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의 우리 사람
그레이엄 그린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가 4년 전 리뷰를 남겼던 <브라이튼 록>에서 잘 드러나듯, 그레이엄 그린은 20세기 쇠락해 가는 대영제국의 안뜰과 뒤뜰을 소설에 자주 담았던 편인 작가입니다. 이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배경이 바티스타 정권 하의 쿠바인데, 주인공 제임스 워몰드는 지난 세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임을 뽐내던 영국의 초라한 상황을 상징하듯 매우 어려운 형편에 놓인 자영업자입니다. 말 안 듣는 딸 밀리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면 사춘기 딸 키우기가 이렇게 어렵겠구나 싶은데, 나치에 타격당하고 거의 질 뻔한 전쟁을 간신히마무리지었건만 야당인 노동당에게 정권을 줘 버린 자국민들을 보던 당시 보수당 정치인들의 심경도 이 대목에서 풍자된다는 생각도 저는 들었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워몰드가 먼 대서양 카리브해(p74) 지역에 왜 머물러서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하느냐면, 그건 대서양 일대 구 유럽 식민지의 형편이 다 그러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물론 쿠바는 영국 세력권이었던 적이 없었지만 인근에 바하마라든가 도미니카연방 같은 곳들도 다 비슷한 경기였고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현지인들에게 우월적 지위로 뭘 해먹던 게 이제 예전같지 않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식민인들이 기민하게 정세 변화에 대응한 것도 아니고 본국으로 귀환해 봐야 더 상황이 나빠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바나의 정정은 매우 혼란스럽고, 이는 집권자 바티스타의 무능함과 부패가 한몫해서인데 소설 곳곳에서 이 점이 지나가듯 암시됩니다.

1960년대 영화 007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관객 눈에 당혹스러운 게 있습니다. 영국은 2차 대전 후 급저그런 나라로 전락했는데 뭐하러 저렇게 세계의 (비밀) 경찰 노릇을 하려 애쓰며, 그럴 여력이나 있었던가? 이 1958년작 소설을 보면 그 씁쓸한 이면이 묘사됩니다. 첩보 당국은 뭔가 과거의 환상을 붙들고 그들의 사무를 처리하는데, 진지하고 열심이긴 하지만 아무한테도 크레딧 받지 못하는 그 노력이 뭔가 안쓰럽고 우스꽝스럽까지 합니다. 워몰드의 개인적 무능과 당국의 기묘한 무기력이 겹쳐 보여 소설의 코믹한 상황이 아이러니를 더합니다.

시니컬하고 열의가 없는 워몰드에게 슬로피 조의 이방인 손님은 말합니다. "1939년처럼 뒤통수를 맞진 말아야죠.(p47)" 여기서 영어원문은 Ribbentrop Pact라고 표현하는데 이게 (이 번역본에서처럼) 독소불가침조약입니다. 리벤트롭이라고 당시 독일 외무장관 이름을 대면 더 의외의 타격감이 아프게 다가오죠(이 역본에서는 뒤통수 맞음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이것만 봐도 당시 영국은 나치 독일이 아니라 공산주의 소련을 더 큰 주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은 MI6에 복무한 적도 있었기에 이 분위기를 잘 알았으리라는 전제 하에서 말입니다.

캡틴 세구라는 그전부터 워몰드에게 매우 신경쓰이는 작자였습니다. 대체 왜 저런 남성들은 한참 어린 아이들에게 이처럼 구칙칙한 눈길을 보내곤 하는 걸까요? 또, 딸 밀리라도 선명한 처신을 하면 좋으련만 아빠 애를 먹이려고 무슨 작정이라도 했는지 얘마저도 희한한 언행으로 문제를 악화시킵니다(물론 두 번이나, 캡틴 세구라에게 '이 파티는 당신이 아니라 아빠의 것'이라고 못 박긴 했습니다). p141:4의 원문은 "He was hurt that anyone so pretty should look at him with such contempt."인데 여기서 왜 워몰드가 anyone이란 표현을 썼는지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고, 책의 번역문은 그걸 더 타자화하여 효과를 높입니다. 여기서 세구라가 내뱉는 욕설 원어는 스페인어 Coño입니다.

