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자의 상속녀 캐드펠 수사 시리즈 16
엘리스 피터스 지음, 손성경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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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드펠 시리즈에는 이처럼 중세의 치열한 신앙, 교리 논쟁이 들어가서 더 흥미롭습니다. 에코의 <장미의...>에도 거의 생사를 걸다시피한 논쟁이 종파 사이에 이뤄지는데, 중세인들은 이처럼 죽음을 초월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인간 존엄의 무게를 결정한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질병, 기아, 전쟁 등으로 워낙 사람 목숨이 파리같이 사라지기도 하다 보니 피안(彼岸)에의 응시가 그만큼 큰 비중이었다는 소리인데, 현대인들은 위생 상태의 개선, 식량난의 해소 등으로 현생 자체를 즐기다 보니 저런 논쟁이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조선 시대의 예송(禮訟)을 구경하는 분위기라 할까요. 하지만 중세의 구조에 관심 가진 이들에게는 이런 살벌한 말싸움이 너무도 재미있습니다. 여기에 미스테리까지 들어갔으니...

(*문충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책 p124에 나오듯이, 악마조차도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나왔으므로 보편 구원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죄의 개념을 이렇게 구성하니 원죄에 대해서도 오늘날 정통파 기독교의 입장과는 매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p132)는 오리게네스보다 한참 뒤의 사람이며, 원죄론을 정초한 교부 중의 교부인데 그런 아우구스티누스조차 오리게네스의 주장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이론을 만들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캐드펠의 시대(물론 가상의 인물이지만)에 오리게네스의 주장을 함부로 인용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이단시할 수만도 없는 게, 어쨌든 그 역시 교부(敎父) 중 한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일레이브와 거버트 의원 사이의 대립은 이단이라는 민감한 이슈가 개입하여 더욱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또, "여차하면 웨일즈로 넘어가요!(p141)"라고 포추너터가 일레이브에게 충고하는 것도, 이 캐드펠 시리즈가 영리하게 북서 잉글랜드로 배경을 잡은 이유를 잘 설명하는 하나의 예입니다. 

여기서 캐드펠이 일레이브를 치료하고 돌보는 방식도 마치 <장미의...>에서 배스커빌의 윌리엄이 아드소를 잘 살피는 장면들과 닮았습니다. 물론 나이가 지긋한 주인공이 아직 미숙한 젊은이를 이리저리 케어하는 건 어느 문예에서나 나올 수 있는 설정이며, 그만큼 주인공 캐드펠이 능력 있고 원숙한, 매력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이런 장면들이 더욱 인상적으로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워낙 단단한 머리를 가졌으니 오래 남는 후유증은 없을걸세.(p159)"라고 캐드펠이 일레이브에게 말하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단단해야 내용물이 더 잘 보호되나 봅니다. 그럼요.

그리고 저기서 캐드펠이 "이제 몸에 자신만의 흔적이 남은 셈이네."라고 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합니다. 역전(歷戰)의 용사들에게는 몸 여기저기에 흉터가 남는데, 물론 보기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흉터는 다른 누구의 몸에도 없는, 자신이 그만큼 세상을 치열하게 산 흔적과 증명이 되기 때문에 영광의 흔적이요 chronicle입니다. p198에 묘사된 제번의 꼼꼼한 습관, 일처리 스타일, 그리고 말끔히 면도된 얼굴 등은 이와는 대조를 이루며, 물론 그 또한 앞으로 제번이 어떤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과업의 달성에 이바지할지를 암시합니다.

중세에는 또한 장인(匠人)들이 대접을 받던 시대입니다. 꼼꼼하게 만들어진 각종 가구, 장치 등은 사람의 노고를 덜어 주며, 치밀한 기능성으로 인해 지적인 노동의 효율성을 크게 올려 주기도 했습니다. p288을 보면 제번과 조카 포추너터의 협업으로 전에 없던 멀쩡한 책궤가 제 기능을 하는 걸 보며 독자의 마음이 다 뿌듯해집니다. p31를 보면 여전히 흐트러진 게 없어 보이지만, 모두를 뒤흔들어 놓은 그 끔찍한 교란상은 이제 캐드펠의 노련한 손길 끝에 마무리됩니다. 질서의 회복만큼 확실한, 이단에의 단죄는 없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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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루인 수사의 고백 캐드펠 수사 시리즈 15
엘리스 피터스 지음, 송은경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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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수사(修士. 로마 가톨릭 수도사) 시리즈 첫 권이 나온 게 1979년입니다. 이게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건 1990년대 중반이고 그때도 북하우스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비슷한 점을 떠올릴 텐데, 이 시리즈 첫 권이 <장미의...>보다 더 빠릅니다. 다만 한국에서의 번역 출간은 열린책들의 <장미의 이름>이 더 빨랐고, 1990년대 중반 북하우스가 캐드펠 전권을 출판하기로 결단 내린 건 <장미의.. >의 성공을 보고 자극받은 바 있지 않았을까 하고 제 마음대로 추측해 봅니다. 캐드펠은 주인공이나 배경이나 모두 잉글랜드(웨일즈와 바짝 붙은 서부)이지만 <장미의...>에서는 주인공 배스커빌의 윌리엄만 잉글랜드인일 뿐, 배경은 이탈리아 북부입니다.

