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사기 - 우석훈의 국가발 사기 감시 프로젝트
우석훈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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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일찍이 국가를 일러 "인륜(人倫)의 최고 형태"라고까지 철학적 지위를 부여한 적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 고립하여 생존할 수 없기에, 군집을 이루고 각자의 몫을 배분 받으며 사회가 긍인하는 방식의 틀 안에서 자아 실현의 꿈도 허용될 뿐입니다. 사회와 질서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일 개체의 존속도 보장될 수 없기에, 우리는 어느 집단에건 소속과 정체성을 의존하기 마련이며, 그 최종의 보루가 바로 국가라는 대집단입니다. 헌데, 이 국가가 선량한 시민(혹은 국민)에게 저열한 속임수나 부리고 있다면, 공조직에 여태 전적인 신뢰를 부여하고 살아 온 우리들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박사가 쓴 이 책은, 하다못해 자잘한 생필품의 가격 책정이라든가, 기후와 환경 오염, 재정 정책, 내집 마련 에의 희망, 일자리 창출, 외교, 국방, 교육, 주식 투자 등 거의 시민 생활의 전 분야에 걸쳐, 국가가 어떻게 국민을 속이고 극히 일부 계층의 편익만을 위한 "조직적 사기"를 전개했는지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저자는 스스로 자신의 이번 책을 "국가의 거짓말을 폭로한 최초의 사회경제학 보고서"라고 평가합니다. 저자의 그런 평가에 얼마나 수긍하고 동조하며 마침내 결연한 행동에까지 독자가 이르게 될지는, 각자가 주의 깊게 텍스트를 살피며 치열한 사유를 일궈 낸 후에 판단할 일이겠습니다.

저자는 제1장에서, 일상의 사소한 과정 속에서까지 시민이 기업과 체제에 속으며 코 묻은 돈을 뜯기는, 의롭지 못한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고발합니다. 경제학자답게 저자는, 노벨 상도 일찌감치 받은, 시카고 학파(책을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저자와 이 학파의 성향이란 극과 극으로 다르죠)의 유명한 멤버인 개리 베커 교수의 경제학 만능론을 인용하며 화두를 꺼냅니다. "세상의 대부분 범죄는 금전으로부터 시작하고, 치정 (범죄) 역시 금전에서 비롯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 같은데 저자가 구태여 이 말로 논의를 시작한 건, 본인도 경제학자이면서 "세상에는 경제 논리로 설명 안 되는 게 얼마든지 있음을 제발 좀 인정하자"는 말을 꺼내고 싶어서인 듯합니다. 음, 그 역시 옳은 말씀입니다.

경제논리로 모든 현상에 접근하면, 때로 중대한 오류를 범하거나, 인간으로서 최상위에 놓아야 할 가치를 훼손하거나, 아예 문제의 본말이 뒤집혀 극심한 혼란, 무질서까지 초래할 수 있습니다. 대형 마트에 걸린 플래카드의 현란한 문구도 믿을 수 없으며, TV 지상파에서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우수성도 언제 그 정반대의 사례가 밝혀져 신뢰가 붕괴할지 모릅니다. 저자는 경제학자답게(?) 2008년의 경제 위기 도래 직전 주식을 모두 팔고 폭락을 피했으며, 강남에 집값 오를 타이밍을 용케 맞혀 제법 큰 차익을 얻었습니다. 주위에서 비결을 묻습니다. 그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자신도 운과 요행에 상당수 기대어 그런 결과가 나온 줄 자인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어 본 사람도 "이렇게 하면 되더라" 식으로 확언, 자신을 못 하는데, 시중에 범람하는 그 많은 광고는 과연 얼마나 논거를 갖고 사람을 현혹하는 걸까요? 광고에 안 속는 게 똑똑한 시민 되기의 첫걸음임을 저자는 쉽고 친근한 말투로 독자에게 설득합니다.


1980년대 후반 들어 국가는 국민들더러 주식 사라고 부추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빚까지 내어 주식에 투자하기도 했는데, 마냥 오를 것같이만 보이던 증시 상황은 1990년대 초반 들어 몇 번이나 폭락을 거듭했습니다. 분노한 투자자 일부는 정부종합청사나 증권거래소 앞에 몰려가 정부의 해명과 대책 마련도 촉구했습니다. 저자는 한국의 증시, 나아가 세계 어느 나라의 주식시장 메커니즘도, 기본적으로 기관과 큰손, 내부자라는 갑(甲) 앞에 개미라는 을(乙)이 호구처럼 뜯어먹힐 수밖에 없는 구조임을 통렬히 지적합니다. 물론 운이 좋아 대박을 칠 수도 있습니다만, 한 번의 운수를 믿고 카지노에 상주하던 어리석은 도박꾼이 이내 업소의 술수, 애초에 불리하게 정해진 승률의 술수에 놀아나며 개털이 되고 마는 이치와 같다고 주장합니다. 지질 게 빤한 게임에 왜 참여하냐는 겁니다.

