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묘보설림 2
루네이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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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에는 사랑하는 마음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더 큰 개념이라고 일각에서는 주장합니다만 역시 사람마다 생각이 다 갈릴 수 있는 부분이겠습니다^^ 헌데 이 소설은 어느 특정 종교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내용도 아니면서 제목이 저리 "자비"라고 붙었습니다. 작가의 깊은 뜻은 이 작품을 직접 읽으면서 독자 개개인이 깊이 새겨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한 제 생각은 이 서평 말미에 써 보기로 하고요.

주인공 천쉬성은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에서 그 삼촌에게 양육되어 간신히 공업고등학교를 마친, 세상에 의지할 데 없는 처량한 신세입니다. 그렇다고 소설 속 전형적 주인공들처럼 각별한 노력으로 현실의 장애를 헤쳐나가는 인물도 아니고, 이런 사람이 이런 악조건에서 어떻게 생존이 가능할까 싶기만 한, 지극히 평범한 가난뱅이 노동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인성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예컨대 루신의 <아Q정전>에서처럼 혼자만의 세계에서 자신을 특권층으로 세팅하거나, 세상 이치를 혼자 다 깨닫고 오히려 주변을 측은히 여기거나 경멸하는 (자신만 빼고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코미디를 연출한다거나, 뭐 이런 쪽으로 풍자의 매개 기능을 맡을 수도 있겠죠. 허나 천쉬성은 심지어 그런 쪽으로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와 그의 주변 사람들이 겪는 비극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와 체제에 대한 비판, 풍자 쪽으로 자연히 독자의 눈길을 돌립니다. 무언가는 잘못되었기에 현실에서 이런 부조리가 빚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설은 청년 천쉬성의 매우 미숙한 대응이 빚은 자잘한 사고, 천쉬성 주변에서 더 미숙하고 한심하기까지 한 태도로 자신의 처지를 지옥에 빠뜨린 다른 인물들(멍건성 등)의 웃지 못할 사연, 그 와중에서도 자신을 사랑하고 보살펴 주는 여인(위성)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과정. 아이가 일찍 안 생기자 친척에게서 언청이 갓난아이 하나를 입양하는 곡절 등을 온정 어린 시선으로 다룹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비분강개한 어조로 독자에게 각성을 요구하거나, 반대로 졸라 풍의 자연주의 프레임에 사건을 고정시키고 담담한 관찰을 일단 청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작가 입장에서는요. 제가 보기엔 둘 중 어느 편도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을 이런 악조건에 가둬 놓고, 도덕적으로 타락시킬 수까지 있단 말인가!" 예를 들면 한국의 1970년대가 낳은 걸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든가,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등이 이런 태도에 가깝겠죠. 김동인의 <감자>는 일단 냉정한 내러티브를 유지하긴 해도 결국 급작스럽고 충격적인 결말에 이르러선 독자들에 주는 정서적 효과 면에서 저 작품들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대지>는 어떨까요? 전 소장 작가 루네이(路內. 로내)의 이 장편이 (길이는 훨씬 짧아도) 저 펄 벅 여사의 대작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잘난 사람, 악한 사람, 선한 사람도 없고, 환경과 출생이 부여한 우연 요소에 의해 운명의 격랑이 좌우되는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주인공 천쉬성은 노년에 이르러서조차 그 불리한 출발점에서 크게 나아진 모습도 아닙니다만, 용케도 그 질곡의 시대를 그 나름 요령으로 버티고 살아남은 사람답게 "다소의 진보"를 손에 거머쥔 사람처럼 인상이 남는군요.

천쉬성은 지극히 평범한 가난뱅이 노동자였지만, 우리 독자들이 잘 살펴 보면 원가 근성이랄까 깡다구 같은 게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가 공장에서 여론을 몰아나가니(타고난 선동가 같은 축에도 못 끼는데) 위에서 함부로 못 대하게 되는 품을 봐도 그런데, 잘난 것 하나 없어도 남자는 누구를 배필로 맞느냐에 따라 밖에서 기가 살고 안으로 자기 적성, 운명을 찾아 나가는 힘이 길러질 수 있다고 봅니다. 아내 위성이 그에게 베풀어 준 도움은 그래서 작다고 못할 정도고요. 다음으로는 (참 비유가 기묘한데) "텔레비전에 나오는 국민당 여자 스파이"처럼 보이는 바이쿵췌(백공작)이 왕더파의 희롱에 정면으로 반발하여 얼굴에 큰 상처를 낸 사건도 그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스파이는커녕 이 공장(최악의 일자리입니다)에서 가장 험한 일에 배정된 것만 봐도 그녀의 처지가 짐작되고도 남지만 말입니다.

