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종 인간
팻 시프먼 지음, 조은영 옮김, 진주현 감수 / 푸른숲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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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침입", 나아가 "침략"과, "진출"의 구별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당한 몫이라 할 고유의 영역이 있고, 남의 영역을 함부로 넘나드는 건 때로 범죄로까지 다뤄집니다. 허나, 심지어 중등 교육 과정에서조차, 체제와 제도는 사회의 신규 진입 성원들에게, "현실에 안주하려는 이들을 위한 미래는 없다"며 개척과 도전 정신을 가르칩니다. 진출과 도전은 어느 지점부터 합리화의 근거를 마련하며, 혹 자신의 행위가 "침입"이라고 규정된다면 양심의 가책과 회개는 어느 지점까지 마련되어야 할까요?

이 책은 그간 진화론 주제로 여러 논쟁적인 결론을 제시하여 일반 독자들에게도 널리 지명도와 지지를 얻은 팻 시프먼의 최근작입니다. 감수자 진주현 교수의 추천 서문까지도 흥미로운 이 책은, 해당 감수 소회에서도 드러나듯, 저자는 "내용도 표현도 좋은" 대중적인 과학서를 그간 여럿 저술했으며, 과학적 진실에 인문적, 감성적 색채를 입히고 미래의 비전까지 (눈 밝은 독자에게) 제시해 온 위대한 지성입니다. 제목은 "침입종 인간"이라 붙었습니다만, 이 뜻은 "침입종 인간"이 따로 있다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 자체의 본성을 "침입하려 드는 것"으로 파악했다는 쪽이겠습니다. 인간의 종명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 것처럼, "호모 인바덴스(invadens. 즉 invado의 현재분사)" 같은 새로운 명명을 도입할 필요도 있다는 취지로도 저는 해석했습니다.

대개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오랜 세월 농경 문화 공동체 안에서 정착 생활 패턴을 이루고 살아 왔습니다. 남의 생활권에 "침입"하는 건 고사하고,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패턴으로 수천 년을 이어갔다고나 할 수 있습니다. 저들 서유럽인처럼 남의 대륙을 "발견"하고, 무시로 전쟁을 벌여 경계를 재확정하는 "스포츠"를 즐기는 생리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개성으로나 여겨 왔죠. 허나 미국인들, 서유럽인들에게는 그들의 조상들이 역사 속에서 벌여 온 여러 "침입"의 행태들이 일종의 원죄의식까지를 심어 준 게 사실인지, 소설이나 영화, 심지어 학술 연구의 패러다임조차 이런 쪽으로 상정하고 논의(혹은 상상)를 전개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어찌 보면 "남들의 회개"에 대해(그것이 설령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이라 해도) (죄를 짓지도 않은 우리가) 지나치게 감정이입, 동조하며 서술을 따라가지나 않는지, 억지 춘향격 고해성사를 흉내내는 건 아닌지 회의가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여튼 진주현 교수님 말씀마따나 "워낙 책이 재미가 나서" 그런 사소한 불만은 책의 1장 반절까지만 읽어도 까맣게 잊혀지더군요. 하긴 남 이야기만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책 p60에 보면, 미토콘드리아 DNA는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이 겹치는 곳이 없으나, 핵 DNA는 1~4%가 공통이라는 (역시 독자들이 꽤 친숙한) 결론이 나오는데, 유럽인 혹은 "동.아.시.아.인"만이 그러하다는 (잠시 잊고 있던) 사항을 거론함으로써 경솔한 독자를 무색하게 만들더군요.

앞에 적은 말들은 제가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든 단상이었습니다만, 책은 마치 그런 독자의 반응을 예상이나 했다는 듯 다음과 같은 개념규정부터 깔끔히 시도합니다(p36).