(*문충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빈사의 할루인 수사 곁에서 에드먼드 수사는 조용히 말합니다. "정신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육신이라는 집이 깨끗하게 치워지기를 기다리는...(p49)" 후... 막상 아픈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도 없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보고 곁에서 공감하는 이가, 그렇게라도 대신 위안을 삼아야, 이 필멸의 인간이 그럴 만한 악행을 저질렀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필히 치르게 되는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그저 무기력하게 마음을 달랠 뿐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있는 곳에 구원도 함께하기 마련이니(적어도, 현대의 신구교 주류 교리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구태여 성지(聖地)를 순례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p62에서 라둘푸스 수도원장에게 할루인은 죄를 씻기 위해 자신이 성지로 떠나게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라둘푸스 수도원장 아니라 우리 독자들도, 사람 상태가 이런데 대체 무슨 여행이 가능하겠냐며 만류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일 것입니다. "의지와 용기는 충분하나, 그럴 기력이 있는지가 문제겠습니다." 캐드펠다운, 온당하고 신중한 말입니다. 

애들레이즈 드 클리어리 부인(p92)... 고대나 중세에는 교통과 통신 인프라가 대단히 불완전했고, 따라서 나그네의 안전을 보장하고 적절한 환대를 베푸는 게 미덕이자 의무로까지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가 천벌을 받은 것도, 나그네를 푸대접한 죄목이 크다고도 하죠. BBC에서 만든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보면, 펠리시아 백작부인과 매카시 아주머니가 등장하여 브라운 신부의 보조 노릇도 하고 교구의 크고작은 일을 처리합니다. 항상 평신도 중에는 이런 역이 꼭 있어야 하는데 저는 이 작에서 저 드 클리어리 부인을 보고 그 생각이 났더랬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혼인이라는 성스러운 예를 거치려면 목사건 신부건 랍비이건 뭔가 특별한 식견을 지니고 성스러운 자격을 갖춘 이가 절차를 주례해야 합니다. p150을 보면 센러드가 두 사람, 즉 두 성직자에게 누가 사제 서품을 받았는지 묻습니다. 사제가 혼배성사를 주재해야 하기 때문이죠. 카를 4세가 1356년에 반포한 금인칙서에 의해서야 비로소 천주교 사제는 교회가 독점적으로 서품할 수 있게 되지만, 그때로부터 근 백 년 전인 소설 속의 이 시대에도 민중은 이미 왕보다는 보편 교회의 권위를, 적어도 영적인 일에서는 더 높이 샀던 것입니다.

영어에 maraud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의 패잔병, 혹은 혼란스러운 세상에 혼란을 틈타 약자, 여성을 기습하여 재산과 목숨, 명예를 뺏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기어이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여, 캐드펠과 센러드는 p186에서 에지타의 시신을, 차가운 눈밭에서 발견합니다. 미스테리 소설의 모범적 발걸음에 따라, 이 시신의 발견은 가뜩이나 꼬여 있던 상황의 긴장을 최고조에 달하게 이끕니다.

