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 - 약사.대학생.직업 전문가가 들려주는 약사의 모든 것 꿈결 잡 시리즈
고기현 외 지음 / 꿈결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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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가운을 입고 상냥한 미소로 동네 주민들을 맞아주며 가벼운 질환 외에도 인생사나 공동체 속의 고충 상담도 도와 주던 약사(꼭 여성분에 해당하는 건 아닙니다. 남자분도 이런 타입이 있었어요)는 어린이들에게 충분히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한 직업입니다. 모든 직업이 마찬가지이지만,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나와 적성이 맞는 게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따로 있습니다. 살벌한 수능 점수가 문제가 아니라, 내 성격 내 천품과 맞지를 않으면 평안 감사를 줘도 수행하기 어려운 거죠. 사회에 나와 보면 공부머리와 일머리가 다르다는 점 새삼 실감한다는데, 약사 같은 경우는 공부머리라고 해도 방향성이 좀 다릅니다.



이 책에 인터뷰가 실린 어떤 분은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 학교 공부도 힘들었지만 자격을 취득하고 사회에 나와 보니, 그저 시키는 바만 열심히 하면 되는 학교와는 달리 사회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이 판단해야 하는 점이 훨씬 힘들었다...." 사실 이 말은 약사뿐 아니라 모든 직업, 직종에 해당 안 되는 바가 없습니다. 약학 공부란 스토리가 없고, 어찌보면 건조하고 따분한 화학 지식 체계를, 토굴 속에서 마늘과 쑥만 먹으며 참고 인간 되기를 기대하는 곰처럼 묵묵히 해 나가야 하는 고충이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 인터뷰가 실린 다른 어떤 분은, "... 스토리가 없기에 스토리를 억지로 만들어 나가며 힘든 공부를 했다"고 고백도 하시더군요. 요즘 같이 즐길 게 많은 시대에, 한창 때 좋은 청춘을 즐기기도 해야 하는 대학생들이 이런 힘든 공부를 이어나가기란 그리 쉬운 결단만은 아닙니다. 선배들의 진솔한 고백이 잔뜩 실린 이 책을 읽고, 사회에 나온 후의 진로도 진로이지만 우선 공부 자체가 나와 과연 맞는지 꼼꼼히, 심각하게 검토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꿈결JOB 시리즈 "약사"편은 처음에 펼쳐 들고 좀 놀랐습니다. 앞선 시리즈는 두께가 두툼했는데 이 책은 좀 얇은 편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역시 꿈결 기획답게, 버릴 내용이 하나도 없고 뻔한 상식성 정보가 중복되질 않아서, 다 읽고 나니 뒷목이 다 뻐근할 정도였습니다. 꿈결JOB은 정확성도 정확성이지만 솔직한 정보를 담아서 좋다는 게 제 느낌인데, 현재 약대가 6년제이고 입학도 어렵지만 졸업한다고 해서 반드시 안정적인 진로가 보장된다는 법도 없습니다(사실 이는 40년 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네 한 골목에도 웬만해선 약국이 20군데가 넘어서 경쟁이 치열했죠. 초기 투자금도 많이 소요되고...).

그래서 이 책 중 인터뷰하신 약사님들을 보면(이미 약사 자체가 확고한 전문직인데도) 투잡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더군요. 물론 투잡도 시시한 생계형 투잡이 아니라, 다른 "전문직"을 골라 두 분야에서(다른 사람 한 분야에서도 제 밥값 못하는 일이 잦은데) 맹활약하시는 분들입니다. 아무래도 약대에 들어갈 정도면 머리가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고난도 자격증을 취득하는 데에도 그리 큰 추가 노력이 필요하지 않고, 또 약대를 가긴 했어도 적성이 다른 쪽에 더 컸음(물론 약사 적성도 뛰어나지만)을 발견하곤 일 욕심과 자아실현 욕구를 발휘활 수도 있는 거죠.