2008년 들어 보수 진영에 정권이 넘어간 후, 언제부터인가 "경제를 살립시다" 같은 구호가 난무하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10년 전을 회고합니다. 너도나도 경제 지상주의를 거론하며 당장이라도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듯 떠들었지만, 결국 재미를 본 건 시대착오적인 소수 토건족 말고 누가 있었느냐는 게 저자의 신랄한 지적입니다. 이런 부도덕한 일부 사업가와 결탁한 게 (소수이긴 해도) 정직하지 못한 공무원들인데, 이 책 제목 "국가의 사기"는 지금부터 본문과 본격적으로 연계를 맺으며 우리 나라의 공적 섹터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지목합니다. 저자는 "나도 한때 공무에 몸 담았지만..." 같은 말로, 어디까지나 직접 경험한 바에 의해 논의를 전개함을 다시 강조합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유명한 문학작품(이자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고위 공무원이자 타락한 사업가였던 코마로프스키의 예를 들며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는 지위를 이용해(요즘의 어느 시사 사건과도 잘 통하는군요) 여인을 겁탈하고, 부패한 제정 러시아 체제에서 쏠쏠한 금전적 이득을 챙기는 짐승 같은 인간입니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약삭빠른 판단과 처신으로 다시 공산당 간부직을 차지하며 또다시 부정한 이익을 추구합니다. 저자는 바로 이 코마로프스키 같은, 영혼 없는 공무원들이 한국에도 고위직 곳곳에 포진하여, 국민의 세금을 좀먹고 행정의 효율과 본의를 흐리는 암초 노릇을 한다고 지적합니다.

한국에는 정보를 조작하고 여론을 호도하는 이른바 "물 브라더스"가 있다고 합니다. 수도 시설은 본디 정부나 공공 섹터가 오로지 국민의 이익만을 위해 엄정히 관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2001년 수도법이 개정되어 지자체로부터 민간 업체로 업무를 위탁할 수 있게 제도가 바뀌었다고 합니다(p179). 이렇게 함으로써 결과는 엉뚱하게 오히려 수자원공사의 권한만 비대하게 불린 셈인데, 이 공고한 클랜은 현재 누구도 깰 생각을 못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사실이라면 정말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네요. 한국에서 보통 홍수가 일어나면, 이게 댐 같은 게 부족해서가 아니라 빗물 펌프의 부적절한 운용이나 양적 부족에 기인한다는 게 저자의 관점인데, 이런 사실을 가능하면 호도, 은폐하려는 게 "물 브라더스"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 역시 큰 관점에서 "국가의 사기"입니다.


과연 이과형/문과형 인간이 날때부터 따로 존재할까요? 반은 농담조로 저자는 이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표시합니다. 과거 우수 과학 인재를 느닷 최고권력자(독재자)가 모셔와서는 국책 기관이나 대학에 "꽂아" 주던 풍조가 있었는데, 이를 두고 나이 든 축에서는 "박정희 노스탤지어"를 품기도 한다며 저자는 조소를 머금습니다("유신 사무관" 이야기도 곁들이면서요). "과학기술의 공익성"에 대해, 저자는 국가 예산 투입해서 수출 기업 지원하던 정책(지금 이러면 큰일나죠)을 용도 전환만 했을 뿐 근본적으로 다른 게 뭐냐면서, 모두가 국가 섹터에 의해 어용으로 조작된 "신화"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통박합니다.

저자가 부르짖으며 경각을 촉구하는 바는 저 "위선의 왕국"입니다. 연구 성과나 효용도 불확실한 프로젝트를 암암리에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서로 부실과 비위를 눈감아 줘 가며 예산을 빼 먹는, 거대한 카르텔이 학계에 존재한다고 폭로합니다. 국민 중 대부분은 "과학 기술 예산? 어련히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잘 쓰일까. 난 모르긴 해도 함부로 폄하할 건 아니고 응원이나 보내줘아지."처럼, 의심 않고 믿어버리는 철벽의 성역이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예산은 우리만 타먹어야해!" 나면서부터 이과형 인간이 (좀 다른 의미로) 씨가 따로 정해지기라도 했는지, 이 꿀단지에는 아무도 함부로 손 대서는 안 됩니다. 일부 학계와 공직자가 결탁해서 이뤄지는 클랜화... 누가 과연 고양이의 목에 먼저 방울을 달까요?

"침묵이 길어지면 사기꾼들이 돌아온다." 결국은 깨어 있는 시민들이 나서서 의심하고 들여다보고 끊임없이 감시의 눈길을 번득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버스 준공영제는 마냥 시민을 위한 정책 같지만, 실은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부도 위험 없이 날로 먹자는 짓이나 같으며, 세상에 재벌보다 속편한 게 버스 회사 사장 아들 노릇이라고 저자는 신랄히 비꼽니다. 믿음직하게 여긴 게, 알고보니 평범한 시민들 주머니를 체계적으로 털어가는 "국가의 사기"였다니, 여간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 우리 시민들부터도 그저 당연히만 여겨온 잘못된 상식을 하나하나 털어 감시하고 비판과 개선을 촉구할 일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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