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
마이클 부스 지음, 김경영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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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북유럽인들에 대해 이미지가 꽤 좋은 편입니다. 완벽한 사회보장 시스템이 갖춰졌고, 키 크고 이목구비 뚜렷하며 성생활 풍조도 자유분방하지만 사회에는 질서가 확고히 유지되며, 일광량이 적어 기분이 음울해진다는 엄연한 과학적 진실에도 불구하고 왠지 자연 풍광에조차 막연한 동경이 생깁니다. 스칸디나비아 누아르가 한때(대략 8, 9년 전) 대중문학 트렌드를 세계적으로 평정했었는데 이때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어서 열렬한 호응을 보냈더랬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이란 있을 수 없고, 아무리 체제가 잘 구비, 작동된다고 하나 허점이나 모순 없는 사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믿고 범죄율도 매우 낮게 유지되는 공동체이지만, 개개인은 그 나름의 아픔과 미련과 좌절된 이상을 갖게도 마련입니다. 이 책은 그런 북유럽 5개국에 대해 매우 유머러스하게 접근했고, 일반 상식적인 사항보다 작가 본인이 머무르며 몸으로 느낀 점들을 재미나게 풀어 준 내용입니다. 약간 산만한 감도 없지는 않고, 작가 개인의 관점이 전체 구성을 꿰뚫는 개성이라서 객관적 정보만을 짧은 시간에 추려서 정리(여행 등의 목적으로)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북유럽을 처음 방문하는 분들보다는, 이미 한번 정도 다녀오셨거나, 업무상 그들의 깊숙한 속사연에 더 관심 깊은 독자들이 "그랬었구나" 혹은 "그런 면도?" 같은 감상을 연발하며 파고들기에 더 좋습니다. 문체는 발랄하고 가독성은 거침없지만, 작가가 진짜 의도한 바를 정확히 캐치하려면 좀 심사숙고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긴 그 나름 천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겨레와 고장의 영혼을 엿보는 작업이 어찌 한 번 가벼운 눈길로 가능할까요.

모두 5장 체제인데 그 앞의 짧은 서문이 전체 내용을 잘 요약하며 이 책이 어떤 동기로 쓰여졌는지 독자에게 개념을 잡아 주므로 꼭 읽어 봐야 하겠습니다. 물론 재미난 수다투이기 때문에 부담 갖고 접근할 필요는 전혀 없고, 모든 문장이 흥겹게 재치있게 쓰였으므로 페이지만 펼치면 수다의 매력에 끌려 자연스럽게 페이지가 넘어가긴 합니다.

1장은 현재 작가가 체재하기도 한 덴마크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실 (책에도 나옵니다만) 덴마크는 한때 영국을 속국처럼 부렸고 스칸디나비아 일대를 호령한 초강대국이었으며, 바로 바이킹의 본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북방의 거대한 반도 영토를 모두 잃고 자그마한 유틀란드 고장과 그 오른쪽 섬만 보유하기에 우리는 이들이야말로 "바이킹 종갓집"이란 사실조차 잊곤 합니다. 영국의 오랜 기도문에 보면 "우리를 북쪽 사람들의 진노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 같은 구절이 다 있습니다. 데인인들이 대거 브리튼 섬을 침공해 왔을 때 거의 존망의 위기에 몰렸으나 한 군주의 용감한 거동으로 간신히 나라를 보전했는데, 이 군주를 가리켜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왕" 칭호를 붙이니 바로 알프레드 더 그레이트입니다. 여튼 그 정도로 이 덴마크가 역사의 지난 한 시절 무시무시했다는 소립니다.

