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칼릴 지브란 지음, 류시화 옮김 / 무소의뿔 / 2018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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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은 20세기 후반 들어 종교와 민족 사이에 벌어진 갈등과 분쟁으로 세계인들에게 참담한 인상만을 남겼지만, 본디는 백향목의 산지이자 수려한 풍경, 쾌적한 기후로 이름 높은 지역입니다. 이런 조건 덕분에 유대교의 경전(기독교의 구약)을 비롯, 각종 고문헌에도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유서 깊은 고장이기도 한데요. 칼릴 지브란은 바로 이런 나라에서 열두 살이 되던 해까지 자라고 이후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감성은 레바논의 조화롭고도 신비한 자연이 안긴 온갖 색채와 결을 지니고 있으며, 청소년기를 미국에서 지냈기에 그의 언어는 현재 지상에서 가장 풍성한 컨텐츠를 담은 논리와 표현으로 물들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한국에서도 이미 1980년대에 대학생들과 독서층을 상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베스트셀러이며, 일정 연령대 이상의 분들이라면 적어도 제목 한 번은 들어봤을 시집입니다. 한국에서는 이처럼 뒤늦게 알려졌으나, 칼릴 지브란이 문명(文名)을 떨칠 시절은 벌써 20세기 전반이었고 이때는 아직 최근 반 세기 동안과 같은 지역 분쟁상이 거의 발발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타고르와도 활동 시기가 일부 겹칩니다) 물론 만성적 빈곤, 오스만 제국과 서유럽 제국주의(특히 프랑스)의 이중 지배 체제 때문에 겪은 식민지의 질곡이 있긴 했습니다만.

시집이면서도 이 책은 주제별 아포리즘을 묶어 놓은 듯 뚜렷한 체제 안에 각각의 작품이 고루 제 자리를 찾아가며 실린 모습입니다. 읽어가며 느낀 점은, 혹 한 편 한 편을 따로 접했어도 여운이 깊게 남았을 텐데, 이처럼 26개 카테고리 안에 예쁘게 편집까지 마쳐져서 독자를 만나니(우리 독자가 작품들을 만나니) 그 울림이 더욱 각별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예언자>를 두고 성서의 언어를 사용했다고들 보통 평합니다. 기독교 성서 중에서도 시편이나 잠언의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이 책은, 시적 화자인 ("예언자") 알 무스파타의 잔잔하고도 초월적인 말 건넴으로 채워집니다. 오르팰리스 주민들, 나아가 우리 독자들- 아마도 삶의 진리가 목마르거나, 연인이나 가족과 헤어져 살을 저미는 고독에 몸부림치거나, 품은 이상은 높은데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이들은 간절히 이 현자에게 말을 건네고, "예언자"는 타이르듯 다독이듯 일생을 두고 깨달은, 혹은 신(이슬람의 신일 수도 있고 딱히 어느 종교에 한정된 존재가 아니겠죠)으로부터 건네받은 계시의 한 자락을 들려 줍니다. 말 그대로 "구하라, 주실 것이요.."를 설교, 수훈하는 예수의 목소리와도 같습니다. 신약의 4복음서 중 예수의 육성만 따로 본받은 듯 하지만, 종교적 색채보다는 삶의 비의를 넌지시 일러 주는 노인의 다사로운 훈계나 톨스토이의 정숙한 교훈과도 비슷합니다.

When you love you should not say, ‘God is in my heart, ‘ but rather, ‘I am in the heart of God.’

“‘신이 내 마음속에 계시다.'라고 말하지 말고, '내가 신의 마음속에 있다.’라고 말하라.” 류시화 시인은 이렇게 옮기네요. 지브란, 아니 알 무스타파는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요? 신은 누구의 마음 속에나 거하는 게 틀린 말이기라도 한가요? 신이 내 안에 있다고 하면, 왠지 이기적이고 스스로를 무람하게 높이는 듯한 느낌도 암시합니다. 그러나 내가 작아져서 신의 마음 안에 들어 있다고 하면, 그 마음 안에는 나의 이웃과 친구, 혹은 내가 적대하는 이들의 영혼까지 자리를 함께 나누고 마음을 터 놓을 여지까지 다 마련된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이런 말을 하게(혹은, 하지 않게) 된다는 걸까요.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절로 "나는 신의 마음 안에 머문다." 같은 고백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And is not the lute that soothes your spirit the very wood that was hollowed with knives?