p239를 보면 영국 첩보당국이 이제 패권을 미국에 뺏기고 얼마나 허탈해하는지 국장의 푸념을 통해 그 심기가 간접적으로 드러납니다. 미국에서는 checkers라고 하고 영국에서는 draughts라고 하죠(p141). 이중 첩자라는 게 화제에 오르는데 사실 작가 그레이엄 그린도 이쪽 일에 대해 잘 알 만한 경력을 가친 인물이라서 이 언급은 뭔가 심상치 않게 다가옵니다. 바티스타 정권이 망하기 직전 긴박한 아바나의 모습은 영화 <대부 2>에도 몇 컷이 잘 나오죠. 

캡틴 세구라는 밀리의 아빠 워몰드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는 등 거침이 없고(p299), 워몰드 씨는 사태의 전개가 자신의 뜻과 하나도 맞지 않아 당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워몰드의 거주 자격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세구라는 갑의 위치이고, 여기에 닥터 하셀바허(저 앞 p109에서는 갑자기 여자가 된ㅋ)의 죽음과 장례까지 겹쳐 일은 걷잡을 수 없이 꼬입니다. p345에서 언급되는 페르시아만의 바스라는 이라크 소재인데 이때만 해도 이라크는 대단히 세속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쿠바 역시 공산혁명 전이라 미국인들이 제 안방처럼 드나들며 영향력과 이권을 키워 나갔는데, 이 코믹한 소설은 한 시대 구간에 찍힌 마지막 기념사진처럼 묘한 풍속도 노릇을 합니다. 영화로도 바로 만들어졌었는데 <닥터 지바고>나 <콰이 강의 다리>에 나왔던 알렉 기네스가 워몰드 역입니다. 사실은 이 워몰드 역이 알렉 기네스 연기의 가장 특징적인 면을 보여 준다고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뉴욕 3부작 -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마추켈리 외 그림, 황보석 외 옮김, 폴 오스터 원작, 폴 카라식 각색 / 미메시스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에는 유독 폴 오스터의 팬들이 많습니다(저는 그를 약간 늦게 알았지만). 물론 폴 오스터는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사랑 받는 작가였으며, 작년 그가 타계했을 때 소셜미디어 곳곳에 추모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이 그래픽 노블 버전을 보면(다소의 각색이 있습니다), 특히 (국적 불문하고) 도시 거주자들에게 왜 그가 컬트적 독해의 대상이었는지, 이런 포맷 안에서 이해가 더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픽 노블에 정말 잘 어울리는 게 그의 작품들이었음을 다시 확인하는데, 실제로 이 책(그래픽 노블 버전)도 미국에서는 이미 긴 세월 동안 독자들의 호응을 얻은 베스트셀러였더군요. 익히 알던 그의 뉴욕 트릴러지를 이렇게 한 권에 묶어 비주얼 포맷으로 새로 감상하는 게 저 같은 그의 팬들에게는 큰 선물이 되었습니다.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책에 실린 세 작품은 작화와 텍스트의 비율이 각각 다르며, 그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또 그림을 보면 스타일이 다 다른데 다른 작가들이 그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작가들의 솜씨이니 비율이 당연히 다르지 않겠냐고 되물을 수 있으나, 저는 편집자가 세심하게 고려하여 작품마다 최적의 작가라 여겨지는 이들에게 커미션을 맡겼으리라 개인적으로 추측합니다. 특히 저는 첫 작품 <유리의 도시>의 데이비드 마추켈리라는 분이 폴 오스터의 우수 어리고 고독한 세계에 그 스타일이 딱 맞다는 느낌이었는데, 편집진은 아마 다른 깊은 고려에서 트릴러지의 이후 두 작품은 타 작가들을 기용했겠죠. 여튼 좋았습니다.

