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창문을 두드리듯이.
 그녀와 나는 서툴고 기묘한 몸짓으로, 서로를 차단하고 있는 투명한 공간을 서먹하게 거역하면서, 마침내 상대의 차가운 입술에 지친 듯 입술을 갖다댔다. 순간 나는 때로는 그리움이 정욕을 부른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녀가 모르게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그 기이한 깨달음의 순간이 지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아이처럼 내 품에 안겼다. 돌연한 일이라서 나는 잠시 멍한 상태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였다. 그러는 사이 그녀가 내 목을 힘주어 끌어안고 안아줘요, 하면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유채꽃의 바다에서 그녀와 나는 아무 뉘우침도 약속도 없이 급기야는 하나가 되어 달빛이 끄는 대로 조수처럼 떠내려갔다.

- 「은어낚시통신」 p.87-88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물을 사이도 없이 앞뒷문 차 유리가 스스스 내려앉으며, 바다같이 무엄하게 넘실대는 배꽃의 무리가 창졸간에 차 안으로 쏴아 하고 밀려들었다. 순간 나는, 아아 하고 흐느끼는 자경의 밭은 입엣소리를 듣고 있었던가. 황톳빛 선연한 낮은 둔덕을 따라 수만의 배꽃들이 초경의 봄비 속에서 히히덕거리며 우리를 넘보고 있었다. 그때쯤 해선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야말로 배꽃 천지였다. 자경의 얼굴은 다시금 가부키 배우처럼 변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무섭다, 고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대기 시작한건 확실히 그때 배꽃을 본 때문이었다.
일요일 밤에 결혼한 신부들이 길에서 비를 맞고 있어요. 새들이 차를 잡고 있어요. 날이 어둬져요! 남천이 떠나가고 있어요!
해남 친구가 앗, 하며 앞에서 달려오는 차를 피하기 위해 급히 핸들을 우로 꺾었다. 황톳물이 차 안으로 끈적하게 튀어들어 왔다. 그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며 백미러로 자경을 훔쳐 보았다.
길은 길을 물고 이어져 끝 간 데가 없었다.

- 「국화 옆에서」 p.212

"서형, 학교 다닐 때 운동권였소?"
그 말투 속에는, 나도 그때는 돌멩이 깨나 던졌더랬소, 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따라서 그 빈정거림이란 자조적이기에 앞서 자괴적으로 들렸고 자괴적이기에 앞서 숨긴 상처를 들춰낸 자에 대한 분노처럼 들렸다. 나는 그의 말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이미 타협했지 않은가. 명함과 양복과, 구두와, 은행 신용카드와, 운전면허증과, 최저생계비와, 예금통장과 기타 가정이라는 또 하나의 질서체계에서 가장의 권위를 부여받는 대신 일찌감치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도장을 찍은 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민자당이 어떻고, 국가보안법이 어떻고, 광주가 어떻고, 대학생 문신이 어떻다고 떠들다니 가증스런 일이 아닌가. 내가 백 번 실수했다. 남기수에게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하리라.
"서형, 아직도 우리가 민주국가의 시민이긴 한 겁니까?"
어느 순간,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남기수가 내게 물었다. 나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그의 말에 대꾸했다. 내 목소리엔 조금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는 독재국가의 청맹과니들입니다."
"그렇군요...... 역시."
그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택시는 길음동, 길음동 부근 미아리 텍사스에 우리를 부려놓고 왔던 길을 횅하니 되돌아갔다. 우리는 막차를 놓친 사람들마냥 택시가 사라져간 길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남기수와 나는 서로의 눈을 피하며 길 한복판에서 엉거주춤 서 있다가 길옆 간이 포장마차로 다가갔다. 그곳은 육탐을 못 이긴 자들이 찾아와, 행사를 치르기 전후에 빈속을 채우고 가는 축생의 여물통이었다. 남기수와 나는 거기서 사발면 한 그릇씩을 정말 축생처럼 먹었다. 우리의 속은 춥게 비어 있었다.