I have seen that face before. 캐드펠 시리즈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유독 이런 모습을 자주 보이지 않습니까? 균형잡힌 머리, 가느다란 허리... 아, 저 여인을 대체 어디서 보았더라?(p233) 캐드펠의 관록과 지혜가 폭발적인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그 미궁에 빠진 사연도 드디어 실마리를 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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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의 정석 2 - 실패하지 않는 창업, 상권부터 분석하라! 상권의 정석 2
정양주 지음 / 라온북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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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7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장에서 상권 분석이 왜 필요한지를 (전작에 이어) 간략히 독자들에게 환기하고, 2장에서는 그 분석의 기초와 실전 프로세스를 가르칩니다. 3장에서 예상 매출을 대략적으로나마 어떻게 산출하는지 밝히고, 특히 4장에서는 점포계약, 권리분석의 기초에 대해 짚습니다. 5장에서 업종별 각론이 나오고, 6장은 이른바 디지털 기법을 경영에 어떻게 접목할지 설명합니다. 7장은 업소 정리의 요령인데, 이 대목에서 저자의 휴머니즘 같은 게 지면을 통해 전달되는 것 같아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입지는 들어오는 길과 보이는 지리에서 결정된다(p46)". 접근성, 가시성, 독립성이 입지의 3대 요소라고 저자는 가르칩니다. TG라는 말이 책에 나오는데 상식으로도 유입동선이라고 알고들 있지만 원래 이게 학문적으로도 있는 개념입니다. traffic generator라고 하죠. 여튼 핵심은 "사람들이 여기를 쉽게 찾을 수 있는가?"라고 합니다. "이 고객은 오로지 나만 잡을 수 있다" 바로 이게 독립성의 핵심이며, 저자는 이 3요소가 개별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으며 입지가 성공적이려면 함께 갖춰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가시성이 좋아도 유입이 힘들고 배후 세대가 적어서 실패한 예를 책에서 듭니다.

"매출이 나와도 남는 게 없을 수 있다(p78)." 어디가 과연 손익분기점인지 간단한 공식을 통해 짚습니다. 이걸 넘겼다고 쉽게 안심해서는 안 되며, 인테리어 투자금 등을 과연 회수하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모든 건 딱떨어지는 숫자로 판단해야지, 막연히 괜찮겠거니 이 정도면 본전이겠거니 느낌으로 판단하면 너무도 위험하다고 일러 줍니다. 여기까지, 설명이 장황하지 않고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문장이 간단간단 끊어져서 머리에 잘 들어옵니다.

상권이 한번 이름이 났다고 그게 안정적으로 계속 가는 게 아닙니다. 재개발, 재건축, 슬럼화, 기반시설공사, 주변철거 등이 상권을 근본부터 흔드는 요인이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p117). 여기서 C사장이라는 인물의 실제 사례가 나오는데, 계약서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나서 바로 철회했습니다. 세상에는 악질들이 참 많아서 쓰레기 같은 건물을 팔아넘기면서 권리금까지 받아먹는 천벌을 받을 악마가 다 있습니다. 당대에 벌을 받는다고 그 자손들이 결코 성한 인간으로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전략은 구체적이라야 합니다. 막연히 손님을 많이 모아야지 여길 게 아니라, 나는 20대에서 40대까지의 여성을 주로 고객으로 삼아야겠다 같이, 타겟 그룹을 명확하게 정한 후에 방향성을 구체화해야 합니다. p134 이하에는 베이커리 디저트 전문점 성공을 위한 구체적인 사례와 전략이 나옵니다. 역시 여기서도 가시성과 접근성이 생명이라는 저자의 지적이 다시 응용, 반복, 관철됩니다. 고객단가도 차별화하고, SNS를 통한 홍보는 필수라는 충고가 따릅니다. "이런 업종도 과연 장사가 될까?" 싶어도 트렌드를 잘 따르면 의외의 성과가 나기도 한다고 알려 줍니다. 그 예는 하비프러너(p147)인데 요즘은 이렇게 무슨무슨 프러너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 것 같습니다.

무인점포가 과연 잘될까요? 워낙 인건비가 오르니 이런 업종도 등장하는 건데 불량청소년들이 죽치고 앉은 모습을 보면 저는 영 걱정스럽기만 하더군요. p168 이하에 이른바 스마트숍의 관점에서 이런 점포를 어떻게 경영할지 구체적인 방법론이 나옵니다. 가게는 또한 이른바 "인스타그래머블한" 곳이면 여러 고객들이 와서 사진이라도 한번찍으려고 들르는데 이 역시 자영업자들이 잊지 않아야 할 포인트입니다.

제7장이 점포 정리 요령인데 물론 한번 힘들게 시작한 장사를 망하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일단 망하면 미련을 갖지 않고 최단 시간 안에 합리적으로 정리를 해야 합니다. 업종 전환의 간단한 예시도 있는데 사업실패 한번이 끝이 아니라 다시 재기를 해야 하므로 이 부분도 주의깊게 읽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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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엑시트 - 불평등의 미래, 케이지에서 빠져나오기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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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회건 그 나름의 모순은 존재하며 모든 공동체는 그러한 구조적 결함을 인지하고 성원들의 지혜를 모아 조금씩 개선해 다가려 듭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 사회에 세 가지 불펑등의 축이 강고하게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비로소 동아시아 사회 특유의 소셜 케이지와 충돌할 때(p34) 지금까지의 경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혼란이 빚어질 것을 과감하게 예언합니다.