"그 일은 잘못 걸려온 전화로부터 시작되었다(p9)." 너무나도 유명한 서두입니다. 사실 도시 생활에서 잘못 걸린 전화는 너무나도 큰 짜증을 유발하며, 이 고전에서처럼 기막힌 체험으로까지 유도되기란 힘들지만, 여튼 폴 오스터의 시대에는 일종의 낭만처럼 아주 제한적으로나마 받아들여지기도 했겠습니다. 폴 오스터라는 이름은 엉뚱한 맥락에서 카메오처럼 등장하여 웃음을 유발할까 싶기도 하겠지만, 결말까지 가면 혼돈과 충격에 빠지는 건 대니얼 퀸뿐이 아니라 우리 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p46에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 <아담과 이브>가 잠시 등장하는데 이 장면에서 아주 적절한 미장센이다 싶어 감탄이 나왔습니다. 피터 스틸먼의 대사들이 p21 이하에서 마치 담배 연기가 입에서 새어나오듯 말풍선이 처리되어 분위기를 탁월하게 표현합니다. 정작 담배를 피우는 건 폴 오스터 탐정님(?)이지만 말입니다. 또 퀸(이 이름도 의도적으로 선택되었겠죠)이 순간 버지니아의 알몸(p34)을 투시하는 것(물론 그의 상상)도 이런 그래픽 노블에서만 구현되는 멋진 센스입니다. p12를 보면 "도시를 걷는 건 언제나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다"라는 유명한 그의 문장이 나오는데 이걸 읽고 p109의 전체 컷을 한번 보십시오. 어떤 느낌이 드는지.

소설 서두(p16)에서 퀸은 필명 윌슨을 일종의 복화술사로 세팅한다며 허위의 부캐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또 그 편이 이 꽉 짜여진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인정받는 성실한 선택이라 확신하지만 내심 큰 회의를 느낍니다. p65를 보면 스틸먼은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태엽인형으로 그려지는데 여기서 퀸의 공감 내지 일체화는 최고치에 달합니다. 스틸먼과 퀸이 가까워지는 동안, 폴 오스터라는 허무인은 착오로(혹은 고의로) 무대에 끌려나와 탐정 노릇을 하던 걸 마치고, 느닷 액자 밖에서 전혀 별개의 실존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 결말의 처리가 소설의 주제를 새롭게 부각하는데, 도시의 파편화하고 익명화한 삶이 모든 걸 혼란과 의혹으로 몰아넣는다는 암시인 듯합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생각한다. 애초에 화이트라는 사람은 없었다.(p204)" 의뢰인 블랙을 위해 화이트를 찾아 오렌지 스트리트(p182)에서 분투하는 블루라는 사립 탐정은 p194에서 지미 로즈라는 걸인을 가장하여 블랙이란 자가 대체 뭘 노리는지 알아 보여 합니다. 걸인이 월트 휘트먼과 닮았다고 블랙이 말하는데, 대화 중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 너새니얼 호손에까지 이야기가 번지면서 블루는 이미 저 블랙이 모든 걸 꿰뚫어 보았다고 결론 내립니다. p223에서 블랙은 38구경리볼버를 들고 기괴한 가면을 쓴 채 블루를 겨누는데, 텍스트의 비율은 확 줄고 큰 컷의 비주얼로 작가는 독자에게 이 결정적인 순간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개인적으로 소설 원작과 가장 큰 이질감이 느껴진 게 <잠겨 있는 방>이었습니다. 피터 스틸먼(?)은 p365에서 허먼 멜빌을 자칭하는 취객에게 당신 팬쇼 아니냐며 당혹스러운 말건넴을 받습니다. 얀 미쇼도 p359에서 마찬가지였죠. 작가는 원작 소설의 내러티브보다 더 육감적이고 에로틱한 작화를 통해 캐릭터의 복잡한 심리를 전달합니다. 거대한 자연과 함께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갑자기 열린 여행가방 안이었고, 알고보니 건물 안 1층을 벗어나 본 적도 없었다니(p386) 도시의 고립된 삶이라는 게 이처럼 총체적인 인식의 붕괴로까지 이어진다는 게 섬뜩하지만, 그래도 폴 오스터의 세계에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담겨서 좋았습니다. 세 그래픽 작가들도 그 점을 너무나 잘 이해했고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2차 냉전 시대
제이슨 솅커 지음, 김문주 옮김 / 더페이지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어로 제2차 세계대전을 World War Two라고 부릅니다. 제이슨 솅커의 신저인 이 책은 원제가 Cold War Two인데, 말그대로 제2차 냉전이라는 뜻입니다. 20세기 중반 소련과 미국 사이의 다툼이 1차 냉전이었다면, 지금 서로 포화만 오가지 않을 뿐 살벌하게 서로를 노리는 중국과 미국 사이의 갈등을 2차 냉전이라 지칭할 수 있습니다. 제이슨 솅커뿐 아니라 누구라도, 무역 갈등으로 촉발된 이 시대구간을 그렇게 파악하는 데 동의할 텐데, 시대가 바뀌면 그에 임하는 적응 전략도 바뀌어야 합니다. 이 신저에서 우리 독자들도 그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88을 보면 중국의 미국 지우기 전략이라는 게 있습니다. 무기를 써서 미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게 아니라(아직은 그 정도가 되진 못합니다), 경제적으로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 적어도 중국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데 미국으로부터 공급선은 정리하거나 대체하겠다는 뜻입니다. 미국은 지금 이게 안 되어, 중국 공산품을 차단하니 미국 소매점 매대가 텅텅 비는 판입니다. 마치 (1차) 냉전 때 소련 식료품점이나 빵가게 앞에서 물건을 사려고 주민들이 길게 줄을 섰던 모습도 떠오르는데, 제조업 강국이 갖는 이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미국이 열위에 섰다는 게 차이일 뿐입니다.