-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 p.335-336

 

 춘천 청평사, 부여 무량사, 제주도 성산포, 땅끝 해남을 비롯해 서울의 미아리, 종로, 광화문, 황학동 등등 열 개의 단편 안에 정말 다양한 장소들이 등장한다. 작가가 묘사하는 우리나라 곳곳의 배경을 읽고 있으면, 문득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94년의 그 곳으로 가고 싶다.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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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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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읽은 필립 로스의 소설이다.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표현의 수위가 세서 깜짝 놀랄 정도로 도발적이라는 느낌인데, 그러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잃지 않는다. 문화예술 다방면에 정통한 지적인 노교수가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소설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노교수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여성에게 마음껏 끌리면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교수라는 직업 덕분에 강의실에서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만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고, 그러던 중 스물 네살의 콘수엘라 카스티요라는 여성에게 한 눈에 반하게 된다. 당시 교수의 나이는 예순 둘. 콘수엘라 또한 교수의 지성에 경외심을 느끼며 둘은 점점 깊은 관계가 되지만, 교수는 젊음으로 찬란하게 빛이 나는 여성 앞에서 늙어가는 자신의 육체를 한탄하며 여자를 잃을까 전전긍긍한다.

나는 콘수엘라를 어떻게 잡아둘까? 생각만으로도 도덕적으로 모욕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그런 생각이 존재해. 물론 결혼을 약속해서 붙들지는 않겠지만, 내 나이에 달리 어떻게 젊은 여자를 붙들 수 있을까? 자유 시장 섹스라는 이 젖과 꿀이 흐르는 사회에서 무엇을 대신 제시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때부터 포르노그래피가 시작되는 거야. 질투의 포르노그래피. 자기 파괴의 포르노그래피. 나는 황홀했고, 나는 매혹되었지만, 나는 틀 바깥에서 매혹되었어. 무엇이 나를 그렇게 밖에 내놓는 걸까? 나이지. 나이의 상처. 고전적 형식의 포르노그래피는 오 분 내지 십 분 정도 톡 쏘는 자극을 주다가 약간 희극적인 것이 되고 말아. 그러나 이 포르노그래피에서는 이미지들이 극히 고통스러워. 보통의 포르노그래피는 질투를 미화해. 괴로움을 제거해 버리지. 뭐가- 왜 "미화할까aestheticizing?" 왜 "마취하지anesthetizing 않을까?" 글쎄, 어쩌면 둘 다겠지. 그건 대신하는 거야. 보통의 포르노그래피는. 타락한 예술 형식이야. 그것은 진짜인 체할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진실을 버려. 포르노 영화에 나오는 여자를 원하지만 누가 그 여자와 *을 하든 그 사람이 자신의 대리가 되기 때문에 질투는 일어나지 않아. 아주 놀랍지만 그게 심지어 타락한 예술의 힘이야. 그 사람은 대역이 되어, 그렇게 보는 사람에게 봉사를 하는 거야. 그것이 가시를 제거해서 영화를 즐길 만한 것으로 바꾸는 거야. 보는 사람이 그 행위의 보이지 않는 공모자이기 때문에 보통의 포르노그래피에서는 괴로움이 제거되는 반면 내 포르노그래피에서는 괴로움이 그대로 유지돼. 나의 포르노그래피에서는 신물날 정도로 자신을 잔뜩 채운 사람이나 얻는 사람이 아니라, 얻지 못한 사람, 잃는 사람, 잃어버린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니까.
젊은 남자가 아이를 발견하고 낚아채 가겠지. 그 남자가 보여. 나는 그 남자를 알아. 그는 스물다섯 살의 나, 아직 아내도 자식도 없을 때의 나여서, 나는 그 남자가 뭘 할 수 있는지 알아. 그는 날것의 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한 일을 하기 전의 나야.
p.56-57


 

 둘 사이의 육체적인 관계에 대한 묘사가 적나라하게 보여지는데, 그것이야말로 38년의 나이차를 가진 이 애달픈 관계의 핵심인 듯 하다. 젊은 육체와 늙은 육체. 삶과 죽음으로 대비되는 두 사람의 섹스. 죽음은 애처로울만큼 삶을 향해 있지만, 젊음은 늙음을, 차라리 죽음보다도 더, 염두에 두지 않는 법이다. 처음에는 사회적 지위가 높고 원숙한 지성을 지닌 교수에게 실려있던 관계의 무게가 점점 더 콘수엘라 쪽으로 기울게 된다. 


