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전쟁 1 - 풍계리 수소폭탄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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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선생의 소설은 일단 읽기에 참 재미있습니다. 20년도 훨씬 전에 발표되어 그에게 일약 명성을 안긴 데뷔작 <무궁화꽃이 ...>도 그 표방한 주제에 대해서야 찬반이 엇갈렸을망정 숨가쁘게 흥미진진하게 독자를 몰아가는 이야기 실력만큼은 누구의 넋이라도 홀딱 빼 놓을 만큼 탁월했었죠. 장편(직전작) <사드>만 해도 4년 전 출간 당시에는 미군이 운용하는 이 요격, 탐지 시스템에 대해 시사에 어지간히 밝은 사람들이나 입에 올리던 토픽이었습니다. 김진명 작가 정도나 되는 분이 소설 소재로 삼았기에 그나마 인지도가 높아졌다고나 해야 맞겠는데, 2016년 중반 당시 정부가 한반도에 이를 전격 배치하고 중, 러 측이 이에 거세게 반발하여 국제 분쟁으로까지 비화하고서야 비로소 우리 국민은 물론 전세계가 그 심각한 함의를 깨달았으니 말입니다. 이때부터 그는 슬슬, 소설가를 넘어 "예언자"의 범주에 한 발을 걸쳐 놓았던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신작 역시, 제목만 "미중 전쟁"인 게 아니라, 그 무대도 전세계에 걸쳐 있고, 인물들도 강대국을 이끄는 실존 인물들이 실명 그대로 나오는가 하면, 주제와 메시지 역시 한 민족의 절박한 생존 문제를 떠나 세계 평화(혹은 전쟁)를 두루 논할 만큼 꽤나 심각합니다. 이를 픽션화한 활극 속에 넣고 감상하니 일단 재미는 있습니다만 문제는 작품 속의 세상이 우리 우주와 그리 먼 거리를 두지 않았을 만큼 서로 닮아있다는 점입니다.

김 선생의 무대 세팅은 그저 평균 수준의 작가가 지닐 법한 상상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 돌아가는 이치나 위태위태한 국면 각각의 묘사가, 이 현실과 별 차이가 안 날 정도로 정교합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기에 이런 기괴한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는 분들은 한번 책을 폁쳐 읽어 보십시오. 고민을 많이 하면 한 분들일수록 "이 안에 이토록 많은 답이 있었군!" 하는 감탄이 절로 들 것입니다. 물론 어떤 건 지나친 논리의 비약도 있고, 현실에 맞지 않는 무리한 단언(캐릭터들의)도 보입니다만(2권 리뷰에서 잠시 짚겠습니다) 소설적 재미를 위해 그 정도는 독자들도 눈감고 넘어갈 수 있으며 오히려 은근 즐기기까지 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주인공은 인철인데 김 작가님의 전작들에서처럼 애국심 충만하고 능력 뛰어나며 젊고 미남이기까지 한, 아주아주 평면적인 사기 캐릭터입니다. 그는 페터 요한슨이라는 45세의 신들린 펀드 매니저와 접촉하다, 해당 인물이 갑자기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탐욕을 부리는 건 잡범, 범죄자들뿐 아니라 높으신 분들, 가진 자들도 간혹, 우아하게 즐기는 일종의 "스포츠"인데, 혹여 일이 잘못되더라도 정말 거물급이 책임까지 지는 지경까지 가는 건 우리가 거의 못 봅니다. 대개는 말단 실무자가 모든 혐의를 쓰고 대신 죽으며, 대신 남은 가족이 어느 정도의 보장과 배려(숨은)를 받는 선에 모든 비위가 덮이는 식이죠.

헌데 이 요한슨 씨는 그런 조무래기도 아니고 지극히 두뇌 회전이 빠르며 결기 또한 누구에 뒤지는 축이 아닙니다. 누굴 대신 죽이고 빠져나왔으면 나왔겠고, 혼자 죽느니 모시던 높은 분 몇은 보복 삼아 같이  물귀신처럼 끌어들이고 죽어도 죽을 인물이죠. 그런데 살해, 암살도 아니고 깔끔하게(?) 외관상 완벽한 자살로 생을 마무리했습니다. 이거 뭔가 있는 겁니다. 막후에 도사린 게 여간 큰 거물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십억, 조, 단위로 부를 축적한 이들도 주위에서 흔히 보는 수준의 부자는 아니지만, 이건 그 정도가 아니라 세계 일정 부분을 갖고노는 레벨의 실력자들이 뒤에 버티고 있단 소립니다. 우리의 인철이 지금 심각한 수렁에 한 발도 아니고 두 발이 다 빠진 셈인데, 김진명 선생이 만든 주인공답게 그는 정의감과 지적 호기심을 발휘하여, 그저 목숨만 건져 나올 생각이 아니라 거대한 음모를 밝히고 싶어합니다. 위기 앞에 이처럼 쫄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오히려 판을 뒤엎을 전략까지 구상하는 건 본인이 여간 잘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스텝이라 하겠습니다. (뭐 김진명 소설이니까요)

