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서문
버크.베카리아.니체 외 27인 지음, 장정일 엮음 / 열림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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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이 위대하다고 해서 반드시 본문(과 결론)까지 위대하라는 법은 없지만, 서문이 시원찮으면 그 뒤의 내용은 읽어볼 필요도 없이 무가치한 내용이라는 게 이 책 편자 장정일 작가의 주장입니다. 장정일 작가는 그간 많은 독자(열혈 독서가이기도 한 자신을 포함하여)들이, 서문은 상대적으로 소홀히하고 본문에만 치중한 독서를 하지는 않았는지, 지도(map이든, 혹은 guide이든[한자로는 서로 다르지만]) 없이 무작정 모험에 뛰어드는, 그래서 극적인 감흥보다는 오독이라는 함정에 빠질 위험이 무척이나 큰 여정을 자초하지는 않았는지, 더 즐거운 여행("독서")과 더 진지한 탐독에의 길을 권하기 위해 이 책을 펴낸다는 취지를 밝힙니다. 물론 이 책의 "서문" 중에서지요. 이 "서문"은 그간 왜 장정일 작가의 신작 신저 활동이 뜸했는지에 대해서도 약간의 암시를 그의 팬들에게 줍니다.

장정일 작가에 의해 선정된 여러 "빼어난 서문"들은, 그저 서문이 빼어나다고 해서 뽑혀 나온 게 아니라 그 서문이 담긴 책 자체가 위대한 명저라서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책을 이끄는 단서, 비밀번호가 얼마나 그 본체의 위대함에 걸맞게 위대하게 쓰여졌는지를, 이 책을 읽고서 확인해 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이 그 서문들이 실린 위대한 저작은 모두 30권인데, 이름난 고전들이긴 하나 역시 우리 독자들이 제목을 들어봤다는 사실만으로 잘 안다고 착각하고 넘어간 저술들이 꽤 많을지 모릅니다.

책을 읽으며 놀란 건, 어느새 이런 위대한 저술들이 한국어로도 꾸준히 번역되어, 장정일 작가 같은 분에 의해 "발견, 편집"되어 이처럼 책 한 권으로 그 서문들이 엮일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번역자들의 면면도 뛰어난데, 독서 환경이 이쯤이나 갖춰졌는데도 여전히 고전들이 미답 미독 상태라면 그건 독자의 게으름을 어지간히 타매하고도 남을 만하다 하겠습니다. 이 책은 편자의 의도대로 위대한 서문이 얼마나 그 본문을 잘 요약, 예고, 압축하는지"를 확인하는 의의도 있겠지만, 채 읽지 못한 고전들의 흥미진진한 teasing을 즐기고 나아가 공부한다는 효과도 매우 클 듯합니다. 책 뒤에는 장 작가가 저본으로 삼은 원저들이 일일이 소개되었고, 저 역시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이들 중 몇 권을 대출, 구입해서 꼭 완독할 생각입니다. 정말로 서문만 읽고 어디가서 아는 척을 한다면, "위대한 서문"에 감화받은 보람조차 없는 위선자나 속물이 아니겠습니까.

명저의 서문이라고 해서 반드시 독자의 무지와 비겁함을 신랄히 꾸짖거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질책만 담긴 건 아닙니다. 반대로 (장 작가도 그런 말을 합니다만), 권력자와 부호에 굽신거리며 책을 출간하게 해 준 재정적 후원과 검열 과정상의 관용에 과도한 감사와 아부를 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여튼 우리는 그런 민망한 언사와 관행을 통해서도 당대 사회상의 일면을 엿볼 수 있고, 현재 우리가 누리는 출판과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재삼 확인, 각성하게 됩니다.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는 군사학 교본에서 마치 클라우제비츠의 여러 교리나 명언들처럼 자주 인용되는 명언을 남겼는데, 바로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 서문은 황제에 대한 굴신이나 아부가 아니라, 언제나 유력한 장군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황제의 심기를 최대한 편안하게 하고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하면서 애국심과 우국충정 가득한 조언을 상주하는 뜻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우아한 표현이나 비범한 천재의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은 채" 자신이 그간 변방에서 복무하며 후임자나 동료에게 매뉴얼로 전수할 만한 유익한 군사 교리를 간명하고도 실용적으로 정리한 본문에 앞서 그 취지와 목표를 서술한 이 서문은, 위대한 장군의 문장과 말솜씨가 어떤 미덕을 갖춰야 하는지 잘 드러내보인다고 하겠습니다.

