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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 1 - 제1부 그 별들의 내력
송은일 지음 / 문이당 / 2017년 12월
평점 :
참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에, 처연한 감상이 절로 치솟는 작품이었습니다.
"반야"의
뜻이 뭔지 아시나요? 범어 "프라즈냐"가 빠알리어(부처님 시대의 입말) "빤냐"로 바뀌고, 이게 한역을 거쳐 굳어진 단어입니다.
음차로 형성된 말이긴 하지만, 한자로 새겨 보아도 얼추 비슷한 뜻이 되는 게 신기할 정도죠. 산스크리트 문자(데바나가리. 힌두어
등도 이 문자로 표기합니다)로 쓰면 प्रज्ञ입니다. 뭐가 저렇게 짧아지나 할 수도 있는데, प्र는 प와 र가 합쳐진
글자이며, ज्ञ는 ज와 ञ가 한데 모인 꼴입니다. 이는 해당 언어를 공부해야 그 체계에 대한 이해가 가능합니다. 헌데 너그러우신
부처님도 그런 뜻이었겠고, 많은 선승들은 치열한 문자 공부를 통하지 않고서도 그저 바른 마음과 수양으로도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다니 다시 한번 마음이 숙연해지곤 합니다.
"반야"는
그 한 몸에 온갖 지혜를 담아낸 기이한 처녀입니다. 남장을 햐면 귀여운 사내아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색을 하고 꾸미면 안
넘어갈 수컷이 세상에 없을 만큼 색기 넘치는 자태를 가졌습니다. 이런 반야이지만 속세에 태어나길 천것으로 태어나, 신상에 닥쳐오는
온갖 위험과 신이한 알림, 징후 같은 걸 몸에 끼고 살다시피해야 합니다. 그런 반야에게는 타고난 지혜 말고도 세상에 부대끼며
몸에 밴 안목과 요령이 점차 늘어, 이런 어리고 연약한 몸으로 어떤 대처가 가능할까 싶은 상황에서도 기적 같은 반전을 일궈 내는
품이 독자를 감탄하게 만듭니다. 물론 그녀에게는 신기(神氣)가 내내 감도는 운명적 재주가 몸에서 떠나질 않습니다만, 이런 건
이점이라기보다 차라리 저주에 가깝습니다. 그녀를 지켜 주는 건 결국 무녀로서의 신통력이라기보다, 엄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권력욕과
이욕의 칼날 같은 서슬을 모면하는 뱀 같은 슬기입니다.
이
고을 사또 김학주는 소년 등과를 한 수재 관료입니다. 희한하게도 천것들이나 앓는 무병이 내내 그의 몸에서 떠나지 않아, 그는
맑은 정신과 빼어난 지성에도 불구하고 삭신이 안 쑤실 날이 없습니다. 이런 무병이 흔히 그렇듯, 상대와 마주하면 그 검은 속셈과
비루한 계산, 감정의 동요가 눈에 훤히 보입니다. 병이 떠나면 이런 통찰은 간곳없이 사라지니 신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가의
가르침이란 본디 "사불범정"이라 하여 괴력난신을 이야기하지 않고, 무속은 물론 불가의 영향력과도 맞서가며 오랜 세월을 투쟁해 온
객관적 관념론의 총체입니다. 이런 유생들 중에서도 장차 최상층부에 자리하여 무리를 이끌 김핟주 같은 이가, 단지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그 이점과 쾌감을 놓지 않기 위해 제 몸에 신기(천한)를 달고 산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야는
어린 나이임에도 척 보자마자 김학주의 슬프고도 컴컴한 운명과 체질을 직시합니다. 사또도 이 반야가 자신의 그런 속마음을 (일급
무녀이므로 당연히) 들여다보는 줄 알고, 고수들끼리만의 화통함으로 직설적인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반야는 사또의 깊은 곳 변덕과
정욕의 발동까지를 훤히 캐치하여 살벌한 수(手)를 말로 두는데, 김학주 역시 능글능글하게, 그러면서도 등골 서늘해지는 위엄을
풍기면서 받아넘깁니다. 언제나 반야는 복채에 있어 같은 정책(?)으로 나가고, 김학주도 제 그릇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확인시키기
위해(그럴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죠) 대담한 언사를 서슴지 않습니다. 둘의 이 맞대면 장면이 특히 볼만했습니다.
세상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고루 교차하고, 그 중 천벌을 받아 마땅한 패륜과 불의가 저질러지는 줄 뻔히 알면서도, 사신계는 인간사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섭리라는 룰을 지켜야 하며, 필멸의 인간계에서도 여튼 권력자들이 부려 대는 위력은 충분히
파괴적이기 때문입니다. 반야는 이 두 "포스" 사이에 끼어, 한편으로 제 한 몸의 물욕과 육욕을 영리하게 달래고, 다른 한편으로
어린 나이에 서글프게도 깨닫게 된 궁극의 법칙 한 자락에 줄곧 충실하며 진영 충돌의 파국을 막고자 몸부림칩니다.
미복을
하고 야밤에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영조(이단. 연잉군)과의 조우도 무척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엄청나게 큰 기운이 느껴졌으나,
한편으로 너무도 슬픈 분이었다." 이보다 더, 저 대군주의 성격과 기질과 천품을 잘 요약한 평가가 있을까요. 한편으로, 천한
신분이 뜻하지 않게 세상사 가장 깊고도 위험한 이치에 접해 노출되는 온갖 위험과 한을 풀어내는 방법은 마치 육(肉)의 교접이라도
된다는 양, 다양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정한의 물적, 정신적 표출 묘사는 약간 낯이 뜨거워지면서도, 보잘것없는 인간의 아귀다툼,
드잡이가 결국 저런 몸짓하나로 다 설명되지 않나 싶기도 해서 많은 감흥이 교차하게도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