(*북뉴스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누군가의 존엄, 자유, 권리 등이 심각하게 침해받았다고 느낄 때 경제학자 허시먼은 그에게 세 가지 옵션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p8). 탈출(exit), 저항, 충성. 저자는 둘째 옵션인 저항에 대해서는 여태 많은 이들이 논의했으며, 자신은 이제 사회혁명에 대해 새삼 기대하지 않기에 첫째 옵션인 "탈출", 즉 엑시트에 대해 분석하겠다며 책의 서두를 잡습니다. 어쩌면 모세의 이집트 탈출(출애굽), 1948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건국(유럽으로부터 벗어남), 17세기 영국 퓨리턴들의 북미 이주 등이 그런 예일지 모릅니다. 

저자는 1910년 경술국치 후 조선인들에게도 세 옵션이 있었다고 합니다. 민중들은 왜 탈출(엑시트)하지 않았나? 순응의 비용이 훨씬 낮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주나 하와이 등으로 이주한 이들은 일견 엑시트인 듯 보여도 이들 중 상당수는 저항을 겸한 이주였겠습니다. 여튼 엑시트를 택한 이들에게는 낯선 사회와 환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겠는데, 그 사회는 자신만의 소셜 케이지(social cage)가 이미 형성된 상태입니다. 이주자가 가장 먼저 직면하는 도전은 저 케이지를 어떻게 뚫고 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기업은 비교적 폐쇄적이고 배타적입니다.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다고 하나 타 조직에 몸을 담다가 이직해 온 이들에 대해 온전히 마음을 열고 화학적 결합을 기꺼이 이룰 의향이, 미국이나 서유럽에 비해 매우 부족하다고 할 수 있죠. A는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인데, 이제 가입한 C를 똑같이 우대할 수는 없지 않겠어? 이렇게 말하는 B는, 속으로 A 역시 자신을 C와는 전혀 다른 특별한 존재로 대접할 것을 반대급부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p46에서 저자는 회사원 A씨의 예를 들며, 그는 타 직장 H로 이직할 수는 있어도 지금까지 이뤄 온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 때문에 "엑시트"가 쉽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손흥민이나 추신수, 류현진 등에게 가능했던 엑시트 옵션이 A씨에게는 사실상 없는 것입니다.

p65 이하에서 저자는 사회 A(미국 같은), 사회 B(한국 같은) 둘을 대별하며, 특히 B에 대해 학벌, 내부 노동시장, 연공제 등으로 제도적 상보성(institutional complementarity)이 유지되며 작동하는 점을 가장 큰 특징으로 꼽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왜 엑시트 옵션이 특별히 제한되느냐면, 예를 들어 자신의 노동을 팔고 싶어도 그걸 사 줄 고용주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듭니다(p87). p126을 보면 한국의 청년들이 그토록 정규직 직장에 목을 매는 이유가, 이처럼 엑시트 옵션이 지극히 제한된 환경에서 그나마 청년기의 초입에 사회적 기반을 잡을 채널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정년까지 어떻게든 이런저런 보호망으로 자신을 지킬 유력한 케이지를 마련할 방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AI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AI는 갑자기 출현했다기보다, EDPS, ERP(전사적[全社的] 업무관리) 등 20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기업을 잠식하던 자동화 트렌드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합니다. 1980년대만 해도 기업과 회사원은 세력의 힘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았으며 기업도 인재의 중용을 사시(社是)의 하나로 표방할 만큼 겸손했습니다. 지금은 사람이 없어도 어지간히 시스템이 돌아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을 뽑아 일을 가르쳐 내보낸다는 마인드에 가깝습니다. 이제 AI가 이제 조직의 핵심에서 기능하니 조직원의 위상은 전보다 더욱 위축되어 행여 조직 안에서 배제, 소외되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할 뿐입니다.