 

조지는 심지어 내가 추천서를 써주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했어. 이러더군. "선배는 이 여자애한테 늘 무력할 거예요. 절대 주도하지 못할 겁니다. 여기에는 말이죠," 조지는 내게 말했어. "선배를 미치게 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늘 미치게 할 뭔가가 있어요. 이 연결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으면 결국 그 뭔가가 선배를 파괴하고 말 거예요. 선배는 이젠 단지 그 아이와 함께하고자하는 자연스러운 요구에 응답하는 게 아니에요. 이건 가장 순수한 형태의 병리적 현상이에요...............(중략)............ 그게 비위생적이라서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역겹기 때문에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그게 사랑에 빠지는 거라서 반대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원하는 유일한 강박, 그게 '사랑'이에요.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완전해진다고 생각하지요? 영혼의 플라톤적 결합? 내 생각은 달라요. 나는 사람은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완전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랑이 사람을 부숴버린다고. 완전했다가 금이 가 깨지는 거지요. 그 아이는 선배의 완전성 안으로 들어온 이물질이에요. 선배는 일 년 반 동안 그걸 통합하려 애쓴 거고. 하지만 그걸 몰아내기 전에는 절대 완전해지지 못해요. 그걸 없애거나 아니면 자기 왜곡을 통해 통합하거나 둘 중 하납니다. 그게 선배가 한 짓이고 선배를 미치게 만든 거예요."
p.121-123


 

  작가는 교수의 후배인 조지의 입을 빌어 말한다. 맛만 보고 즐기기만 하라고. 어째서 사랑이란 한심한 것에 빠져 스스로의 완전성을 무너뜨리느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알고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짓거리를 또 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자, 사랑의 힘이겠지. 차갑게 보이는 저 말의 뒷 면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받아들이는 어느 정도의 수용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이라고는 절대 말 못하겠지만.


 위에 본문을 옮겨 적을 때도 *표를 사용했지만, 단어들이 너무 세다. 영어로 어떤 단어였을지 약간 상상은 가는데, 우리나라 말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들이 겨우 그것들 밖에 없었을까? 물론 저 쪽에 비해 우리나라가 성적인 단어를 직접적으로 입에 올리는 일이 거의 없어서 어색한 느낌이 더 드는 면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굳-이 그런 속되고 의미도 좋지 않은 단어를 가져다 쓸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조금 의역해주셨어도 좋았을텐데. 고상하고 지적인 얘기를 한참 하고 있는데 갑자기 튀어나오는 지저분한 단어들이 읽기의 흐름을 좀 방해한 건 사실이다.


 늙어가는 육체와 사그라들지 않는 갈망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남자의 처절한 절규가 들리는 듯 하다. 거리낌없이 내지르는 그 절규가 너무나 솔직해서 읽고 있는 내 마음 또한 무방비로 열렸다. 차갑고 깊으면서 어딘가 무시무시한 느낌이 든다.
 작가의 다른 책이 궁금하다.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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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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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형식의 글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일까? 이것은 차라리 수필같다. 다만 글을 쓴 사람이 작가 자신이 아닌 가공의 인물일 뿐.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 수필을 쓴다면 그것은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수필이라고 해야할까?

 질문을 하다보면 처음으로 되돌아와, 그렇다면 소설이라는 건 대체 무엇인가? 를 묻게 한다. 물론 그것은 나따위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제목에서부터 흰(색)이라는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것이 반드시 백묵의 흰 색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색없음의 상태에 더 가깝다. 아직 아무런 색도 때도 입혀지지 않은, 혹은 어떤 색도 때도 입혀질 수 없는 순수. 죄없음. 삶과 죽음. 빛.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

 


 

 

 

 

 작가의 또 다른 책 『희랍어 시간』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던 '백묵'이라는 단어의 울림을 좋아했다. 발음할 때 느껴지는, 사실 울림이라기 보다는 삼킴과 닫힘에 더 가까운 그 소리. 백묵, 백묵, 백묵, 하는 소리. 칠판에 쓰여진 글씨는 쉽게 지워지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아서 허연 자국을 남긴다. 뚝 하고 반토막 나 날카로워진 가장자리가 새로 칠판에 닿을 때 짓이겨지며 잘게 부서져 내리는 가루들. 발치를 뒹굴고 있는 짧고 둥근 머리(들). 냄새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어떤 후각적인 매캐함. 이 모든 것들이 '백묵'이라고 하는 하나의 단어에 응축되어 있다고 느껴졌고, 그 느낌은 즉각적으로 슬픔, 좌절, 소멸의 이미지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나를 사로잡았었다.

 

 

 

 이 책에선 '달떡'이라는 단어가 나를 붙든다.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이는 태어난지 채 얼마되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 책 속 화자는 어느 순간. 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달떡같은 아이, 살아있었다면 자신의 언니였을 사람이 되어 먼 도시를 헤맨다. 그 곳에서 그녀는 모든 흰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몸 속 마음 속 어딘가가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산다는 것은 귀한 것이다.
 


 깨끗하게 살고 싶다.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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