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스펙트 ㅣ 버티고 시리즈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8년 2월
평점 :
로버트
크레이스의 작품을 읽을 때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로스 맥도널드 상을
받았더랬지만, 로스 맥도널드보다 기교나 스타일, 진한 주제의식 면에서 오히려 그가 더 낫다." 반도체 집적 기술은 시간의 경과에
지수적으로(exponentially) 반응하여 발전하기 마련이지만, 문학의 깊이와 향취는 요즘 것이 옛 모범을 못 따라잡는 게
오히려 일반입니다. 허나 장르문학이라면 사정이 꼭 그렇지도 않은데, 어쩌면 로버트 크레이스는 고작 장르 작가였던(헉. 참고로
저는 맥도널드의 피조물 루 아처를 무척 즐겨 읽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충성스러운 독자입니다. 현재까지도) 그를 벌써부터 능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르의 펜스와 목줄을 넘어선 채 말입니다.
"그 아이는 신의 피조물이야."
릴랜드는
말버릇만 이런 게 아니라, 그 거친 직장에서 특정 업무를 관장하는 중년 사내치고는 참으로 뜻밖에도, 정말 신앙 같은 걸 갖고
있나 봅니다. 직장이 직장이다 보니 신이 어쩌구를 들먹거리면 조소의 대상이 되거나 리더십과 권위를 잃기 십상일 텐데, 메이스를
비롯 아무도 그를 함부로 못 봅니다. 경찰견, 군견을 다루는 영역에서 말 그대로 그는 "신"에 가깝기 때문이죠. 이 부서가 그리
높은 위상을 조직 안에서 점하지는 않는 듯합니다만(자신의 자조적 대사 중에 그 점이 암시되더군요), 여튼 그는 이 일에서 거의
"미국 최고 반열"입니다.
개의
후각에 대해서는 일반인들 사이에서조차 그 우수성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만, 로버트 크레이스의 냉철하면서도 사람 감성을
뚝뚝 누르고 찍는 듯한 문장을 통하니 새삼 경이롭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너희 허섭스레기 같은 인간들 열보다 낫다!" 릴랜드의
일갈이 아니라도, 이 작품에서 "해병" 매기의 맹활약과 품성과 "의리, 지조"를 보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넵! 말 안 해
주셔도 알겠습니다!" 매기는 잘 훈련된 군견으로서, 해병대에서 어느 특수 첨단 장비도 수행 못 할 일을 척척 해 낸 영웅입니다.
영화 <지 아이 제인>에 나온 데미 무어 저리가랍니다. 그뿐 아니라, "상관"과 동료들에게 무한대의 존중과 존경과
사랑을 받는 부하, 동료로서의 "그녀"입니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내내 3인칭 여성 대명사 she, her 등으로 가리켜집니다.
매기는
해병 중의 해병 피트와 거의 영혼의 동반자 관계였습니다. 아, 웃지 마시길. 여튼 로버트 크레이스의 절제되면서도 "미친" 필치
속에 그녀를 계속 만나다 보면 거의 종교적 경외감까지 생긴다니까요. 심각하고도 감동적인 사연(아무리 픽션이라도)이므로, 잘 알지도
못하고 경솔히 비웃음 날리면 반드시 벌 받습니다, 네. 이런 매기는 어느날 적군의 자살 테러로 피트를 잃고, 자신도 심각한
부상을 당하면서 심각한 PTSD에 빠집니다. 안타깝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신"의 경지인 릴랜드 생각(곧 신의 생각)으로,
한때 최고였던 매기는 더 이상 쓸모가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 조직과 인간들을 위해 적당한 방법으로 퇴장해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말입니다. 다름 아닌 릴랜드 같은 이가 이런 판단을 할 때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문외한인 우리 독자들도 눈치챌 수
있습니다.
매기는 피트를 잃었지만
스콧은 스테파니를 (비슷한 시점에) 잃었습니다. 스콧, 스테파니 둘 다 젊고 유능한, 장래가 촉망되는 경찰들이었습니다. 불가항력인
상황이었지만 스콧은 첫째 스테파니가 죽던 순간 자신이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고 오인했던 게 죽도록 괴롭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았으나 이미 그녀의 오해를 바로잡을 수는 없습니다. 스콧 자신도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자신만의 아픔에 시달리지만 무엇보다 그의
영혼을 짓누르는 건 죄의식과 설욕의 다짐입니다. 무엇으로든 만회를 해야 합니다.