"한 종이 지리적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것과 침입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저자는 "시간과 거리, 영향력"이라는 다소 무미건조한, 그러나 이런 과학적 논의에서 그 본질을 정한다 할 객관적 지표를 들고 있습니다. ".... 침입종 혹은 비(非)토착종을 규정하는 작업이, 이론적으로는 어렵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라고는 하시나 후속 논증을 보면 연구의 어느 단계에서건 결코 쉽게 처리될 성격이 아니더군요. 500년이냐 (예컨대 저자의 시론처럼) 1만년이냐의 문제인데, 길어야 백 년을 사는 인간이 애초에 편의적 가치 준별까지 적잖이 개입시켜 가며 진화생물학 같은 아찔하고 아득한 영역에 지성의 일단을 바쳐 진리를 규명하는 자체가 애초에 무망한 도전입니다. 무슨 결론이 도출되건 어느 관점에서의 비판이 가능하고 설명이 안 되는 맹점이 여전히 남으니 말입니다.

언제 인류는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나? 여기에 대해 저자(와 이 섹터 한정으로 저자와 의견을 같이하는 여러 선구적인 학자들)는 그저 우연히 한 가족이 뗏목에 실려 떠내려온 게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갖고 뛰어난 항해술을 활용한 채(p43)" 이곳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뿐 아니라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등에 정착한 여러 종족들 역시, 오늘날의 인류에게는 완전히 잊혀진 특별한 기술을 고안하여 저 낙원과도 같은 고도에 도착했다는 결론에 많은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합니다. 성공적인 침입과 그 후속 번성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인간의 생존과 문명 발전을 향한 의지에는 반드시 "침입하려는 의도"와 "그 적절한 수단에 대한 고민"이 개재된다는 뜻도 됩니다.

유럽에 더 오래 전부터 터잡고 살았으며 불쌍하게도 우리 직접 조상들에 의해 멸종했고, 그 와중에도 우리들에게 약간의 DNA를 물려주기까지 했기에 더욱 안타까운 네안데르탈인들에 대해, 저자는 왜 그들(어느 시점에서는 역시 침입종이었을 수 있는)이 경쟁에서 밀려 생태계에서 퇴출되었는지 그간의 다양한 연구 성과들을 짚어 나갑니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생존 방식이 있었"으며, 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침입해 오기 전까지는 꽤 괜찮은 방식이었다는 데에 대개 의견이 일치함은 우리 독자들도 여러 대중서를 봐 왔기에 아는 내용입니다. 익숙한 개념 분류인 K-선택종/r-선택종에 의하면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 사피엔스나 다 같이 전자에 분류되며, 따라서 그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들이 무엇을 먹었느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시프먼만의 노련한 논점 전환입니다.

책에서 재인용되는 조지프 그리넬은 "식성이 비슷한 두 종이 같은 지역에서 오랜 동안 비슷한 수를 유지하며 균형을 이루는 일은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p127). 두 호미닌은 심지어 메뉴조차도 비슷했으나, 먹이를 얻을 수 있는 환경 여건이 악화되었을 때 저품질의 대체재로도 만족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고 종전의 육류를 고집하는 "보수적"인 성향이냐 같은 기준에서 크게 갈라진다고 하는군요. "융통성이 부족한" 식성을 지닌 종은 결국 무리하게 사냥에 나서다 해를 입을 수 있으며(p135:4, p139:12), (앞에 나왔듯) 같은 K-선택종이어서 어린 자녀에게 정성껏 안정적인 영양분을 공급해야만 했기에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었으리라고 저자는 치밀하게, 또 조심스럽게 자신의 결론으로 독자들을 몰고 갑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과학 대중서 역시, 저자에 따라 어떤 구조와 논리로 독자를 설득하는지 그 스타일에서도 인적 개성을 발견하는 재미로 읽는 편입니다.

