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인 스노우 팝콘북
단야 쿠카프카 지음, 이순미 옮김 / 서울문화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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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걸 인 스노우"는 둔기로 머리를 세게 맞고선 회전목마 아래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즉사한 소녀 루신다의 사체가 눈 속에 파묻힌 채 발견된 사실을 가리킵니다. 내린 눈이 모든 걸 덮었으니 증거가 남지 않았으며, 이 살인 현장을 본 사람도 현재까지는 아무도 없습니다. 무심히 내리는 눈은 쌓이고 쌓여 모든 걸 덮습니다. 한때 불타올랐던 사랑, 집착, 연민, 증오, 질투, 순간의 정념과 판단 미숙으로 저질렀던 과거까지도 말입니다. 죽은 소녀도 장례식장에서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아련한 추억과 사랑의 대상으로 기억되었으나, "눈 속에 파묻히기 전" 그녀의 실상, 실체, 본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누구의 본 모습이 어떠한지는, 혹시 그(그녀)의 스토커가 가장 잘 아는 법일까요? 이 또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스토커는 대개 자신의 기대를 대상에 투사할 뿐이며,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소년 캐머런은 더군다나 성격이 좀 이상한,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예술가 기질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러 모로 가득한 별난 애입니다. 캐머런은 이웃에 사는 어느 소녀(말 그대로 "걸 넥스트 도어"더군요)를 두고, 짝사랑인지 동물적 본능에 끌린 스토킹인지 그도저도 아니면 광화사처럼 예술로의 승화 매개로 삼은 건지 모를 이상한 동기에서, 참으로 이상한방법으로 매일같이 엿보고 다닙니다. 소녀의 부친 헤이스 씨는 이 소년의 상궤를 벗어난 행동 패턴을 눈치 채고 점잖게 경고도 줍니다. 그 정도 경고만으로도 이 소심한 소년은 눈물에 콧물에 소변(...)까지 지렸을 만합니다.

캐머런은 소설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그 모친 신시아는 본문 중에서 그저 "엄마"로 자주 호칭될 만큼, 거의 1인칭 주인공으로 봐야 마땅한 캐릭터인데도 그 정도 자리까지 오르지는 못합니다. 소설에는 글쎄 매사에 시니컬하다고 봐야할지, 감정 형성에 큰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지(그 동생 에이미는 "언니는 인간 맞어?"라고 묻기까지 하더군요), 아니면 사춘기 소녀 특유의 열등감과 불안감 때문에 원치 않게 괴짜 코스프레를 하는 건지(속은 무척 여리고 감성적이면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름은 제이드인데도 "셀리"라는 다른 인격을 하나 만들어 내어 노숙자 하워드와 소통하고 가명(가당찮게도 예명?)으로 극본도 쓰는 걸 보면 경계선 인격 장애가 아닌가 싶기도 한데, 여튼 읽으면서 참 기분 나쁜 개성이다 싶었습니다. 생긴 것도 시원찮은 애가 행동까지 저러고 다니니(원래 더하죠) 대체 누구한테 사랑을 받겠나 싶고 말이죠. 여튼 놀랍게도 작품 중 1인칭을 함부로, 시종 일관 쓰는 특권은 이 제이드(셀리)의 것입니다. 뭔가 의미심장하죠.

캐머런의 (도망 간) 부친과 젊은 시절부터 파트너로 내내 활동했던 경찰관 러스(러셀 플레처)는, 캐머런의 부친 리와 많은 비밀을 공유했습니다. 경찰직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섬세한 성격과 감정의 소유자였던 리는, 아름다운 부인 신시아가 멀쩡히 곁에 있는데도 다른 여인과 바람을 피웁니다. 이 여인이 심하게 폭행당한 후 죽자, 리는 (당연하게도) 용의자로 입건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고, 마을 사람들은 경찰 제 식구 감싸기라며 사정없는 비난을 퍼부으며, 이 와중에 리는 가정을 버리고 도피합니다. 리의 마지막 당부는 "러스, 내 아이를 잘 돌봐줘."였습니다. 원치 않게 친구(선배) 아들을 제 아들처럼 주시하게 된 러스도 러스지만, 소년 캐머런 역시 아버지의 이 불미스러운 스캔들이 내내 업보처럼 자신을 따라다니게 됩니다.

