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의 연구 - 일본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하여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박용민 옮김 / 헤이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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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인들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일본인이 과연 누구이며 그들 자신이 의식하는 약점이 무엇인지를 치밀히 파고들어간 "일본론"의 고전으로까지 정평이 난 필독서로 꼽히는 명저입니다. 마치 <국화와 칼>이나,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처럼, 혹은 한국의 이어령 선생이 쓴 화제작 <축소 지향의... >처럼, 예리하고도 흥미롭게 민족성의 감춰진 이면을 파헤치지만, 그 고전들과는 또 달리 일본인 스스로가 자신들의 인습과 기질에 대한 냉소적 반성을 드러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저자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이미 고인이 된 분이지만, 이 책은 마치 최근에 쓰이기라도 한 듯 현대적 풍취를 물씬 풍깁니다. 아니, 어쩌면 작금에 출판되는 흔한 시사물보다 훨씬 현대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한국인들(널리 이웃 여러 나라 포함)이 늘 아쉽게, 혹은 개탄스럽게 여기곤 하는, 완고하고 시대에 뒤처진 그들 자신의 바람직하지 못한 개성에 대해, 저자는 편협한 우익 세력을 전혀 의식 않는다는 듯 자유롭고 발랄한 비판을 퍼붓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 열거한 책들과는 조금 달리, 역자께서도 지적하지만 이 책은 저자의 독특한 인문적 상상이 발랄히 개진되었다는 점에서 돋보입니다. 위의 인문서들은 심각하면서도 본격적인 문화인류학적 시야가 책 전편을 관통하고 시야도 비교적 넓게 전개됩니다만, 이 책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크게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합니다.

1) 주제는 "일본 사회의 의사 결정에 있어, 왜 개인의 자유로운 비판은 그 입지가 좁아지고, 실체조차 모호한 '공기(空氣)' 따위가 좌우하는가?"라는 한정된 의문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2) 그뿐 아니라, 저자가 습득한 서양 고전어 지식이나 세계관의 적용이 매우 유머러스한데, 이는 오히려 프랑스 철학자들의 저서 중 일류의 것들에서 부분적으로 목격되는 스타일입니다. 특히 2)의 경우, 다름 아닌 일본인의 눈으로 바라본 치부와 후진적인 면모에 대한 자성론이라는 취지와 맞물려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저자의 여유와 품격 그 방증입니다.

이 책은 비교적 저술 당시의 일본 사회 분위기가 잘 드러나는, 시사적인 성격도 유지하는 편입니다. 예컨대 당시 일본 수상(내각총리대신)이었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중국과 수교 실무 협상을 추진했을 때의 여러 에피소드라든가, 자동차 산업의 환경 오염 물질 규제 추진 등에 얽힌 잡음과 촌극 같은 게 예화로 인용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어쩌면 반중(反中) 노선을 표방하는 듯하다가도 외교의 큰 기조를 유지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거나, 유독 미국에만 저자세로 일관하는 그들의 최근의 외교 기조가 노출하는 약점이, 이 책에서도 (시대의 배경과 구체적 예증만 바뀐 채) 그대로 비판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민족성이라는 게 그리 쉽게 바뀌는 체질이겠습니까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보면 이른바 대심문관의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둘째 이반이 막내 알료샤를 설득하기 위해 창작하는 엽편 포맷으로 등장하는 이 풍자화는 너무도 유명하죠. 이 책에서는 그를 의식한 듯 우스꽝스럽게도 대심문관과 "자동차"와의 가상 대화를 통해, 문제가 생겼다 하면 대상을 타물, 객체화하여 다수의 의견에 편승한 후 사정 없이 타매하는 일본 특유의 사회 분위기를 신랄히 비꼬고 있습니다. 그들 말로 "공기"라고 불리는 대세가 일단 어느 방향으로 정해지기만 하면, 종전에 내세우던 당위론이나 원칙, 도덕 따위는 일단 실종된 채 "이중 기준(double standard)"가 활개를 치며 폭주하는 행태입니다.

