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1 - 문학사를 바탕으로 교과서 속 문학 작품을 새롭게 읽다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1
채호석.안주영 지음 / 리베르스쿨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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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백범 김구 선생은 이렇게 말씀한 적 있습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의 영역 중 가장 빛나는 하나가 바로 "문학"입니다. 백범의 동시대에도 이미 한국(조선)의 문학은 재주 뛰어난 이들에 의해 그 아름다움을 활짝 뽐내었고, 그 찬란한 성과물들은 이 책에 이처럼 함뿍 그 정수가 녹아 있습니다.

p27에는 "마지막까지 일본 제국주의와의 타협을 거부한 진정한 지식인 현진건"이란 제목 아래 여러 컷의 사진이 제시됩니다. 좀 독특한 외양을 하셨던 염상섭과는 달리 현진건의 실제 모습은 다른 책(참고서류)에서 좀처럼 찾기 어려웠는데, 이 책은 그간 독자들이 자주 접하지 못했던 자료들을 이처럼 넉넉히 소개해 줍니다. 레퍼런스북에 작가 이름과 작품의 개요만 앙상하게 나오면 그 작품의 참된 의도나 주제를 이해하기도 힘들고 매 순간이 고역인 암기과목으로 전락하기 일쑤입니다. 헌데 이처럼 작가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함께 만난다면, 작품은 부호가 아닌 생명을 지닌 스토리로 독자들에게 진정성 갖춘 만남으로 와 닿을 수 있죠. 이 책은 여기 말고 다른 파트에서도, 예컨데 백석을 설명한 p223 등에서도 "게다가 얼굴까지 번듯했지요." 같은 친근감 있는 서술로 독자와의 거리를 좁힙니다.

진정한 천재성이란 특정 기법의 구사에서만 제한적으로 기량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전부터 확립되어온 모든 지식의 기반을 충실히 닦고, 그 위에 자신만의 고유한 기여를 더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이미 유년기부터 라파엘로처럼 데셍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만약 그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작정 입체파의 생경한 기교만을 추구했다면 일개 광인 이상 취급을 못 받았을 겁니다. 클래식이 먼저 있고 그 격(格)을 파괴(극복)하는 창의가 설 수 있는 건데, 백석은 영어, 러시아어 등 다국어에 고루 능통한 진정한 천재였고 그의 시대에 이뤄진 성과를 모두 흡수한 성실한 학습자였음이 책에도 잘 나옵니다.

"이런 것도 소설이 될 수 있냐?"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 씨의 ...>가 발표되었을 때 대중의 반응은 대뜸 이런 식이었습니다. 헌데 세월이 80여년 가까이 흐르고 어느덧 고전의 한 모범으로 작품을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마저, 이 작품을 접하고 받는 느낌은 이런 게 대부분 아닐까요? "시험에 나온다니까 공부하는 거지 뭐 이런 걸 소설이라고...?" 바로 이런 거리감과 낯섦을 극복하고, 시대를 앞서간 재사(才士)의 감성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게 공부의 핵심이고 목표입니다. 왜 구보씨는 배울 만큼 배웠으면서도 군중 사이에서, 매일 찾는 "다방"에서조차 알 수 없는 겉돎에 빠져들까요? 이는 어쩌면 학생들이, 이미 정평이 난 고전과 만나서도 마냥 친해지거나 그 장점을 바로 알아볼 수 없는 당혹감과 서로 통한 감정일 수도 있습니다. 책은 쉽고 직관적인 문장으로, 왜 박태원과 그의 분신인 작품 속 자아 구보 씨가 작중에서 이런 느낌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 독자에게 친절히 설명해 줍니다, 캐릭터 구보 씨가 거닐었던 1930년대 경성의 풍광도 함께 사진으로 제시하여 그의 감미롭거나 쓰디쓴 고독의 연원이 무엇이었을지도 짐작하게 돕고요.

"일반적으로 '타고 남은 재'는 사물의 끝을 의미합니다..." 책 p111에 나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한용운의 작품 세계에서 이는 사랑과 열정과 숭고한 이상의 새로운 시작을 뜻하기도 하는데, 시인이 우리가 다 잘 알듯 스님 신분이고 거의 모든 작품이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쓰여졌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불교적 세계관에서 완전한 끝은 어디에도 없고, 오히려 모든 단계나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자 완결입니다.