예술 쪽에 특별한 재능이 있어도 한 분야로만 발달하는 게 보통인데, 캐머런은 희한하게도 음악과 미술에 모두 능합니다. 학부형들과 친구들 앞에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할 때, 그는 말그대로 무아지경에 빠져듭니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해서 이 정신적으로 불안한 아이가 무대 공포증 비슷하게 큰 사고나 쳤단 소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마치 다른 영혼이 빙의한 듯 신들린 연주를 해냈다는 소리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후한 미남자인 오 선생님(일본계라고 하네요)은 사실주의 화풍의 천재라며 또 이 캐머런은 감싸고 도는데, 그 모친 신시아에게 다분히 흑심을 품은 까닭도 있지만 이 양반 거짓말은 또 안 하는 타입이라, 재능의 평가에는 거품이 전혀 끼지 않습니다.

이처럼 소설은 한 마을의 다양한 개성 다양한 기질 다양한 사연 다양한 과거(!)를 지닌 인물들을 돌아가며 조명합니다. 이 사연은 때로 먼 과거를 배경으로 전개되기도 하고, 루신다가 죽기 불과 며칠, 몇 달 전까지만으로 거슬러올라가기도 합니다. 미스테리도 미스테리지만, 작은 마을에 옹기종기 모여살며 표면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평온한 일상을 꾸려내는 듯한 사람들이, 그 속에는 저마다의 지옥과 활화산을 품고 산다는 실상이 무척이나 충격적입니다. 그리고 이를 우리 독자에게 캐스팅하는 이는, 1인칭 화자의 특권을 혼자 누리는 바로 그 소녀 제이드이고 말입니다.

경찰관 러스는 제이드와 캐머런에 비하면 겉도는 인물, 아저씨인 것 같아도(물론 스물 한 살 청년 시절 과거도 자주 플래시백됩니다) 아픔과 트라우마와 미칠 듯한 갈등(겉으로는 안 드러납니다)을 겪는 이는 바로 이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라틴계 이네스와 일찍 연을 맺었으나, 어느날 정성들여 차려 준 멕시코 전통 음식을 너무 맵다는 이유로 손도 대지 않자 이네스는 그날부터 남편에게 정이 확 떨어집니다. "이 바보 같은 그링고는 내 안의 감정, 정서, 영혼을 전혀 이해 못 하고 있다." 근데 제 생각에는, 이네스 입장에서, 남편이 음식에 손도 안 대었다는 것보다, 싫으면 싫다고 말이라도 분명히 하지 좀비처럼 멍하게 있었다는 게 더 진저리쳐졌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러스의 처남인 거인 이반은 형을 살고 나와서는 느닷 신흥 종교(가톨릭의 변종이라고 하네요?흠)에 귀의해서는 매부에게 준엄하게 충고까지 합니다. "자네는 범죄자들을 체포하고 다니니 스스로가 꽤 우월한 사람처럼 느끼지? 범죄자 중에 당신보다 훨씬 인간다운 사람이 많다는 걸 죽어도 자넨 모를거야." 이 말에도 러스는 딱히 반박을 못 합니다. 리의 그 사건이 있은 후로 러스의 몸에서는 뭔가 혼이 빠져나간 것만 같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사연이 "DNA처럼 나선형으로 꼬여들어가는(책 중에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중에, 우리는 정작 "눈 속에 파묻혀 죽은 소녀의 죽음" 그 진상에 대해서는 잠시 잊기도 합니다.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요? 평소부터 루신다를 질투하고 미워하던 제이드? 가질 수 없는 걸 가지고 싶어했던 캐머런? 알고보니 뒤에서 호박씨 까는 엉큼남 오 선생? 덩치도 크고 반사화적 성향 가득한 전과자 이반? 범인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목격자가 안 나타났던 이유도, 충격적인 사건의 실상과 결정적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고요. 전에 제가 읽은 어느 한국 작가의 장르 소설과 분위기, 결말이 무척 비슷한데 내용 누설이 될 수 있으므로 서평 중에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미스테리물로 보기보다 사람들의 어두운 기억과 상처를 교묘히 더듬으며 공감과 충격을 유도하는 이야기 솜씨가 놀라운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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