미국도 중국을 공급망에서 제외시키려니 저런 난감한 점이 있어서 지금 단호하게 밀고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장 시민들의 일상용품을 종전처럼 싼 값에, 혹은 어느 정도라도 비슷하게 조달할 만큼 새로운 제조원을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980년대 미국에는 모든 종류의 생필품이 made in USA로 매대에 진열되었고 미국내를 떠나 그 남은 물량이 전세계를 덮었으니 이래서 미국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나왔던 것입니다. 40년 새 미국 공산품은 가격, 품질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잃고 세계 시장에서 사라졌으니 중국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밖에요. 이제는 딥시크의 성공 예에서 보듯 첨단 분야에서조차 중국 눈치를 봐야 합니다. 십 년 동안 이를 갈고 기술 분야에 투자한 중국인데 무슨 수로 견제하겠습니까.   

p64에는 바그너 그룹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러시아 역시 야무진 독재자 푸틴의 지도 하에 기력을 되찾아가며, 취약한 재래식 전력(소련 붕괴 후 상당량을 세계 시장에 내다팔았습니다)을 보완하기 위해 민간 회사인 바그너그룹을 적극 활용하는 등 민활한 모습을 보입니다. 다만 재작년에 세계가 지켜봤듯 그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푸틴과 갈등 끝에 죽었고 지금은 20대 후반인 그의 아들이 이끌고 있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중국은 15년 전부터 세계적 범위에서 자원 확보에 애썼습니다. 이 책에도 나오듯 콩고(브라자빌)에서는 중국이 확고하게 자원 생산처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그 거대한 잠재력을 빨아먹는 중이고(이 나라는 원래 영국 식민지였으며 인근의 더 큰 나라 민주콩고는 벨기에 식민지였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도 특히 2차전지 핵심 소재인 리튬에 대해서 중국이 역시 큰 지분을 갖습니다. 미국은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남미에 새로운 접근 수단을 강구하지만, 이미 단물 다 빨았다는 듯 중국은 리튬 아니라 나트륨을 이용하여 2차전지를 제조하는 신기술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저걸 액면 그대로 믿을 건 아니지만 여튼 이 분야에서 중국이 가장 앞서감은 분명하며, 한국은 이미 추월되었고 미국은 아예 손도 못 쓰는 판입니다.