p27에는 20세기 초의 복식을 한 여성 네 분이 물레를 잣거나 다듬이질을 하는 듯한 사진이 나옵니다. 여성은 많은 차별을 받았고, 일제의 혹독한 식민 지배 체제에서 이는 이중의 질곡으로 작용했습니다. 신소설 작가 이해조는 (이 서평 앞부분에서 논한 여러 작가들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활동했는데, 그는 물론 친일 성향으로 많은 지탄을 받았지만 대표작 <자유종>에서만큼은 분명히 자리잡은 진보적 여성관으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까지 찬성과 지지를 이끌어 냅니다. 바로 앞에는 "... 오늘날처럼 TV 프로그램이 없었던 때라서 관민(官民) 공동회 같은 행사를 통해서나..." 백성들이 최신 지식과 시사 동을 접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이처럼, 작품 속에 제시된 여러 상황이나 주제는 그 시대의 제약과 한계를 인식하지 않고는 참된 의미를 파악 못 할 때가 많습니다.

pp. 19~23에는 다소 이색적인 작가의 작품이 나옵니다. 이해조 이인직 등과 함께 신소설 창작자의 대표로 언제나 거론되는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인데, 뜻밖에도 동물들이 풍유화한 캐릭터로 등장하여 인간사회의 온갖 모순과 비리를 성토한다는 내용이죠. 이 작품은 조선(정확하게는 합병 직전의 대한제국) 당대의 문제를 꼬집었다기보다 표면상으로는 동서양 불문하고 문명 국가 제반의 타락상을 비꼬았는데, 도둑이 제발저린다고 이 책은 통감부에 의해 판금조치가 내려집니다. 책에는 1909년으로 시점이 나오는데 다 알다시피 경술국치 1년 전이죠. 책에서는 "기독교에 의존하여 사회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 드는 아쉬움"을 지적하는데 제가 학창 시절 이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는 아쉬움이라기보다 "낯섦, 생경감"이 느껴졌습니다. 꼭 안국선이 그랬다는 게 아니라 당시 애국 계몽 운동 계열 지식인 중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많았고, 현세기복 풍조가 일절 배제된 청신하고 금욕적이며 보편적 박애주의로 충만한 건실한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는 점에서, 기풍이 타락한 구태를 일소하고 대신 지도이념으로 기능할 자격이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의 <날개>를 소개하며 마지막 장면의 배경으로 미쓰코시 백화점, 현재의 서울 중구 신세계 백화점 사진을 실어 둔 게 눈에 띕니다. 저도 1년 전에 핸드폰 바꾸러 저기 갔다왔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 노른자땅 한복판에서 시대의 유행과 멋을 단면으로 상징하며 위용을 뽐내는 모습이 흐뭇하네요. 이처럼 잘 알려진 천재의 작품이나 작풍(作風)이라 해도 그 배경이 된 건물, 분위기를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제시하는 건 어느 독자에게나 유익한 도움을 주고, 새로운 지평에서의 이해를 촉진합니다.

p126에는 "현대 희곡의 설레는 출발"을 설명하는데, 이 책은 여기서뿐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모든 장(章)에 지도를 곁들입니다. 문학사를 해설하는 책에 지도가 왜 끼어야 하는지 의아해할 분도 있겠으나, 중국, 소련(어느새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소련으로 바뀌었네요)., 일본 열도 사이에 낀 한반도(물론 아직 분단 이전)의 위치를 보여 줌으로써, 시대의 변천과 지정학적 제약 사이에서 문인들이 느낀 갈등과 현실 초극의 의지를 보여 주는 데 이만큼 효과적인 상기 장치도 없는 듯합니다. 간혹 원산 총파업, 6. 10 만세 운동 등 이정표적인 사건도 관련 지역과 함께 표시됩니다.

우리에게는 <문장강화>로 유명한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에 실린 한 작품인 "물"에서, 그는 노자적 세계관인 "상선약수" 즉, 물보다 더 선한 것은 없다는 초연한 철학을 드러냅니다. 유유무언이라는 성어도 나오고, 능인자안이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식민치하라는 혹독한 조건 아래에서도 어쩼든 지식인은 지식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시대의 질곡도 헤쳐 내어야 한다는 그만의 결기와 고뇌를 잘 드러냈다고 하겠습니다.

요즘은 스토리텔링과 이미지 중심의 학습이 대세입니다. 파편화한 암기와 지겨운 기계적 반복만으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응 못하고 낙오하는 인생이 되기 쉽다는 각성 덕분이겠지요. 스토리텔링과 이미지의 성공적인 내면화, 창조적 이식이 이뤄졌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무척 간단합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재미있게 한 편의 이야기를 마쳤다는 뿌듯함이 들면, 또 이를 바탕으로 나도 나만의 이야기가 하나 생겼다는 성취감이 생기면 그 독서는 성공입니다. 학생들뿐 아니라 성인, 학부형들도 혹시 자신의 학창 시절 아주 괴롭고 따분하게 문학, 국어 시간을 "때워야" 했다는 분들 있으시면, 이 산뜻한 책으로 새로 시작해 보시는 건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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