책에서는 그런 아주 먼 지난 역사보다, 많이 위축되었지만 여전히 건실하고 탄탄한 사회를 지켜 내며, 높은 교양 수준으로 주변 나라들의 부러움을 사는 현대 덴마크의 모습을 더 생생하게 잡아냅니다. 저자가 원래 영국 분이라서, 영국과 얽힌 과거사(근대사)도 자주 언급됩니다. 예컨대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석권할 때, 영국에서는 이 덴마크가 프랑스 편에 가담할까 우려하여 예방 전쟁 같은 걸 시도했다고 합니다. 두 차례에 걸쳐 코펜하겐을 포격했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프랑스와 애초에 나란히 설 생각이 없었던 덴마크인들이 기수를 거꾸로 돌려 영국과 적대하게 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p37:11의 "...덴마크를 프랑스의 손에 넘기려는..."은 "넘기지 않으려는"의 오타로 보입니다)

덴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국가를 꼽을 때 지표상 1위로 자주 선정됩니다. 하지만 이런 실사나 조사 결과가 과연 얼마나 진실과 객관을 반영할지, 저자나, 심지어 덴마크인들(저자와 개인적으로 만난)조차 회의감을 표현합니다. 확실한 건 덴마크 사회는 부유층도 빈곤층도 매우 적은(적어도 다른 서유럽 부자나라들과 비교해서) 편이며, 이 덕분에 심각한 사회 문제의 발생도 시민 사이의 갈등도 매우 적다는 겁니다.

평등이 이처럼 높은 수준의 만족과 "웰-비잉"을 보장한다는 점에 외부 학자들이 폭 넓게 동의하지만, 덴마크인들의 만족도는 한편으로 다소 위협을 받는 구석도 있습니다. 일각에서, "분명히 한계세율을 낮춘 결과로 이웃 스웨덴의 소득 수준이 상승한 걸 보라(p111)"면서, 살인적인 세율에 대한 불만이 제기됩니다. 일 년의 1/3 이상은, 오직 국가에 세금을 내기 위해 일함이나 마찬가지이고, 이런저런 간접세까지 너무 많이 붙습니다. 한때 고칼로리 유제품 소비를 줄이기 위해 "비만세"를 부과했다가, 국내 낙농업과 유통 섹터에 큰 타격을 주자 황급히 폐지된 적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나는 소득 72%를 세금으로 내는 사람임!" 같은 자부심을 여전히 보유한다고 하죠. 한국 같으면 참 상상하기가 힘든 분위기입니다.

덴마크는 동화 작가 안데르센처럼 세계 문학에 큰 영향을 준 위인을 여럿 배출한 나라기도 하죠. 이 책에서는 "아네르센"이란 표기가 일관되는데, 이게 맞습니다. 덴마크어는 d 발음이 안 날 때가 많고 특히 nd 철자에서 d는 무조건 발음 생략입니다(단 ndr에서만은 다 발음됨). 뿐 아니라 현대 대중 문화에도 아이콘처럼 인식되는 인물들이 다수 있어서 이 책에도 이름이 여럿 거명됩니다. (근데 매즈 미켈슨 언급이 없어서 의외였어요. 이 책에서 여러 번 나오는 007에도 나왔고, 특유의 이지적이고 침울한 페이스 때문에 미드 <한니발>에서 주연인데도요) 저자가 강조하는 덴마크인의 민족성을 상징하는 단어로서 "휘게"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는데 이 책의 백미이므로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2장은 핀란드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잘 알지만 핀란드는 코카서스인이 아니라 핀 족이라고 멀리 아시아에서 동진해 온 겨레입니다. 책에도 나오듯 정관사 부정관사 전치사가 없어서 유럽인, 특히 영국인 저자에게 매우 특이하게 보이며(사실 프랑스, 독일어 화자가 보면 영어도 참 이상한 말인데 자기 별난 점은 자기 눈에 안 보이나 보죠), 몽골어나 일본어와 혈족일지도 모른다는 언급이 책에 나옵니다. 우랄- 알타이 어족 가설은 사실 근래에 폐기 직전 단계인데 여튼 저 입장에 의하면 우리 한국어도 핀란드어와 계열이 멀지 않습니다.