조직 내에서 50대, 60대 중심의 공고한 네트워크가 구축되면 첫째 이들만의 폐쇄적 이익이 옹호되고 둘째 조직이 위기에 처했을 때 과감한 혁신의 아이디어를 낼 만한 젊은 인력의 풀(pool)이 실종되어 결국 타성에 젖어 도태되게 됩니다. 저자는 일부 대기업에서 엔지니어나 엑스퍼트가 아니라 이른바 재무통(p345)이 득세하여 결국 조직이 활기를 잃고 고사해 가는 게 이 때문이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과연 한국 사회는 이 위기를 타개할 만한 역량을 갖출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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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익스포저 (포토에세이) 듄 시리즈
그레이그 프레이저.조쉬 브롤린 지음, 채효정 옮김 / 아르누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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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허버트의 소설 <듄>은 발표된 지 반 세기가 훌쩍 넘은 SF 고전입니다. 40년 전쯤에 영화로도 한 번 만들어졌는데 감독이 무려 데이비드 린치였고 폴 아트레이더스 역에 카일 맥라클란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면 <쇼걸>에서 남주 포지션, MBA 소지 카지노 부장이었던 양갈래 머리 영앤리치 역이었던 그 배우입니다. 2020년대 리부팅 시리즈에서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티모시 살라메가 나오죠. 사실 데이비드 린치는 위대한 감독이기는 해도 <듄> 팬들이 원하던 실사판에는 그 스타일이 잘 맞지 않았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1984년판은 그 캐스팅에서 카일 맥라클란(주인공)이 제일 지명도가 떨어지는 배우였고, 막스 폰 시도, 실바나 망가노, 호세 퍼러, 패트릭 스튜어트, 숀 영, 버지니아 매드슨(프린세스 이룰란 역), 위르겐 프로흐노, 그리고 가수 스팅도 나옵니다. 완전 초호화 캐스팅이었는데 제 생각에는 원작에 충실하지 않고 자기 스타일만 고집한 데이비드 린치의 잘못으로 저 1984년 기획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영화가 졸작이었다기보다, 팬들이 원한 게 그게 아니었던 거죠.

지금 이 책은 2021년에 개봉한 드니 빌뇌브 판에서 거니 할렉으로 나온 조시 브롤린, 그리고 드니 빌뇌브와 이번에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촬영감독 그레이그 프레이저가, 여러 아름다운 스틸컷과 비하인드 샷과 함께 텍스트를 썼습니다. 이런 영화, 대작 원작이 있는 판타지 장르는 촬영감독이 또한 중요한데 1989년작, 그 말이 많았던 팀 버튼의 <배트맨>도 사실 저는 촬영감독 로저 프랫이 기대만큼 못해줬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2021년판 <듄>은 그레이그 프레이저가 연출자 빌뇌브와도 호흡이 잘 맞았고, 제작진의 의도를 알아서 잘 읽어내어 대형 기획을 성공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저는 봅니다.

조시 브롤린은 <노인을 위한...>에서 갱들에게 쫗기고 살인마와 대립하던 그 퇴역군인 역이었고, MiB에서 요원 K(의 젊은시절)였던 배우이기도 합니다. 심각하고 핸섬하며 중후한데 웃기기도 하죠. 아쉽게도 이 책에는 페이지 마킹이 없어 제가 쪽수 인용을 못하겠는데, 중간쯤에 보면 "친애하는 드니(에게)"라는 설루테이션으로 시작하는 짧은 글이 있습니다. 중동의 사막에서 로케이션된 이 영화를 찍으며 브롤린은 내가 지금 (역에 깊이 몰입하여) 노래 한 곡조 뽑으려는데 한번 들어 보겠냐며 (브롤린이 아니라) "거니"라고 클로징 시그니처를 적습니다. "드니(Denis)"와 "거니(Gurney)"의 라임을 맞춘 것입니다.  

장대하게 펼쳐진 사막을 보면 인간은 할 말을 잠시 잊습니다. 1961년작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스페인과 요르단에서 찍었다고 하는데, 이 영화는 요르단, 조금 내려와서 페르시아만을 바라보는 UAE 아부다비에서 찍었다고 합니다. dune은 그저 모래언덕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에 불과하지만,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과 빌뇌브의 이 대형기획 덕에, 이제는 뭔가 다른 울림을 갖는 이름으로까지 격상된 듯합니다. 원작소설 제목도 관사 없이 그냥 Dune입니다. 이 책에 포함된 많은 사진들도 배우들의 깊은 주름, 정신없는 컬 뒤에 아스라이 자태를 드러낸 배경으로 크고작은 모래언덕들이 나옵니다.

"발이 빠지지 않게 걷는 데 우리 모두가 익숙해졌으므로 아무도 샌드백(이라는 이동도구)을 쓰지 않는다." 이런 대작의 촬영은 배우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스탭들이 참여하는 중노동입니다. 앞으로 생성형 AI가 완전히 활성화하여 CG도 모두 대체하고 사람은 그저 컨셉만 제공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컨텐츠에서 과연 관객이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요? 듄의 캐릭터들이 걸친 코스춤, 수트들은 원래도 기괴하기 짝이 없지만 이 책에 실린 많음 사진들에서는 더욱 기괴하게 보입니다. 얼굴이 익은 배우들도 하나같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상당수가 흑백으로 찍힌 사람들과 언덕들을 담은 사진들이 또한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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