이처럼 이 책에는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했던 지브란의 원문이 함께 실려 있어서 좋습니다. 류 시인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슬픔이 존재 속을 깊이 파고들수록 그대들은 더 많은 기쁨을 품을 수 있다. 그대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피리는 칼로 후벼 파낸 나무이듯이.”

어쩌면 우리 영혼도 슬픔으로 철저히 단련된 모양새, 재질이라야, 한층 웅숭깊어진 속에 더 많은 기쁨을 품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쁨을 몇 배는 더 깊이 느끼라고 사람은 슬픔도 겪게 마련이며, 더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 소중한 줄을 알라고 아픈 이별도 호되게 시련으로 치러 내는 것 아닐까 생각도 되네요.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이런 슬픔의 더께와 상처를 성장의 거름으로 쓰고 난 영혼을 두고, 마치 칼로 후벼 파 낸 나무로 만든 피리, 아름다운 곡조를 처량하게도 경쾌하게도 빚어내는 관악기에 비유한 건 역시 지브란이 아니면 입 밖에 낼 수 없는 통찰이요 도약입니다.

That which seems most feeble and bewildered in you is the strongest and most determined.
It is not your breath that has erected and hardened the structure of your bones?

“그대 안에서 가장 약하고 가장 흔들리는 듯 보이는 것이 가장 강하고 확실한 것이다. 그대의 뼈대를 일으켜 세우고 강하게 만드는 것은 그대의 숨이 아닌가?”

숨은 손으로 움켜잡을 수도 없고, 가까이 피부라도 대어 보지 않고서야 감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뼈대보다 삶을 더 깊은 근원에서 지탱해 주는 건 바로 숨결입니다. 생명은 숨의 들고 남을 멈출 때 비로소 종지부를 찍습니다. 숨처럼 약하게 보이면서, 동시에 숨처럼 강하게 모든 이치와 작용을 장악하는 건 세상에 없습니다. 레바논의 청아하고 쾌적한 바닷바람 숲바람을 동시에 맞으며 자란 영혼만이 감지해 낼 수 있고 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진리라 하겠습니다.

And as a single leaf turns not yellow but with the silent knowledge of the whole tree,
So the wrongdoer cannot do wrong without the hidden will of you all.

"나무 전체의 묵인 없이 나뭇잎 하나가 갈색으로 변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죄를 짓는 사람도 그대들 모두의 숨은 의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죄인 하나가 미꾸라지처럼 세상을 더럽힘도, 결국은 그를 사랑으로 감싸지 못 했거나 암암리에 죄악의 작은 씨를 그의 마음에 뿌리고 부추겼던 이웃들의 공동 연대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든 죄 없는 자가 먼저 나서서 저 여인을 돌로 쳐라"라고 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도대체 없을 뿐 아니라, 그 여인의 행실이 그처럼 타락하게 된 데에 이웃들의 방조와 묵인과 사악한 기여가 없었다고 누가 감히 장담하겠습니까?



시인이자 동시에 화가였던 지브란은 언어와 색과 면과 구상의 선을 모두 매체로 구사하여 시심과 궁극을 표현했던 셈입니다. 저렇게 단색으로 섬세한 얼굴을 그린 데에서 정말 블레이크의 분위기가 풍기기도 하고, 괴이하며 소름끼치는 형상이 많이 등장하는 블레이크의 작품 세계와는 소재 면에서 대척을 이루기도 합니다. 알무스타파(사실 띄어쓰기를 안 해야 맞는데, 섬세한 그가 이런 표기에도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했겠죠)의 얼굴은 지브란 자신 같기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도 닮았습니다. 어쩌면 내내 그의 작품 세계를 돌보고 충고하며 (사실상) 공동 작업까지 참여했던 그의 어머니가 눈빛 속에 입매 속에 머무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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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1 0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0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빙혈 2018-01-20 19:51   좋아요 0 | URL
헉 댓글은 자동으로 비밀 처리가 안 되는군요. 윗 대댓글은 급 수정했습니다.

2018-01-20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4 0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