핀란드는 사실 덴, 노, 스, 아 등 다른 4개국과는 이처럼 혈통이 다르지만, 오랜 기간 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기에 스칸디나비아의 역사에 이들을 함께 개관하는 게 무리는 아닙니다. 표트르 대제가 18세기 초 21년 동안 "북방 전쟁"을 스웨덴과 벌여 결국 핀란드를 손에 넣었는데, 핀란드인들의 지도자는 노련하게 교섭을 벌여 지나친 수탈과 예속 상태가 발생하지 않게 외교를 참으로 잘 펼쳤다는군요. 이러다가 레닌이 10월 혁명을 일으킨 와중 은근슬쩍 독립을 해 버리고, 이후 명실상부 주권국으로 잘 살다가 2차 대전 직전에 스탈린에게 침공을 당합니다. 아마 스탈린은 이 약소국을 나치 독일이 선점할 경우 전개될 악몽을 막기 위해 벌인 조치이겠습니다만, 여튼 이 때문에 약소국 핀란드는 엄청난 피해를 겪습니다. 웃지 못 할 일은 이 작은 나라의 저항을 감당 못 해서, 스탈린 역시 큰 국력의 손실을 보고, 이 과정을 지켜 보던 히틀러가 소련의 부실이 어느 정도인 줄 짐작한 후 얼마 뒤 전격 소련 침공을 감행했다는 겁니다.

소련이 거세게 밀고 들어오자 핀란드는 (안타깝게도) 나치 독일과 손을 잡습니다만 이 부분은 약소국 입장에서 어쩔 수 없었다며 이후 연합국들도 다 양해를 해 줍니다. 영리하게도, 핀란드는 나치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재빠르게 손을 바꿔 소련 등과 동맹을 시도하는데, 협상이 이뤄진 후 이번에는 자국 내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려고 필사적으로 전투를 벌입니다. 한번 마음 먹으면 더 강한 적을 향해서도 매서운 투지를 보이는 민족성은 세계에 강한 인상을 주었고, 소련도 내심 겁을 먹고는 배상금과 일부 영토 할양 선에서 멈춥니다. 참고로 책에는 1/10에 가까운 영토를 빼앗겼다고 나오지만, 사실 카렐리아는 핀란드 본류인 핀 족과 좀 혈통이 다른, 또하나의 소수 민족 거주지입니다. 그나마 카렐리아 대부분은 여전히 핀란드 땅이기도 하고요.

책에도 나오듯 핀란드는 이후 냉전기에 소련을 향해 알아서 기며, 공산 국가가 아닌데도 언론 출판 영역에서 소련의 심기를 상하게 할 수 있는 주장이나 표현은 검열을 통해 공개 금지 처분을 하는 등 주권국가로서 다분히 체신이 더럽혀질 만한 길을 걷습니다. 이걸 핀란디제이션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책에도 잘 나오죠. 한편으로 저자가 재미나게 설명하는 것처럼, 핀란드는 공산 체제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는 대단히 우호적인 사이를 유지했는데, 특히 무역 부문에서 소련과 상호 보충 포지션의 물자가 많아 그야말로 찰떡 궁합의 재미를 장기간에 걸쳐 봤다고 합니다. 이러던 게 1990년대 들어 소련이 갑자기 무너지고 정정이 불안해지자 자국에도 일시 경제 공황이 들이닥칠 정도였다고 하네요. 우리가 의미 깊은 시사를 받는 건, 저 위 폴란드와는 달리, 영리하게 경제적 실리를 챙겨가며 강대국과 잘 지낸 그들 핀란드인들의 지혜입니다. "스칸디나비아인들보다 더 스칸디나비아적인 국민", 이것이 저자의 요약입니다.