바보들이 타고다니는 배는 용도나 구조가 그리 운명지워졌기에 바보 아닌 현자는 절대 태울 수 없습니다. 바보들은 바보 배를 타고다닐 때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을 깡그리 잊고, 같은 바보들 사이에서 열등감을 희석하며 세상의 표준과 천도를 전복하며 바보 특유의 쾌감을 만끽합니다. 현자 제바스티안 브란트는 장 작가의 해설에 나오는 대로 에라스뮈스나 보카치오에 앞서 풍자 정신의 정수를 선보인 선각자였는데, 다만 권력자나 위선적 성직자만 풍자한 게 아니라 바보 특유의 본성으로 질서를 어지럽히고 허풍과 참언, 궤변을 일삼는 하층민 무지렁이 바보들에 대해서도 통렬한 조롱을 퍼붓습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에라스뮈스의 격언집 서문에는, 16세기 네덜란드인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고전 그리스어 어휘가 난무합니다. 하긴 동로마 제국이 망하고 인문학 서적과 학자들이 대거 아드리아해 이서(以西)로 유입, 망명해 온 사정을 그대로 반영하기도 하며, 본인 자신이 그리스, 라틴 고전에 막힘 없이 달통한 석학이었기에 어떤 논지를 펴고 문헌을 분석해도 이런 황홀한 방법론을 마음껏 과시, 적용할 수 있었겠죠. p51 중간쯤에 나오는 <수다 사전>은, 그 바로 옆에 로마자 철자가 병기되었듯이 Suida(Suda도 맞는 표기입니다)라고 쓰며, "수다 떤다"고 할 때 그 수다가 아님은 명백합니다^^ 이 서문에서 저술되는 다양한 예문, 예증과 이론은 사실 서문이라기보다 그 자체로 완결, 독립된 훌륭한 수사법(rhetoric) 강의입니다.

서문의 중요성을 재확인, 절감하게 된 계기 중의 하나로 장 작가가 중요하게 거론하는 책은 열한번째로 등장하는 사드 후작의 <사랑의 범죄>입니다. 장 작가는 행여 일탈적 극단적 유미주의에 자신이 혹 일말이라도 동조나 한다는 오해를 피하고 싶었는지, 이런 괴물의 지향에 조금이라도 공감해서 이 서문을 발췌한 게 아니라, 그의 문학적 족적에 왜 그리도 많은 프랑스 지성인들이 소중한 시간과 정력을 기울여 관심을 쏟았는지 "그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는 의도를 (역시 서문에서) 밝힙니다. 이 대목뿐 아니라 책에서 인용한 모든 "서문"들은, 그저 텍스트만 인용된 경우도 있고, 원주와 역주가 함께 실린 경우도 있는데, 후자의 경우 권말에 후주 형태로 모두 빠진 편집입니다.

p357(의 재인용 원주)에 보면 사드 후작은 펠루티에의 <켈트 족의 역사>의 한 대목을 거론하며 헤라클레스의 어원이 켈트어에서 왔음을 주장합니다(특이하게도 이를 일반명사, 혹은 직분의 명칭으로 새기고 있네요)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의 거의 일치된 결론, 정설은 "헤라의 영광"이라는 그리스어가 그 어원이라는 쪽이니 행여 현대 독자들이 읽고 오해는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 사드 후작이 원용하는 펠루티에는 역사학자 시몬 펠루티에이며, 사드 후작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생존,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장 자크 루소는 위대한 계몽주의 사조가 완성되는 데 큰 기여를 한 불멸의 지성이지만 정작 자신은 주장하던 신조와 현저히 다른 삶을 살아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 모순적 인물이었죠. 책에서는 그의 대작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서문을 뽑아 놓았는데, 한 줄 한 줄에 통찰과 위엄과 권위와 총기가 서린 문장도 최고지만, 역시 후주에 보면 그가 특별히 이런 어휘, 표현을 쓰게 된 배경 분석이 잘 나옵니다. 제네바는 "프로테스탄트의 로마"라고 불릴 만큼 유명한 신학자들이 활동했고, 상업적으로도 크게 번성한 "위대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제네바의 정치사회적 구조가 어떠했는지를, 이 서문과 주석을 통해 우리 독자들은 흥미롭게 엿볼 수 있습니다.

장 작가가 개인적으로 매우 매혹되었을 법한 보들레르의 <악의 꽃(들)> 서문도 실렸습니다. 시집의 서문답게 역시 시의 형태인데, 이에 대해서는 역시 이 책 서문 중에 장 작가가 자신의 지론(?)을 간략히 언급한 대목이 있으니 꼭 되돌아가서 참조할 필요가 있네요. 막스 뮐러의 소설 <독일인의 사랑> 서문은 매우 짧지만 소설의 서문이 어떤 구실을 해야 하는지 이보다 더 의미심장하게 일깨우는 모범도 드뭅니다. 과학자의 저술은 어디까지나 본문의 논증과 상술에 그 진가가 놓인다고 여기는 이들이라면, 장 작가가 작심하고 뽑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얼마나 품위 있고 유려하며 짙은 인문 향취를 풍기는지 확인할 수 있겠네요.

장 작가는 서문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서문을 꼼꼼히 읽으면 이후 집필 과정에서 저술가가 당초의 계획과 이후의 성취가 어느 지점에서 미묘히 어긋나는지 알 수 있다." 우리들의 다짐이나 작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의 것이라도 초심은 순수하고 "위대"하지만, 중간 과정과 결과는 누구보다 스스로가 창피해 똑바로 응시할 수 없을 지경이죠. 위대한 지성의 발걸음은 그나마 이 정도밖에 초심과의 유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겸허히 옷깃을 여밀 수 있고, 동시에 사람인 이상 완벽한 초심에의 회귀, 완성 수렴은 있을 수 없음을 알고 마음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위대한 고전의 통로로 우리를 이끄는 이 서문들을 세밑에 읽어 내고, 내년에는 고전 완독의 당찬 포부를 다져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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