비엔나(빈)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누백년 수도였으며 이곳 번화가와 극장을 거쳐간 세기의 예술가들만 해도 부지기수입니다. 학자나 사상가나 걸출한 문인들은 또 얼마나 많이 배출되었습니까. 헌데 양차 대전 패배 이후 지금은 가난한 내륙국으로 국세가 쪼그라들어 그저 서유럽 평균 정도로 생활을 영위하겠거니 싶은 정도지만, 이 소설을 읽고 처음으로 그처럼이나 많은 자금이 오가며 세계의 금융 중심 중 한 곳 노릇을 이어가는지는 소설을 읽고 처음 알게 된 분들도 많을 겁니다. 슈나이더 총재와 인철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과 눈치 싸움도 볼만하지만, 사실 이 소설의 진짜 묘미는, 그저 실명으로 대놓고 등장하는 세계 거물들의 생생한 개성 묘사에 있습니다. 정말로 저 사람들, 대중의 시선이 안 미치는 곳에서는 저런 행동과 생각을 일삼겠거니 싶은, 너무나도 실감나는 서술 때문에 독자는 거의 미치기 직전입니다. 특히 트럼프나 푸틴을 보십시오. 이들의 충돌과 미묘한 타협과 배신 등 정신없이 돌아가는 정치 게임은 2권에서 밀도의 극한을 달리는데, 이런 솜씨는 댄 브라운도 쉽게 흉내내기 어려울 듯합니다.

인철 같은 잘난 청년한테 또 여자가 안 따를수 없는데, 일단 이 1권에서는 최이지가 등장합니다. 출중한 미모에다 수개 국어에 능통한 어학 실력에다 날쌘 몸놀림에 정확한 판단력에 빵빵한 집안까지... 남자들은 인철을 보며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어도 여성 독자라면 배가 아파 페이지를 못 넘길 만한 "미친 엄친딸"입니다. 이런 분이 또 위기에 몰린 남주를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구하는 걸 보면 참 정해진 공식을 밟는다 싶어도 매번 그런 클리셰에 끌리는 게 우리 독자들이니 어쩌겠습니까 이거. 김 작가님 세대는 확실히 불어, 독일어 구사 능력에 대해 각별한 동경을 품는다는 걸 이 대목에서도 확인하게 됩니다.

케이맨 제도는 외국 장르소설이나 헐리웃 영화에서 이른바 조세회피처로 단골 세팅되는 카리브해상의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여기에 대해 활극 장르물 많이 읽으신 분들은 이미 내 고향이나 되는 양 관련 사연을 훤히 꿰고 있겠지만 김진명 작가 버전으로 듣는 이야기는 또 맛이 다릅니다. "음, 그래, 뭐 역시 그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구만." 그러나 방심해선 안 됩니다. 익숙하고 흔한 교차로에서 "살인"이 진짜 벌어지는 일이 없듯, 얼굴 검고 이름자도 지방색이 풀풀 풍겨도 당사자가 정말 그 고장 사람이란 법도 없고 케이맨 제도 역시 장소의 맥거핀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예상을 반드시 빗나가는 한 수가 예비돠었으니 기대는 잔뜩 걸어도 됩니다.

비록 캐릭터 최이지의 입을 빌려(아니, 대통령[이 신작의 한국 대통령은 대놓고 문재인 현 대통령으로 설정되었습니다]께 보내는 친서 속에서) 설파되는 제안이지만, "어떻게 이 나라가 장기 불황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활기찬 무역 대국으로 다시 살아나며, 건전한 내수의 엔진이 재가동될 수 있을지"에 대해 탁월한 견해가 여러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 건, 작가 김진명의 평소 지론과 국가관의 반영이라고 봐도 좋을 듯합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맞는 말씀으로, 위정자도 위정자이지만 먼저 우리 국민들부터가 낡은 사고를 버리고 현실을 직시할 필요를 느끼게 하는 고언이었습니다.

실존 인물들이 실명을 걸고 벌이는(?) 대혈투는 2권부터 본격 전개되니 이 1권에서는 작가가 세심하게 깔아둔 밑밥을 꼼꼼히 발견해 내는 재미에 치중하시면 좋겠습니다. 여기 읽을 때는 몰랐는데 2권에서 여기 대해서도 하나하나 반전이 마련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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