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평범한 일상과 밀착되어 있는 이야기들은 읽는이에게 어떤 감정도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젖는지 모르는채 스며드는 인간의 위선과 위악의 자국들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되어 자꾸만 들여다보게 할 뿐이다. 크고 작은 부조리가 쓴웃음이 나는 농담처럼 여기저기 심겨져 있고, 작가는 그 허위의 그림자를 섬세하고도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욕망과 좌절이 번갈아 삶에 들이치는 험난한 여정 속에서, 작가는 그러나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선량한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어린 소녀에서 젊은 나이의 여성으로 내가 지나온 나이를 갖고 있어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다. 물론 아주 굉장한 나이먹은 여자들도 등장하지만 일단 이야기를  이끄는 사람들은 모두 어리거나 젊은 편이다. 이 책이 첫 출간되었을 때의 작가 나이가 30대였던걸 생각하면 연결이 되는 부분이다. 주인공들의 무대 배경은 별다를 것 없는 일상 속인데, 그 일상들이 현재 내가 인식하고 있는 북미권의 생활방식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이질감이 흥미롭다.


김애란의 『비행운』이 떠오른 것은, 아마도 이 소설집에서 시대감이 상당히 또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비행운』속 단편들이 2000년대를 20대로 살아간 여자라면 겪어봤거나 들어봤거나, 꾸며낸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있었을 법한 이야기들이어서 무척 공감하면서, 또 감탄하면서 읽었었다. 이를테면 시간이 많이 흘러 후세 사람들이 2000년대 20대로 살던 여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해할 때 내밀면 딱 좋겠다 싶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았었다, 하면서.


마찬가지로 4-50년대 캐나다 사람(특히 여자)들은 어떻게 살아을까, 궁금하다면 이 책을 보면 될 듯하다. 폭풍이 몰아치는 로맨스나 위기의 고비를 넘고 또 넘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매일매일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엿보고 싶다면. 그때도 어쩌면 지금과 똑같이 비겁한 사랑과 작은 배신들이 넘쳐났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에게서 받게 되는 알 수 없는 감동은 뭘까. 아마도 이 모든 위선과 위악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저 밑바닥에 고이 지닌 단 한 톨의 선량함에의 희망 때문 아닐까....


가장 좋았던 단편들은 <태워줘서 고마워> <붉은 드레스-1946> <그림엽서> <주일오후> 인데, 모두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나이를 가진 여자들이 겪는 어떤 처절한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좀 다른 내용 중 좋은 것으로는 표제와 동명의 단편 <행복한 그림자의 춤> 그리고 <나비의 나날> 두 가지인데 이 두 편은 인간이 가진 위선에 대한  짜릿한 통찰이 있어 아주 재밌게 읽었다.

 

 그 뒤  몸에 찾아드는 나른함과 한기, 그리고 분리.

 서로 떨어져 무지근한 몸으로 각자 덤불을 털어내고 매무새를 가다듬고, 헛간을 나와 달은 졌으되 그루터기만 남은 평평한 밭들도 미루나무들도 별들도 변함없이 그대로 있음을 발견하고 그 무모한 여정을 끝낸 다음 한기에 오슬오슬 떨던 우리도 여전히 그대로라는 걸 발견하고, 차로 돌아가 두 사람이 널브러져 자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트리스테(쓸쓸함)이다. 트리스테 에스트.(쓸쓸해지는 것이다.)

 그 무모한 여정. 처음이라서였을까?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올라서였을까? 아니다. 그건 로이스 때문이었다. 사랑을 할 때 어떤 사람은 조금만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꽤 멀리까지 가서 신비주의자처럼 아주 많은 것을 내던지기도 한다. 그 사랑의 신비주의자, 로이스가 이제 꼬깃꼬깃 구겨지고 추운 모습으로 완전히 자기 안에 갇힌 사람처럼 자동차 좌석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내가 로이스에게 하고 싶었던 모든 말들이 머릿속에섬만 요란하게 헛돌고 있었다. 널 보러 또 올게, 기억해, 사랑해 이런 말들을 나는 하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 놓인 공간을 절반조차도 제대로 건너지르지 못할 것 같았으므로, 다음번 나무 앞에서, 다음번 전신주 아에서는 말하리라 나는  마음먹었다. 그러나 번번이 못했다. 다만 도시에 더 빨리 닿도록 속력을 높여 무섭도록 빨리 차를 몰았을 뿐이다.

 

p.158-159, <태워줘서 고마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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