논리나 원칙보다 중요한 건 "임재감"입니다. 특히 이 책에서 독자의 웃음을 크게 유발하는 대목은 "현인신과 진화론"을 두고 저자가 해학적으로 풀어주는 일본 의식 구조의 치명적인 모순입니다. 사색을 중시하고 세계관의 논리적 정합성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라면, 예컨대 신이 삼라만상을 일거에 창조했다는 관점과, 인간이 원숭이와 조상을 같이한다는 진화론이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둘 중 하나는 조화로운 사유의 체계에서 반드시 도태되어야 하며, 이 때문에 미국에서도 이른바 "원숭이 재판"처럼 떠들썩한 소동과 갈등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 책은 "바이블 벨트가 미국을 장악했다" 같은 시사적 언급이 나와서 저 개인적으로 아주 잠시나마 그 배경이 1990년대인 줄 착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이 실제 쓰여진 1970년대와 차이가 있다면, 이 시절은 지미 카터 같은 (근본주의자이긴 하나 특이하게도 리버럴인) 인물이 부각되기도 하던 분위기였으나,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초라면 이른바 "네오콘"으로 불리던 초 강경 보수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대라는 정도겠습니다. 참고로 이 책의 저자는 1991년에 타계했습니다. 이 책에는 미국 속어 "펀디"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마치 우리말의 "빨갱이"를 미국인들이 "코미"라고 하듯, 근본주의자를 멸시하여 부르는 일종의 속어입니다.

아무튼 다시 초월적 세계관과 현세를 포섭하는 논리 사이의 조화 이슈로 돌아가서, 저자는 일본인이라면 "진화론"을 배우고 수용하는 데 아무런 심적 갈등이 없으리라는 (누구나 동의할 만한) 점을 우스꽝스럽게 지적합니다. 아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의 섭리를 옹호하는 사회에서도 "원숭이 이야기"가 연상하는 불경스러움을 그토록 타매하고 이단시했건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지상에서 인민을 다스리는 현인신"을 모시는 국가에서 대대적인 탄압과 검거 선풍이 일어나지 않는다니 어찌 기괴한 결과가 아니겠냐는 겁니다.

저자는 "이 모두가 그저 '공기'에 의해 사실 당부를 결정하고 마는 풍토"에서 그 답을 찾습니다. 허나 독자인 제가 생각하기로는 소위 현인신론이건 진화론이건 그 속에 담긴 논리와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지도 않은(못한) 채, 그저 주변에서 대세라고 믿는다 싶으면 마치 수천 년 전부터 의심 없는 진리로 숭배나 해 온 듯 생각 없이 추종하는 미개한 생리가 진짜 주범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세, "공기"가 그렇다는데 논리적 충돌이나 모순 따위가 다 뭐란 말입니까?

이는 한국이라고 조금도 다를 바 없어서, 소위 창조과학이란 수상쩍은 입장과 (이상하게 상업적으로 변질된) 진화론 진영에 가담하여 저질스러운 논쟁을 벌이는 자들이 기실 자신이 옹호한다고 떠드는 주의주장에 대해 손톱만큼의 소양도 갖추지 못하고 폭주하는 꼴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뭘 알아서 목청을 높이는 게 아니라, 자기 딴에는 그게 대세라고 여겨 열성으로 가담하면 (없던) 사회적 권력과 자존감이 절로 생긴다고 착각하는 천박하고 저능한 심리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저자는 "정말로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건 일관된 원칙이 아니라 '임재감'이란 말을 책 곳곳에서 반복합니다. 대세가 그리 결정되었으면 앞뒤 안 돌보고 진행하는 맹목이 이미 주인으로 행세한다는 뜻입니다. 임재감이나 "공기"나 비슷한 뜻인데, 마치 "외국어를 모르면 자국어도 모르는 사람"이란 괴테의 명언을 실증이라도 하듯, 저자는 이 "공기"란 단어를 pneuma(헬라어), ruach(히브리어), air(영어) 등 다양한 외국어로 시범적 번역을 행합니다. atmosphere도 그 자리에 넣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는데, 일단 대세가 결정되면 사람들이 종전 자신의 소신과 입장까지도 까맣게 잊고 무슨 대단한 각성이나 한 듯 군중심리에 이끌린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생리와도 유사한 구석이 많습니다. 남경 대학살 등에서 드러난 잔혹한 행태도 이로써 설명되는 부분이 크겠죠.