믹 재거는 비틀스와 대조되는 악동 이미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롤링 스톤스의 리더이자 보컬이었죠. 책에도 나오지만 키스 리처즈도 함께 쓴 가사인데 그의 이름만 크레딧되는 건 좀 부당하지만, 여튼 히트곡 중 하나인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이 꽤 인상적인 노랫말을 담았는지 외르시 서트마리 같은 학자(팻 십먼보다 십여 년 후배인 진화생물학자입니다. 한국에는 이상하게 이분 책이 번역이 안 되네요. 하긴 십먼 저서도 이 책이 첫 소개이긴 하지만)가 이렇게까지 장난스러운 명명으로 그 주옥 같은 원리를 설명하는군요.

이상의 논의에서도 눈치챌 수 있지만 저자는 학계와 대중 사이에서 그간 더 큰 인기를 누린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퇴출된 네안데르탈인" 시나리오를 우회,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가설을 내놓으려는 겁니다. "어쩌면 그들은 현생 인류가 "도착(침입)하기 전부터 이미 멸종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저자는 독자들이 다른 책들에서 만나 온 주장, 예컨대 F 라미레스 로치(이분은 아직 대중서는 안 쓰더군요) 등의 학설이라든가, 처칠 팀의 연구 같은 것들(그 반대 과정을 강력히 암시하는)도 공정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튼 안정적인 "길드"가 붕괴된 후, 네안데르탈인이 기아에 대응한 방법은 카니발리즘 등 굉장히 졸렬한 것들이었습니다. 반면 현생 인류는 MIS 3기가 안긴 시련을 꽤 슬기롭고(이름값을 하는군요) 세련된 방식으로 돌파했습니다.

이 책이 출간시부터 큰 화제를 모은 건 물론 4부 이하부터 폭발적인 페이스(와 설득력)으로 달리는, "(우리가 살아남고 그들이 사라진 건)늑대를 개로 바꿔 동맹자로 데리고 다닌" 현생인류의 놀라운 선택이란 결론 때문이었죠. "최초로 개(늑대)를 길들인 인간"이야말로 종 전체를 위한 프로메테우스적 혁신을 이룬 은인이었으며, 잘 알려진 대로 "개 역시 인간이 필요했기에" 이 놀라운 동맹은 성공적이었고 또 지속적이었습니다. 저자는 A. 셰라트의 1980년대 연구(그간 정설로 여겨진)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현생 인류는 "가축"이 아니라 (인간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새로운 도구로써" 개가 절실히 필요했고, 녹록지 않았을 오랜 시행 착오를 통해 전략의 현실화를 이뤄냈습니다. 코르티코스테로이드 분비 수치가 현저히 낮은 종이 높은 호기심으로 탐색 기간을 길게 잡는 그 본성 덕분에 인간의 시행 착오 과정 역시 의미있게 단축될 수 있었습니다.

초보 군사학 상식에서 자주 하는 말이, 보통 공격에는 수비 측의 두 배 전력이 필요하다는 거죠. 여러 모로 보수적이고 현실 안주형이었던 네안데르탈인들과 달리, 현생 인류는 자신의 약점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부지런히 개선과 대안을 찾았으며, 자신의 종은 물론 다른 종에게서도 "동맹군"을 물색하고 실제로 말쑥한 협업을 이뤄냈습니다. 이랬기에 그들은 "생존을 위해 절실한 과제였던" (낯선 환경에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고, 침입은 곧 적응의 성공과 종의 생육, 번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시 잠깐 진주현 교수님의 서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흔히 보던 개조차 더 이상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책에서는 잠시 개 식용 풍습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저자에 의하면 개는 물론 늑대의 고기조차 단백질원으로 삼지 않은(최소한, 증거가 안 나온) 사실을 두고 "동맹에게 바치는 특별한 문화심리학적 동기"로 해석합니다. 우리 한국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위화감을 느끼는데, 역시 그래서 "침입종 규정"에 실감을 덜 느끼게 된 걸까요? "침입도 안 하고, 개고기도 먹겠다" 같은... (물론 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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