p114를 보면 공급망 탈동조화 이야기가 나오는데 미국은 5년 전에서야 부랴부랴 인태 전략을 새로 구상하여 인도, 베트남 등으로 서플라이체인을 바꾸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당과 국가 수뇌부가 확고한 친중이며 주변의 기대보다 성장세가 신통치 못합니다. 1980년대 한국 흉내를 내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인도는 숙적 파키스탄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안보 위협을 당하며 며칠 전에도 프랑스제 라팔을 운용하다 상대방의 J-10C에 격추되어 큰 망신을 겪었는데, 문제는 파키스탄이 채용한 저 전투기가 중국산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뉴스가 알려지자 이집트가 전투기 도입선을 한국에서 중국으로 급히 바꾸었습니다. 중국의 성장은 이처럼 세계 곳곳에서 산업 전반에서 한국의 밥그릇을 치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p132를 보면 미국은 리쇼어링, 니어쇼어링, 프렌드쇼어링을 통해 종전의 실수를 만회하려 듭니다. 오프쇼어링은 1990년대 미국이 세계화를 시도하며 부가가치가 낮은 제조업은 해외에 하청을 주고 자국은 손쉬운 금융업이나 하이테크만 전념하려 했던 정책입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이 정책은 큰 실책이었음이 확인되었고, 제조업의 감퇴는 미국 내 일자리 감소뿐 아니라 유사시 국가 안보까지 위협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p186 이하에서 저자는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해 네 가지 시나리오를 전개하는데, 사실 트럼프도 시진핑도 바보가 아니므로 섣부른 전쟁, 즉 열전(hot war)를 벌인다든가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술과 경제에 야무지게 투자해야 미래가 있는 법인데, 당장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고 현재의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고, 국가 자원을 당대에 다 탕진하면 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저우에서 만난 순간들: 여행자의 스케치북
이병수 지음 / 성안당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 이병수 교수님은 GS건설에서 주된 경력을 쌓았고 중국 광저우 현지에 근무하며 이 지역과 각별한 정서적 연대를 맺으신 듯합니다. 건축사라는 직업도 기술적 능숙함, 수학이나 공학적 기법 외에 예술적 감각을 요하는데, 저자께서도 지금 이 책에서 잘 드러나듯 따스한 감성이 묻어나는 그림을 페이지마다 담았습니다. 본인이 직접 그린 작품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습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집 주변 그림지도를 그려와라, (미술 시간 외에) 건물이나 시설의 투시도, 입체도를 그려 보라고 시키는 게 관찰력과 공간감각을 키우려는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건축 쪽 일은 이런 스케치 능력과 조형물에 대한 날카로운 포착 센스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광둥성의 중심 광저우는 대만이나 필리핀과 별반 기후가 다를 바 없는, 같은 중국이라고는 해도 살벌한 겨울이 찾아오는 저 베이징이나 동북 3성하고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납니다. 같은 남쪽이라고 해도 그 쓰는 말이, 오어(吳語), 민남어(閩南語), 월어(粵語) 등이 서로 많이 다른데, 월어가 바로 광둥어입니다. 중국이 19세기, 20세기 전반 반(半)식민지 상태에 놓였을 때 이곳은 프랑스, 영국이 각축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p58을 보면 사몐다오(沙面島. 사면도) 일대가 소개되는데, 원래 여기가 섬이 아니라(섬 島 자가 붙었지만), 영, 불 양국이 강을 매립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주장(朱江. 주강)은 한국에서 과거 주장 강이라고 이름이 잘못 불리기도 했는데, 이 주강과 장강 일대는 베이징에서 거리가 워낙 멀다 보니 유럽 제국주의 세력이 마음놓고 활개를 쳤습니다. 저자의 설명대로 유럽 풍 건물들이 매우 많고, p64 이하에 성당 그림이 나오는데 이곳을 찾으면서 신앙심을 다졌다는 회고가 있습니다. 이 일대는 프랑스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체류민들도 프랑스계가 많았던 역사상의 이유입니다.

