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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에서 만난 순간들: 여행자의 스케치북
이병수 지음 / 성안당 / 2025년 4월
평점 :
저자 이병수 교수님은 GS건설에서 주된 경력을 쌓았고 중국 광저우 현지에 근무하며 이 지역과 각별한 정서적 연대를 맺으신 듯합니다. 건축사라는 직업도 기술적 능숙함, 수학이나 공학적 기법 외에 예술적 감각을 요하는데, 저자께서도 지금 이 책에서 잘 드러나듯 따스한 감성이 묻어나는 그림을 페이지마다 담았습니다. 본인이 직접 그린 작품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습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집 주변 그림지도를 그려와라, (미술 시간 외에) 건물이나 시설의 투시도, 입체도를 그려 보라고 시키는 게 관찰력과 공간감각을 키우려는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건축 쪽 일은 이런 스케치 능력과 조형물에 대한 날카로운 포착 센스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광둥성의 중심 광저우는 대만이나 필리핀과 별반 기후가 다를 바 없는, 같은 중국이라고는 해도 살벌한 겨울이 찾아오는 저 베이징이나 동북 3성하고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납니다. 같은 남쪽이라고 해도 그 쓰는 말이, 오어(吳語), 민남어(閩南語), 월어(粵語) 등이 서로 많이 다른데, 월어가 바로 광둥어입니다. 중국이 19세기, 20세기 전반 반(半)식민지 상태에 놓였을 때 이곳은 프랑스, 영국이 각축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p58을 보면 사몐다오(沙面島. 사면도) 일대가 소개되는데, 원래 여기가 섬이 아니라(섬 島 자가 붙었지만), 영, 불 양국이 강을 매립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주장(朱江. 주강)은 한국에서 과거 주장 강이라고 이름이 잘못 불리기도 했는데, 이 주강과 장강 일대는 베이징에서 거리가 워낙 멀다 보니 유럽 제국주의 세력이 마음놓고 활개를 쳤습니다. 저자의 설명대로 유럽 풍 건물들이 매우 많고, p64 이하에 성당 그림이 나오는데 이곳을 찾으면서 신앙심을 다졌다는 회고가 있습니다. 이 일대는 프랑스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체류민들도 프랑스계가 많았던 역사상의 이유입니다.
세계 최대의 모조품 시장... 약간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하는데, 여튼 가짜를 잘만드는 것도 그나름대로 재주인지 모르겠습니다. p76 이하에 짠시루(站西路. 참서로)가 소개되는데 여기가 그런 곳인가 모양입니다. 사람들의 평판은 전자제품이나 시계류보다는 의류, 가죽제품에 호평(?)이 나온다고 책에 쓰셨는데, 아무리 그럴싸해도 짝퉁을 몸에 두르는 것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다니는 게 나을 듯합니다. 제가 아는 동대문 의류상은 요즘 (가깝지도 않은) 광둥에 자주 들른다고 하는데 그게 이렇게 다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피파월드컵 축구경기 같은 걸 보면 피치사이드보드에 중국어 광고가 나오곤 합니다. 사실 세계에 중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비중국인 중에는) 그리 많지 않은데도 이렇게 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광고에서 많이 본 만달(萬達. 완다. Wanda)이라는 회사가 있는데, 광저우 지하철 6호선(한국은 서울쯤이나 되어야 6호선이 있는데 중국은 지방에도 예사로 6호선이니 그 크기를 실감합니다) 수위안역(蘇元站)에 위치한 완다광장이 p94에 소개됩니다. 저 역은 한국식으로는 "소원참"이라 읽히는데, 중국에서는 驛(역) 대신에 站(참. 중국어로는 4성 '잔'으로 읽음)이라는 말을 씁니다. 완다가 뭐하는 회사인지는 이 상징적인 45층 건물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p138에는 황포군관학교가 나오는데 우리 민족이 이족의 철제 하에 신음할 때 인재들이 이곳을 찾아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초대 교장이 장개석 총통이며 김원봉(金元鳳), 오성륜(吳成崙), 최원봉(崔元鳳) 등이 모두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운동가들입니다. 황포군관학교는 주장(朱江. 주강)과 바로 연결되어 해상 교통으로 광저우 도심과 바로 연결된다는 저자의 설명도 있습니다.
광저우와 반(反)외세, 반봉건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은 선입견과 달리, p132를 보면 廣州起義烈士陵園이 소개됩니다. 저자는 1927년에 일어났던 이 봉기에 대해 설명하며 "그들의 용기와 희생이 이 열사릉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며 감개어린 어조로 평가합니다. 일러스트에도 밀도 높은 공감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p189를 보면 廣州蘭圃가 소개되는데 蘭이라고 쓰는 건 한국식, 구 번자체입니다만 현지에서는 주로 兰이라고들 쓰겠죠. 특이하게, 중국인들도 이 글자만큼은 蘭이라고 갖춰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한국의 중국인 식당 간판들에서도 蘭은 좀 자주 보는 편입니다.
그림이 많아서 이해가 빠르고 저자의 중국 지리, 문화, 역사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