저자가 예로 드는 역사적 에피소드 중 야마토 군함 사건이 있는데, 무모한 조치인 줄 뻔히 알면서도 돌격을 감행하여 무고한 사상자를 대량으로 발생시킨 개탄스러운 일이라면, 2차 대전 당시 무다구치 렌야 같은 어리석은 사령관이라든가, 이보다 훨씬 전 노기 마레스케가 러일전쟁에서 명령한 인해전술 같은 게 있겠습니다. 특히 후자 노기 대장 같은 사람은 그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에 무관하게 일본에서는 충성의 화신으로 평가 받는데, 이 역시 사리를 구체적으로 따지지 않고 "공기"에 따라 당부가 결정되는 일본 사회의 후진성을 잘 드러낸다 하겠습니다.

일단 공기가 결정되면 마치 <1984>의 전체주의 체제처럼, 명백한 과거도 의식적 조작과 왜곡에 의해 소급적으로 변경되는 기만적 작태가 횡행한다는 게 또 특이합니다. 저자는 일본 사회에서 어느날 공산주의 혁명(1970년대니까 이런 가정이 있을 법합니다)이 성공한다 해도, 공기가 그리 결정되면 사람들은 아무 갈등 없이 이를 대세로 수용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덴노" 역시, 아득한 예전부터 공산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며 정작 그 개인의 의사는 완전히 무시된 채 정체성이 재 규정될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일본 덴노 가문은 오랜 시간 동안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러 왔는데(그 가문뿐 아니라 전통 일본의 풍습이 그렇습니다만) 어느날 집정자에 의해 불교 의식이 하루아침에 금압된 후에는 가문의 의례조차 자기 재량으로 거행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거죠. 현인신은커녕, 공기가 한번 정해지면 과거사까지도 왜곡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으며, 누가 과연 진정한 일본의 통치자인지 여실히 입증하는 통쾌한 지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역자분의 방대한 주석 역시 본문 못지 않게 풍성한 내용을 담았다는 게 또하나의 장점입니다. 역자가 인용한 참고 문헌들도, 저자 자신이 본문에 자신의 소양으로 녹아낸 만큼이나 범위가 방대한데, 한국의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의 한 아티클이라든가, 저명한 인문학자의 저서에까지 그 시선이 두루 미쳐서 독자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헤브라이즘이 마치 서유럽 사상의 한 줄기나 되는 양 저자는 본류에 포함시켜 논의를 전개한다고 하시는데, 이 저자뿐 아니라 어느 진지한 서유럽의 철학자, 문학가, 인문학자들도, "기독교"라는 필터를 통해 유럽에 스민 헤브라이즘을 헬레니즘과 함께 대등한 사상의 양대 기둥으로 인정합니다. 역자는 왜 일본인들이 자아상을 파악할 때 서양인의 거울만 의식하는지 불만을 토로하시지만, 자신과 선명히 대조되는 타인의 개성을 주된 논거로 삼는 태도나 방법론은 효과도 클 뿐 아니라 상식에 비추어 타당하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그들이 탈아입구 강박에 젖든 말든 그들의 자유이며, 이 책 같은 데서 초점을 두는 건 그들의 단점이지 (은근 남들이 독특한 개성으로 봐 줬으면 하는 미숙하고 유치한 심리가 끼든 말든) 장점이 아닙니다. 장점도 아닌 단점을 우리와 공유한다는데 하필 그럴 때만 저들이 이웃인 우리를 주시한다손 쳐도 또 그게 무슨 뿌듯한 체험이겠습니까?

Basileia tou Theou를 두고 저자 야마모토 씨는 "새로운 신적 체제"라고 옮깁니다. 책에는 라틴 문자(로마자)로 표기되었으나 원어는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인데, 소문자가 아니라 (정관사 등을 빼고) 단어들이 대문자로 시작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공기"라는 기괴한 신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이성과 논리와 건전한 토의, 소통에 의해 질서가 형성되는 인간적 사회의 건설을 지향해야 함은, 비단 일본뿐 아니라우리 모두가 유념해야 할 중대한 가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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