아이슬란드는 아마 전세계에 큰 존재감을 부각한 게, 1980년대 중반에 있었던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사이의 미소 정상회담일 겁니다. 한국도 이후 부시(부친)과 고르비가 제주도에서 잠시 만나는 이벤트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아이슬란드 역시 인구 적고 환경 쾌적한 곳에서 산뜻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사는 강소국으로 우리가 알지만, 이 책에서는 더 구체적인 역사를 조곤조곤 얘기합니다. 아이슬란드인들은 오랜 세월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고 독립의 역사도 짧지만, 특이하게도 여전히 덴마크인들과 친하게 지내며 선진 문화를 흡수함에 있어 덴마크의 조류를 일순위로 참고한다는군요. 이뿐 아니라 친족 중 덴마크에 한 사람 정도 연고가 없는 가정이 없을 정도랍니다. "우리는 촌놈들 아닌데 덴마크인들은 우리를 그린란드인들보다 좀 나은 정도로밖에 안 봐요!"라며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귀여운 투정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게 민족 간 적대 관계로 치닫지 않고 즐거운 이야깃거리 마련 정도로 그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노르웨이는 독립의 역사가 매우 짧습니다. 이웃 스웨덴하고도 꽤 긴장감이 남아 있고, 20세기에는 나치 독일에게 침공, 점령을 당했던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덴마크도 비슷합니다만 이쪽은 왕실부터 해서 조금이라도 존중을 받는 분위기였는데, 노르웨이는 많은 굴욕을 당했고, 그래서 그 짧은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의 저항 족적이 매우 뚜렷합니다. 이웃들이 한결같이 짚는 민족성은, "노르웨이 사람들 참 따분하고 재미없다"이죠. 여튼 노르웨이는 석유의 발견, 또 전통적인 수산업의 발전, 풍부한 천연 자원 덕에 지금은 오히려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나아가 세계 정상권의 1인당 소득)입니다.

스웨덴은 정치적으로 참으로 안정된 체제이며, 노벨상을 수여하는 등 문화, 예술, 학문의 발전상도 두드러진 선진국입니다. 허나 특히 라이벌(?) 관계인 덴마크인들이 보기로 "답답하고 완고한 사람들"이 가득한 고장인데, 이는 워낙 낙천적이고 융통성이 큰 덴마크인들이 내리는 평가라서 그럴 수 있습니다. 또 스웨덴이 인접 착한 나라들의 우려를 사는 단 하나의 요인은 극우 정당의 존재입니다. 특히 노르웨이 같은 나라가 파시즘 때문에 얼마나 큰 시련을 겪었는지 고려하면 경계심이 드는 게 당연하죠.

전체적으로 스칸디나비아, 혹은 더 범위를 넓게 잡아 북유럽 5개국의 특징은, "평범한 사람이 태어나면 더없는 천국이겠으나, 뛰어난 사람은 매 순간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답답한 나라"입니다. 이들 나라에서 경제인들이 우려하는 것 중 하나가 "도대체 혁신이란 게 없다."입니다. 허나 사람이 받은 것 많게 큰 사람은 남한테 베풀 줄도 알고, 자신이 봉착한 위기도 여유와 슬기를 잃지 않고 잘 관리합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이 북유럽 국가들이 여태 겪은 경제적 위기만도 여러 차례인데, 그때마다 특유의 지혜로 돌파구를 찾아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여유 있고 신뢰가 가득한 사회(자전거에 자물쇠를 안 채운다고 하니 고대 중국 태펑성대를 가리키는 성어 "도불습유"의 경지가 따로 없겠어요)에서 자란 사람들이기에, 공연히 비뚤어진 못된 심사를 부리기보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바른 길을 잘 찾는 겁니다.

책은 저자가 직접 만난 "사람들의 생생한 육성"를 가득 담았습니다. 사실 추상적인 이미지나 지난 역사에 그 일면만이 담긴 채 왜곡되어 통용되는 민족성 등은 우리가 깊이 신뢰를 줄 건 아닙니다. 자신 개인의 경험을 과도히 일반화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직접 겪어 보지도 않고 좋은 쪽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함부로 단정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무엇보다 사람과의 즐거운 접촉, 소통이 풍성한 이야기를 읽으며,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사실은 다분히 유쾌하게 놀리는 어조입니다)"이 어디 북유럽에만 있겠나 싶었습니다. 작가의 후속작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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