천쉬성이 처음으로 잡은 일자리인 페놀 공장 직공의 처지가 어떠한지는 두 에피소드로 잘 요약됩니다.

"장화를 신지 마. 장화가 문드러지거든."
"하지만 발이 문드러지는 것보단 낫잖아?"
"둘 다 싫어."

사회주의 국가지만 국민과 노동자의 생활을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지는 게 아니며, 노동자 개개인의 과실을 들어 장비나 의복은 얼마 안 되는 급여에서 본인 부담으로 해결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직장에서 과실을 저질렀을 때에도 (그저 목숨만 연명하도록) 급여에서 천천히 벌과금을 삭감하는 식인데,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라면서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방법치곤 참 졸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페놀에는 물론 독성이 있지. 헌데 공장에 다니다 보면 면역이 생겨 그럭저럭 버티게 돼. 그러다 공장을 그만두면 그때부터 암이 생기는 거야."

참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집니다. 사람이 이런 억지스러운 자기 기만을 의식 속에 불어넣어야 현실을 버틸 수 있다면, 그걸 과연 사는 중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을지. 하긴 후진 사회주의 국가의 극한 상황이 아니라도 매 순간을 (아무도 안 속는) 거짓과 망상 속에서 보내는 광인도 있지만 말입니다.

소설 속에는 관제 데모도 몇 번 등장하는데 시위나 집회가 시민 개개인의 자연스러운 분노 결집이 아니라 이처럼 윗선에서 조장하는 흐름에 따라 "출세와 충성심 과시"를 위해 이뤄진다는 게 참 이상했습니다.
예를 들면 "4인방 타도" 같은 게 그것인데, 물론 4인방이야 1970년대 중국을 이런 거대한 거지 사육장으로 만든 일등 원흉이긴 해도, 그의 타도를 위한 집단 움직임까지 상부의 조종에 기댄다는 게 참 답이 없는 미개한 모습으로 보였네요.

밑바닥에서도 생존을 위한 간특한 꾀와 사술이 난무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를테면 가난, 무능, 질병, "비혼(!)" 등의 별의별 희한한 사유를 들어 당국에서 보조금을 타먹는 행태인데, 쉬성이 처음에 동료들의 신망(...)을 얻은 게 이런 잔재주를 통해서였습니다. 사이비 지상 낙원을 공언하고 다닌 사회주의가 인민을 기만하고 착취했다면, 밑바닥 노동자들은 이런 식으로 상층부와 체제를 농락하는 거죠. 모두가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저열한 콘 게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설령 불리한 환경에 처했다 해도 이를 자신의 힘으로 딛고 일어나야 스스로와 타인에게 떳떳한 의식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수중에 돈이 많아도 패자로 남을 수 있고, 돈도 없고 의식도 썩은 철저한 루저도 얼마든지 보는 세태입니다. 가공 인물 천쉬성은 희한한 방식으로 못난 시대, 사회로부터 살아남아 이런 기이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지만, 보는 우리들은 마치 이 지상의 사연이 아닌 듯 꼬이고 비틀린 개인과 시스템의 좌충우돌을 보며 감동, 격분, 죄의식, 안도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차분한 관조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람의 가치관과 성향과 운명은 대체 어느 선까지 환경과 "체제(소수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예외적 구조)"의 영향을 받는 건지, 오늘 내가 누리는 편의와 행복은 어디까지 나 개인의 능력과 정당한 대가에 기댄 건지, 생각해 보면 그리 간단한 답이 안 나오는 문제임에 나의 사유가 이르러 다시 생에 대해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역시 인위적인 시스템의 가동만으로는 각종 병폐가 해소될 수 없다. 융통성과 연대 의식만이 정답이다." 가혹한 법치를 앞세운 진(秦)이 멸망하고 한(漢)이 창업된 후 그 지도층이 새삼 깨달은 진리였습니다. "생산 시설보다는 사람이 먼저다!" 이 당연한 사항이 유물론적 세계관 속에서는 많은 이들에게, 특히 정당 수뇌부에게 금세 안 떠올랐나 봅니다. 사람, 인간애가 거세된 앙상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란, 무자비하게 노동을 착취한다던 자본주의보다 현실의 국면에서 더 나은 성과를 못 거둘 뿐 아니라, 부가가치 창출도 인간애의 달성도 모두 실패했을 뿐입니다. "자비"란 그래서, 다소 엉뚱하지만 통렬한 방식으로 "실패한 체제"의 은폐된 좌절을 따스이 응시하는(동시에 개선을 촉구하는) 대안에의 몸부림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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