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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7번째 기능
로랑 비네 지음, 이선화 옮김 / 영림카디널 / 2018년 3월
평점 :
얼마나 재밌습니까. ㅎㅎ 책을 덮고도 온 몸을 간질이는 듯한 흥분과 감동, 지적인 위트가 남긴 잔잔한 파문 때문에 원 도통 마음을 주체 못하겠네요.
움베르토
에코 선생이 대략 지금으로부터 2년 전쯤 타계하기도 했는데, 그의 대표작 <장미의 이름>을 보면 (내용 누설일 수도
있지만 워낙 유명한 책이고 그 내용이니 잠시 주접 좀 떨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이 세상에 알려질 때 초래될 엄청난
혼란을 막기 위해, 고루하고 인습적인 사고 방식에 꽉 사로잡힌 어느 수도사가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이들을 하나 둘 죽이고, 그
사뵨마저 세상에서 말살하려 든다는 내용이 나오죠.
글쎄
그 결말을 알았을 때 독자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는 짐작이 어렵습니다. "와 무려 시학 2권이라니, 정말 기독교 중심의
세계가 한순간에 붕괴할 만도 했겠는걸?"이라며 전율을 느낄 만한 발상이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아드소와 윌리엄 수도사의 시대
이후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 사고를 많이 겪은 탓에, 등장인물들의 반응이란 그저 과장된 호들갑으로밖에 안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정말 중세의 한복판 어느 시점에 그 저술(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저작이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내용도 소설 속처럼
웃음과 해학을 옹호했다 치고)이 공개되었다면, 가톨릭이 세속과 정신 세계까지를 공히 장악했던 당시 유럽의 질서가 정말로
붕괴되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스콜라
학파(프로테스탄트는 교부 학파는 긍정해도 이 스콜라 학파의 지향점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합니다)가 그토록이나 맹신해 오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기반이 느닷 정반대의 지표를 향해 달릴 수도 있었다는 그 상상만으로도, 허약한 지반 위에 아슬아슬 세워지던
신학의 바벨탑이 한순간에 무너질 만한 위험성을 내포했었다. 뭐 이런 "역사적 사실"을 풍자하고 싶었던 에코의 (그마저도 일종의)
유머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억누른다고 없던 신앙심(혹은 공포심)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사회와 백성의 의식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되었으니, 설령 이지적인 신학자들이 모두 냉소적 주지주의 앞에 백기를 들었다 해도 여전히 기층 민중은 로사리오를 읊고
천국행을 기도했을 겁니다. 계몽이란, 사회 경제적 실물 구조의 변화로부터 비로소 추동되는 거죠. 또, 유능 달변의 신학자들이
새로 출동하여 분명 어떤 출구를 모색했을 겁니다. 말로 우겨서 안 되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네요.
답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말로 안 되는 건 없다." 씁쓸하지만 이 말은 아주 부정적 의미에서 진실입니다. "말'이란 그 발생의
초기에는 대개 마법의 주문 그 자체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브라만의 제사 주문과 경전 구두 계승에 쓰였던 산스크리트가 얼마나
까다로웠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이 언어는 그 까다로운 문법과 복잡한 접변 규칙 때문에 결코 일반 대중 사이에 입말로 퍼질 수
없었습니다. 하긴 따지고 보면 한국어도 그 꼬이고 꼬인 문법과 조음법의 난해성이 장난 아닌데 이처럼이나 많은 언중에 의해 쓰이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합니다.
인문학
쪽에선 학자를 표방한 이들이 날로 먹는 것 아니냐 오해를 받아도, 언어학 한번 공부해 보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갈 겁니다. 촘스키가
현실 정치에 관해 때로는 지나치게 과격하고 비현실적이거나 심지어 자가당착, 위선적인 주장까지 발설해도 대중이 그를 지지하는
이유는, 젊은 시절 한창 천재성이 빛날 때 그가 남긴 업적의 볼륨이 워낙 두터워서인 이유도 있습니다. 수학과 언어학이 언젠가
정직한 크로스를 이룰 때, 인류 문명과 정신에 얽힌 영원한 비의가 풀릴지도 모릅니다. 여튼 지난시절 언어학의 역사와 한계로 새로
규정하다시피헸던 롤랑 바르트 같은 천재가, 무려 "언어의 일곱번째 기능"을 발견했고, 이로 인해 특별히도 위험을 느낄 만한
세력이, 일이 커지기 전에 서둘러 그를 암살해 버렸다는 가정, ㅎㅎ 얼마나 재밌습니까.
다시
움베르토 에코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푸코의 진자>에서,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고(체제의 폭압에 의해 할
일을 빼앗긴), 재기는 넘쳐나던 젊은 재사들이 장난스럽게 위서를 만들었으며, 이 문헌의 정체성에 대해 터무니없는 오해를 한
세력에 의해 큰 위험에 봉착한다는 웃지 못할 사연이 우리 독자들을 전율(경악 혹은 허탈)케 했죠. 이 소설 역시 비슷한 분위기와
발상을 공유합니다. 더 이상 이야기하면 내용 누설이 될 것 같아 자제합니다만, 역시 기호(학)와 언어의 소재란, 이지적 스릴러와
미스테리를 창작하는 데 아주 제격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소설
중에는 소위 기호학의 허접성(!)을 지적하는 대목이 다 나오는데, 에코가 저 화제작들을 집필하고 근 30년이 지났습니다만 후배의
눈으로 보아도 여전히 기호학의 기반은 뭔가 허술합니다. 에코가 들으면 서운해할 수 있어도 그런 천재가 갖고 놀 때에나 주목을
받지, 어설픈 이가 기호학 운운하면 오타쿠 이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
짖궂은 성적 농담 소재의 아슬아슬한 담론도 나옵니다만, 하... 본디 좌파 지식인 중에 취향 독특한 분이 워낙 많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하며 피해갈 수 없는 함정이긴 합니다. 역주 중에 누구누구를 가리켜 소크라테스의 연인이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만, 글쎄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어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 괴악한 취미를 뜨르르한 성인 현철들이 공유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 한구석이 후련해질 수도 있겠으나, 흠 글쎄요.
솔직히
말해 에코의 소설은 미스테리 장르물로 읽자면 독창성이 떨어집니다. 결말에 이르기까지 그가 늘어놓는 엄청난 담론들이 재미있어서
감히 거기까지 흠을 못 잡을 뿐이죠. 반면 이 작품은, 청소년기에 에코의 작품을 읽고 어지간히 큰 자극을 받았을 법한 저자에 의해
그 점이 철저히 반성된 듯(?), 물과 기름처럼 불상용 최악의 팀웍을 자랑하는 듀오의 개성이 재미나고, 그들이 조심스럽게 접근해
가는 미궁의 정체 또한 꽤 정성들여 고안되었습니다. 롤랑 바르트를 비롯 서유럽 지성의 거물들 이름이 대거 등장하는 텍스트에
위압될 걱정이 드는 독자들도, 순전히 추리물 읽는 재미로 한번 도전해 볼 만합니다.
에코의 대표작들을 읽은 분들이라면 이 작을 놓칠 수 없고, 아직 안 읽은 분들이라면 이 책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리로 손길이 갈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