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전의 기원, 불교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리처드 곰브리치 지음, 김현구 외 옮김 / CIR(씨아이알)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대개,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 문자의 가르침을 중시할 것인지, 아니면 가르침을 심사 숙고한 후 본인의 수양을 통해 깨달음에 이를 것인지를 놓고 교종과 선종으로 입장을 나누는 게 보통입니다. 허나 아무리 수양과 깨달음을 중시한다 해도, 부처님의 말씀을 일단 접하고 해독한 후에야 개인의 각성이 가능한 법입니다. 기독교 경전의 번역에서도, 직역이냐 아니면 내용적 동등성 추구냐가 문제가 되듯, 불교 경전 역시 직역주의 이슈가 논쟁의 큰 핵심으로 부상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1장에서 팔리본이라 하면, 부처님(고타마 싯다르타)의 생존(인간으로서) 당시 구어와 기록 언어로 널리 쓰였던 "팔리 어"로 된 경전을 가리킵니다. 이 팔리 어는 산스크리트어보다는 훨씬 단순화한 발음, 어법, 문법을 가졌고, 까다로운 고대어가 느슨한 대중의 입말로 바뀌는 과도기적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한문 불경 해독을 떠나 "부처님이 발화하신 원어"를 추구하는 학자, 일반 신도들의 열정적인 움직임이 부쩍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허나 p16에서 저자는, 비록 자신이 한자를 모르나, "한역본(漢譯本)"에 의지하는 게 때로 얼마나 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강조하고 싶다고 그 입장을 피력합니다.

사실 아무리 경전이라 해도 고대로부터 이어온 불완전한 형태의 전승이 지닌 필연적인 약점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성경만 해도 얼마 남아 있지도 않은 필사본들이, 그나마 기록자들의 부주의, 오류로 인해 얼마나 큰 혼란을 야기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이 경우 "교정", 혹은 "비판적 지성의 개입"이 필수인데, 양적으로 기독교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방대한 경전을 지닌 불교의 경우야 새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욱간티탄뉴ugghatitaññu", 즉 설법을 듣자마자 바로 깨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요즘은 팔리어(빠알리어) 원전을 공부하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귀에 어느 정도는 익은 말이겠습니다. 보통 사람이 바로 사물의 진성, 실체에 접근할 수야 없겠으나, 진리를 향해 부단히 정진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 마침내 완성에 이르려는 노력 정도는 누구나의 처지에서도 가능한 일입니다. 이 책은 우리 독자들에게 그런 마음씀의 자세를 힘써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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