매기
역시 피트 없이는 살 수 없는 영혼이었기에, 이런 스콧과 운명적 만남을 갖습니다. 이런 개가 흔히 그렇듯, 처음에는 낯선 스콧의
손을 물며 거리감을 유지하려 듭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어떤 해병이었는지 잘 아는 동료들은 너무도 마음이
아프기에 함부로 어떤 조치도 못 취합니다.
스콧
제임스 순경은 엄청난 피를 현장에서 흘리고, 파트너 스테파니처럼 죽음 직전까지 갔습니다만 경이로운 생명력으로 살아 났습니다.
마치 그에게는 명견 매기가 저때 현장에서 자신이 지켜 주지 못해 죽은 스테파니의 화신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영화 <존
윅>에서 주인공이 아내의 유일한 흔적처럼 개를 그처럼 싸고돌던 모습도 함께 연상됩니다. 후반부에는 은퇴한 경찰 멜론 씨를
찾아 스콧이 결정적 암시를 받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도 스콧은 자신의 주변 그 누구와건 끈끈하고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는
인물(아직 나이가 젊은데도요)임이 확인됩니다. 좋은 사람 곁에 좋은 사람만 모인다고, 멜론 씨도 더할 나위 없는 호인입니다.
p348에 멜론 씨 대사 중 매기가 공을 안 따라간다는 말을 듣고 "창피"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매기 같은 특별한 개의 취향을
미리 못 파악한 게 창피하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shame에 우리말로 "유감"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제 생각으로는 원문에 이런
의도로 해당 단어가 쓰인 게 아닌지..
아니, 상실한 누구(그녀가 비록 인간이라 해도)를 가름할 대용품으로 이 대단한
경찰견 매기가 그 자리에 놓였다고 하면, 스콧으로서는 엄청 화를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매기를 향한 그의 사랑과 의리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순수한 것이지 어떤 대체재 행위 같은 게 아니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몰라도 그는, 특히 작품 후반에 이르러서는, 분명
매기를 매기로서 좋아하기에 이른 게 맞습니다. 근거라면,... 달갑지 않은 낯선 형사들이 와서 뭘 꼬치꼬치 캐묻고 돌아갔으며,
조이스 카울리 형사나 버드레스 등이 그(스콧)에게 씌워질 듯한 불리한 혐의(후반부에 나옵니다) 때문에 마음 아파할 때도, 스콧은
대번에 "매기와 헤어질 일"만 걱정하는 게 첫 반응입니다. 지금 살인자로 몰려 모든 걸 잃기(이미 중징계 정직 처분이 내려졌기에
잃은 게 많습니다만) 직전인데도 말입니다.
스콧이건 조이스 카울리(아무래도 고독한 젊은 남성 주인공에게는 이런
냉철하고 매력적인 여자 형사가 곁에 작품 구조상 배치되어야 합니다. 스테파니는 이미 작품 초반에 죽었으니...)이건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는, 대체 그 끔찍한 총기 습격 사건이 누구에 의해 저질러졌는지 진상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공교롭게도 그 사건이 벌어진
지척에서 어느 일당(LA에 흔한 마약 중독 불량배들로 짐작되지만)이 이 사건을 목격했을 가능성이 큰데, 무슨 까닭인지 결정적
증인이나 단서 구실을 할 만한 이들이 죽어갑니다. 그리고 스콧에게 그 누명까지 덧씌워지니, 이 장편은 1) 명견 매기와의 우정
2) 경찰 습격 사건의 진범 추적 3) 제3의 음모, 셋업 등 세 줄기 사연이 촘촘히 직조되는 모양새입니다. 로버트 크레이스의
작품들이 언제나 그렇듯 미스테리로서 높은 완성도 못지 않게, 식지 않은 가슴을 지닌 독자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반드시 깔려 있습니다. 스콧과 매기의 활약을 보며, 우리 독자들도 저 똑똑하고 예쁜 매기가 우리를 무슨 수상쩍인
국외자(suspect)가 아닌, "팩(무리. pack. 이 작품의 핵심 주제어 중 하나죠)"으로 봐 줬으면 하는 동감 동참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