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제션 - 그녀의 립스틱
사라 플래너리 머피 지음, 이지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사자(死者)와 생전에 못다 이룬 소통을 이어가고 싶어하는 마음은,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에게 당연히 들게 마련입니다. 그 상대가 부모, 자식일 수도 있고, 연인 혹은 배우자일 수도 있으며, 평생의 지기 혹은 (뜻밖에도) 잠시 자신을 스쳐지나간 타인일 수도 있습니다. 미처 마치지 못한 감정의 청산, 그 폭과 깊이는 반드시 대면한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고 세상을 뜬 이에 대해, 미진한 어떤 감정의 잔여를 해소하려는 충동과 욕구, 바람을 계속 가진 다는 건 대개 어리석은 미련 이상으로 취급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또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공인되다시피한 의식(儀式)을 통해, 망자(亡者), 혹은 남아 있는 자의 한을 풀어 주려는 모습은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발견됩니다. 한국에서는 글쎄요 굿판이 그 기능을 어느 정도 수행하고, 서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망인보다는 유가족 등의 감정 해소, 승화에 보다 초점을 두더군요.

이 소설 첫 몇 페이지를 넘기며 제게 대뜸 생각났던 건 캐서린 제타존스와 가이 피어스 주연의 영화 <데스 디파잉 액트>입니다. 이 영화에는 "영매"를 직업으로 삼는 메리란 여인과 그 어린 딸이 나오는데, 능숙한 몸짓과 언변, 뛰어난 미모로 대중을 사로잡는 전문가이지만 그 실체는 사기꾼입니다. 사기꾼이 아닐 수 없는 게, 세상에 어떻게 그런 재주가 가능하겠습니까. <사랑과 영혼> 같은 유치한 상업 로맨스와는 달리, 이 영화는 초현실이나 영계와의 접속이 엄연히 불가능함을 전제로 삼은 후 대중에게 생의 더 깊숙하고 진득한 면을 보여 주게 하려는 보다 성숙한 연출과 주제의식이 돋보였죠.

그 영화에서는 두 가지 직업이 나오는데, 하나는 마술사고 다른 하나는 앞서 말했듯 영매입니다. 전자건 후자건 눈속임과 총체적 기만 행위에 기반하는 건 똑같으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사회와 대중은 이런 행위를 "직업"으로서 공인합니다. 뻔히 알면서도 돈까지 내어가며 속는 이런 무익한 세레모니를 용인하는 이유는, 그런 헛수고라도 걸쳐야 우리의 아픈 마음과 감정이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 속에서 영매 행위는 더 이상 사기가 아니고, "로터스"라는 모종의 약물 복용을 수단으로,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의 직업 노동자들이 "죽은 이의 혼"을 자기 몸에 모신다는 설정이 나옵니다. 물론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픽션 속 상황이지만, 유럽에서는 이처럼 죽은 자와 교감한다는 일종의 샤먼을 통해 신비한 영적 교감을 이루는 행위, 의식을 mediumistic channeling이라 하여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풍습의 일환으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다며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는 층이 절대 다수이지만 말입니다. 여기서는 레나드 여사라는 사업주가, "바디"라고 불리는 직원을 다수 고용하여 고객을 유료 접대하고 영업처럼 일을 이어갑니다.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이는 일종의 매춘에 대한 은유입니다. 소설 속에서 "바디"들은 몸이 훤히 비치는 "유니폼"을 입고 업무에 종사하며, 로터스를 복용하고 죽은 자의 영을 모시고는(이걸 이 한국어판에서는 "점유"라고 번역했습니다. 말 그대로 "빙의, 포제션"입니다) 고객과 소통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당연하지만 포제스된(possessed) 동안에는 내 몸은 물론 내 정신도 내 것이 아닙니다. 매춘까지는 아니라도 사람들은 때로, 돈을 지불한 고객에게 자연스럽지 못한 감정을 자아내어 가며 일에 몰입해야 하는데, 이를 두고 이른바 "감정 노동의 고초"라 규정하는 것도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입니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바디들의 고충", 채 1년을 못 버티고 직장("엘리시움 소사이어티")를 나와야 하는 풍속도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소설 중반 이후에는, 레나드 부인과의 고용 계약 조건을 어기고 아예 "2차(한국식 속어로 표현하자면 말입니다)"를 뛰는 바디들의 행태도 언급이 되니 말입니다.

바디들에 대한 사회적 처우도 열악한 편입니다. 어떤 고객은 대놓고 깔보는 투로 "당신이 받는 얼마 안 되는 급여 세 배를 지급하겠다"며 자신의 요구를 말합니다. 물론 나쁜 의도는 아니었으나, 그 무례한 매너 속에 이 직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충분히 반영된 겁니다. 레나드 부인은 동요하는 유리디스(=에디)에게 "영웅이 되어 보겠다며 경찰을 찾아가고 법정에 서 봐야, 당신 같은 계급의 증언을 누가 무게 있게 들어 줄 가능성도 높지 않다"고 합니다. "어떤 손님들은 정해진 바디만 계속 찾죠." 창녀에의 개념 환기가 어렵지 않게 이뤄지는 대목입니다.