세계 최대의 모조품 시장... 약간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하는데, 여튼 가짜를 잘만드는 것도 그나름대로 재주인지 모르겠습니다. p76 이하에 짠시루(站西路. 참서로)가 소개되는데 여기가 그런 곳인가 모양입니다. 사람들의 평판은 전자제품이나 시계류보다는 의류, 가죽제품에 호평(?)이 나온다고 책에 쓰셨는데, 아무리 그럴싸해도 짝퉁을 몸에 두르는 것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다니는 게 나을 듯합니다. 제가 아는 동대문 의류상은 요즘 (가깝지도 않은) 광둥에 자주 들른다고 하는데 그게 이렇게 다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피파월드컵 축구경기 같은 걸 보면 피치사이드보드에 중국어 광고가 나오곤 합니다. 사실 세계에 중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비중국인 중에는) 그리 많지 않은데도 이렇게 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광고에서 많이 본 만달(萬達. 완다. Wanda)이라는 회사가 있는데, 광저우 지하철 6호선(한국은 서울쯤이나 되어야 6호선이 있는데 중국은 지방에도 예사로 6호선이니 그 크기를 실감합니다) 수위안역(蘇元站)에 위치한 완다광장이 p94에 소개됩니다. 저 역은 한국식으로는 "소원참"이라 읽히는데, 중국에서는 驛(역) 대신에 站(참. 중국어로는 4성 '잔'으로 읽음)이라는 말을 씁니다. 완다가 뭐하는 회사인지는 이 상징적인 45층 건물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p138에는 황포군관학교가 나오는데 우리 민족이 이족의 철제 하에 신음할 때 인재들이 이곳을 찾아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초대 교장이 장개석 총통이며 김원봉(金元鳳), 오성륜(吳成崙), 최원봉(崔元鳳) 등이 모두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운동가들입니다. 황포군관학교는 주장(朱江. 주강)과 바로 연결되어 해상 교통으로 광저우 도심과 바로 연결된다는 저자의 설명도 있습니다.

광저우와 반(反)외세, 반봉건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은 선입견과 달리, p132를 보면 廣州起義烈士陵園이 소개됩니다. 저자는 1927년에 일어났던 이 봉기에 대해 설명하며 "그들의 용기와 희생이 이 열사릉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며 감개어린 어조로 평가합니다. 일러스트에도 밀도 높은 공감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p189를 보면 廣州蘭圃가 소개되는데 蘭이라고 쓰는 건 한국식, 구 번자체입니다만 현지에서는 주로 兰이라고들 쓰겠죠. 특이하게, 중국인들도 이 글자만큼은 蘭이라고 갖춰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한국의 중국인 식당 간판들에서도 蘭은 좀 자주 보는 편입니다.

그림이 많아서 이해가 빠르고 저자의 중국 지리, 문화, 역사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책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만이 알고 있다
모리 바지루 지음, 김진환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같은 작가가 쓴, 장르가 모두 다른 다섯 편의 모음입니다. 그런데 앞 작품의 단서를 뒷 작품이 받고, 마지막 <사랑과 질병>에서는 앞 네 작품의 이런저런 큐들이 합류하기 때문에 독자의 마음이 뭔가 찡해집니다. 맨처음의 <아오카게 탐정의 현금 출납장>이 추리장르라서 저는 이후의 네 작품도 다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장르로 분리된 여러 다른 세계가 알고보니 하나의 가느다란 통로를 통해 만나는 걸 보고,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옆 칸의 평행우주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떠한 우리의 연(緣)이 만들어질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첫 작품은 두 번의 반전이 있습니다. oo oo치기가 두 번 쓰인 건데 한 번은 실제로, 한 번은 oo의 말을 통해서입니다. 연속으로 두 번이 쓰였다는 게, 장르의 규칙을 익히 아는 독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미도리하라 파의 비서 야쿠시지는 우리가 저 강남 번화가 어느 샵에 들르면 별개의 책상에 앉아 상황을 조용히 주시하는 정체 모를 아저씨 같은 인상이죠. 루리야는 공부를 못해서 그 부친으로부터 매우 심한 폭력을 당했다고 하는데, 그 역시도 공부에 열의가 없던 본인의 잘못이며 이렇게 범죄조직에 들어가라고 누가 등을 떠민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튼, 이 장르에서 oo이 크게 훼손되었다는 상황이 나오면 대뜸 저 트릭부터 떠오르는 게 당연합니다. 그건 그렇고, 아오카게 탐정은 간이 너무 큰 것 같습니다. 나중에 사정이 드러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러나요?

두번째, 청춘소설 <최고 반응!>은 제 개인적인 생각에 이 책 전체의 척추 같은 역할입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는 이미 사라진 "만담"이라는 분야로 고등학생들이 서바이벌 경연에 참여한다는 것도 크게 공감가지 않았고 아이들이 구사하는 사투리도 뭔가 어색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사기 하유라는 여고생, 명랑하고 당차지만 마음에 아픈 상처가 있고 고민도 많은 소녀한테 자꾸 정이 가서 저는 3, 4, 5번째 작품을 읽다가도 다시 여기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자기객관화도 잘 되어있고 현실적이며, 이런 유형이 잘못하면 피해의식 때문에 남들한테 되지도 않은 생떼를 쓰고 폐나 끼치기 쉬운데 그런 면도 전혀 없어서 대견했습니다. 나이도 어린데 말입니다.

p89, p149에는 아사기의 대사를 통해 "시공 경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시공 경찰이 대체 뭔지(p206) 저는 판타지 장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만약 이 작품집 네번째 엔트리로 판타지가 나오는 줄 알았으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을텐데 말입니다. 제가 가장 놀랐던 건 도바시 지히로가 p128에서 개그 대본을 까먹은 아사기를 도우면서 멋지게 상황을 넘어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모든 경연 참여는 아가시가 주도한 건데 정작 본인이 대사를 잊다니! 그러나 도바시도 그간 아사기와 호흡을 맞추며 많이 성장했고 이제는 주인의식도 있어서 필요할 때 제몫을 할 줄도 압니다. 주인공인 애들이 이렇게 커 가는 모습을 보는 게 어른 독자 입장에서 너무 흐뭇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니케 트로피입니더!"가 음성 지원되는 것 같습니다.

나츠메 양은 꽤나 미인인데, 아사기가 도바시를 처음 포섭(?)할 때 이 나츠메하고 도바시를 연결해 주겠다고 했던 바로 그 아이입니다. 얘가 왜 예쁜지는 세번째 작품 중에 이유가 나오며(p222), 네번째 작품에서는 스케일이 확 커져 계(界)를 초월한 처절한 싸움이 벌어집니다. 흡혈귀 아닌 흡골귀(吸骨鬼. p292)란 건 또 처음 들어 보는데, 갑자기 비서 하루사키와 아웅다웅하는 아오카게 탐정이 등장해서 독자들에게 웃음을 줍니다. 또, p278에 나오듯이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어느 영혼은 임시로 이름을 笑라고 짓는데, 이 "소"라는 글자는 주로 일본에서 입 구 변에 관(關)의 약자를 써 훈독으로 "さく(사쿠)"라 읽습니다(한국에서도 그 글자를 "[꽃이] 필 소"라고 따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영혼도 임시로 자기 이름을 "사키"라 부르는 건데, 독자는 나중에 이 영혼이 누구인지 비로소 알고 2편으로 다시 돌아가봐야 합니다.

다섯째 작품에서 저 첫번째 작품의 오나기 보스가 잠깐 등장하여 주인공 오토구로 나미를 무섭게 합니다. 아, 후유키 oo키(冬木 千秋)라고, 이름에 계절이 두 번 들어가는 특이한 이름이라는 말은 저 앞 p171에 나왔지만, 그때는 성이 나츠메[夏目. 하목]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그때 이미 설명이 나왔고, 인과 연이 서로 얽히고설켜 우주를 맺기에 이른다는 이야기가 마치 불교 설화를 보는 듯도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