책 표지에 "그 남자의 죽은 부인이 되어 사랑을...." 같은 문구가 있기 때문에, 혹 그 흔하고 흔한 "탤런티드 리플리 모티프" + "신분 상승 욕구에 눈이 먼 밑바닥 여성의 사기 결혼담" 정도로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는 않은데, 소설 속에 줄곧 서술되는 1인칭 주인공 에디의 심리나 행동이 그런 면을 연상도 시킵니다. 결론을 말하면 스포일링이라서 조심스럽습니다만, 에디는 흔히 보는 소셜 클라이머 형은 아닙니다(단언컨대요). 그러나 변호사 패트릭(잘생기고 돈 많다는 건 알았으나 구체적 직업은 p120에서야 처음 밝혀지더군요)의 죽은 부인 실비아의 빈 자리를 자꾸만 자신이 차지하려 들고, 패트릭의 회사에서는 물론 문제의 지인들 헨리 부부에게조차 자신을 "실비아"로 인식시키려는 거동에서, 우리는 이 아슬아슬한 주인공에게 어느 정도까지 신뢰를 줘야 할지 갈등하게 됩니다.

아니, 에디는 믿을 수 있는 영혼 맞습니다. 에디가 OO에게 협박까지 해 가며 로터스를 팔라고 했을 때, OO는 "이 바닥에서 이처럼 오래 버틴다는 자체가, 성실하고 도덕적인 인간성을 보여 준다고 여겼기에, 에디를 잃지 않기 위해" 처음에는 거절하고, 다음에는 OO까지 합니다. 무슨 직업이든, 한 자리를 오래 지키고 단골도 확보하며 고용주에게 깊은 신임을 얻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이런 그녀를 언니처럼 스승처럼 따르는 도라, 왠지 자꾸 의지하려 드는 리 등의 태도를 봐도 에디는 좋은 사람 맞습니다. 일종의 서술 트릭에 의해, 우리는 저 변호사 패트릭이 가공할 만한 이중 인격자, 요즘 특정 장르물에서 흔히 보는 싸이코패스가 아닌지 처음부터 의심하면서 책을 읽게 됩니다. p210에서 패트릭은 누가 죽은 아내를 불러낼까 걱정하는 대목까지 나오니 더하죠. 착한 여자가 악질 프레데터한테 걸려 몸 뺏기고 마음 망치고 마침내 살해되거나 하는 패턴을 너무 자주 봐 와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건 영리한 작가의 페이크 모션이었으니... (더 이상은 언급 않겠습니다)

(스포일러)
악당은 전혀 생각지도 않던 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독자는 일견 멀쩡해 보였던 에디의 과거에 꽤나 지독한 무엇이 그녀를 "포제스"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 소설은 흔한 통속적 일반화로 주체성의 회복 따위를 메시지로 전달한다기보다(그런 범주에 안 들어갈 작품이 또 몇이나 되겠습니까?), 원치 않고 인정하기 싫은 자아를 애써 부인하며, 타인의 시선이 만든 외형, 내가 원하는(혹은 착각하는) 자아상, 그리고 가장 외면하고 싶은 자신의 약점 사이에서 고민, 방황하는 우리 모두의 발버둥을 하나의 우화로 포착한 것입니다.

에디는 욕실에서 거울을 보며, 혹은 수면 아래의 나신을 보며, 저건 다른 누구라고 해도 믿을 타인임을 느끼기도 하고, 형편없이 왜곡된 상을 보고 몸서리를 치기도 합니다. 주체성을 찾는 노력이 아니라, 너무나도 잘 아는 자신의 추함을 잊기 위해, 억지로 남의 탈 속으로까지 도피처를 찾는 몸부림입니다. "바디"는 무엇보다 나 아닌 남이 되는 직업이기에, 자신이 너무도 싫었던 에디는 이 직업을 천분으로 삼아 그토록 오래 수행할 수 있었던 거죠.

소설은 인간 본성의 이기적이고 기만적인 면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을 곳곳에서 보여 줍니다. p207에서 캄캄한 이목구비를 한 레나드 부인에 대한 묘사는, 사회에서 돈벌이와 권력 행사를 위한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성공한 중년들에게, "진짜 자아"란 일찍부터 휘발되었음을 풍자하는 대목입니다. "그 모든 게 다 연기"라며 애나는 진즉부터 레나드 부인의 실체를 에디에게 고발합니다. p226 애나가 에디에게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죽은 거에 가까운 상태로 내려오기"를 강요한다면 맹 비난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스포일러 주의!) 에디는 고향을 떠나올 때 극심한 자기 혐오로 이미 "죽은 상태"였던 겁니다. (그러니 아무 영이나 그 몸에 내려앉고 점유하죠)

여기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캐릭터는 그 형사입니다. 사실 그는 일 때문만에 엘리시움 12호실에 온 게 아니라, 자신의 죽은 딸과 만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던 거죠. "사람들은 동정하는 척하면서 추한 호기심을 만족하려는 거에요."(p221). 형사는 에디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두번째 기회는 없을 수도 있다"며 경고하는데, 이미 그는 에디가 껍데기만 남은 "바디"였음을 형사 특유의 직감으로 알아차렸던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