백진희 선생님은 병원 약사입니다. 어린 독자들은 병원에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만 계시지 약사분이 다 있나 하고 어리둥절해할 수도 있는데, 이 글을 읽어 보면 약사의 진로가 얼마나 다채로운지, 그리고 숨겨진 고충과 보람이 얼마나 큰지도 짐작이 가능할 겁니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 건 공병의 잔여물 제거 작업을 백 선생님이 하고 계셨는데, 친정 아버님이 반찬을 주려 오셨다가 그 모습을 보고 밤에 한숨도 못 주무셨다는 겁니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러 허드렛일 담당으로 좌천되기라도 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공부 잘하고 영민한 따님을 금이야옥이야 양육하여 힘들게 이대까지 진학시키시고 버젓한 병원에 일자리를 맡게 하여 한시름 놓았더니, 따님이 그런 힘든 일을 하시는 걸 보고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셨겠습니까.

이는 물론 다분히 오해에서 비롯한 해프닝이지만, 토, 일에도 당직 근무를 서신다거나 (무려 17년 전 일이지만) Y2K 버그를 대비해서 세밑 신년에도 철야 근무를 선다거나 하는 게, 어디 예사 사명감으로 감당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백 선생님은 "...이미  PEET 시험도 치르고(백 선생님께서는 그 세대가 아니시겠죠), 각오와 다짐이 단단히 섰을 텐데도 조금 힘들다고 사직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며 젊은 세대의 다소 안이한 마인드셋을 지적하십니다. 어떤 약사의 부모는 백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애를 얼마나 혹사시켰으면 몸살까지 났겠냐"며 항의도 했다는데, 준비 덜 된 후배 약사 업무 지도까지 맡아 고충이 심했던 백 선생님으로서는 참 기가 막힐 일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하지만 백 선생님께서도 어느 분의 귀한 따님이시고, 약사까지로 키워 놓으셨다면 그 부모 되는 분들의 자녀 아끼는 마음이 어떨지야 백 선생님 본인이 너무도 잘 아시겠으므로 그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이니스트 바이오제약에 근무하시는 고기현 선생님은 이 회사의 마케팅 총책이십니다. 물론 마케팅 총괄역과 일반 현장의 영업사원은 대우나 고충 면에서 당연 천지차이지만, 저는 처음에 으레 약사 하면 그 약국에 영업 뛰러 오는 영업사원과 솔리시터- 클라이언트 관계이니 당연히 서로 반대 입장이라고만 여겨졌지, 약사가 영업 분야에서 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습니다. 허나 고기현 선생님의 사연을 들어 보니, 오히려 이 일 역시 약사 아니면 맡을 수가 없는 직분이더군요.

앞서 백 선생님도 "...이런 단계에서부터 쉽게 좌절하고 피로를 느끼면 앞으로 더 힘든 일은 사회에서 어떻게 맡겠는지" 개탄하시는 대목이 있었는데, 고 선생님은 "회사라는 거대 조직에서 필수로 익혀야 할 대인 응대 요령, 입체적 관계의 통찰, 정치와 인사 고과의 미묘한 이치" 등을 잘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자기 발전에 엄청 유리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게 나이로 정하는 연공서열식 권력 관계인데, 고 선생님의 경우 자신보다 나이 어린 상사 밑에서 일해야 하는 고충이 그래도 많이 덜어지는 편이었다는군요. 약사라는 전문직의 휘광이 있기 때문이죠. 기자가 "특종"이 일생의 사명이듯, 제약회사 직원은 "신약 개발(사실 이쪽이 훨씬 어렵습니다만...)" 하나를 바라보며 고된 일과를 버팁니다. 1조원의 매출이라.... 그 직원분이 회사에서 얼마나 큰 자긍심과 성취감을 누렸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사라지고 말 직업들이 요즘 여럿 거론됩니다. 제 생각에는 창의력도 없고 꼼꼼히 알고리즘을 분석할 능력도 없는 월급 루팡 삼류 좀비 프로그래머들이 제일순위로 사라지지 않을까 싶은데, 이범진 선생님은 아주대학교 약대 학장이십니다^^ 선생님은 서울대 약대를 나오고 그간 교육 분야에 긴 세월을 재직, 헌신하다 현재 산업계의 현실이 가장 거센 풍랑을 맞는 작금 거대 교육기관의 최고위 관리직에 오르신 셈인데요. 학장님께서는 "오히려 4차 산업혁명을 맞아 기계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약리의 탐구, 미래에의 통찰, 인간에의 헌신" 등 덕목이 요구되는 게 약사의 본분이며, 이런 약사를 양성하고 사회에 배출하는 기능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피력하십니다.

그 근거에 대해서는 종전 교육과정과 달리 보다 사회의 수요에 즉각적으로 부응하고 나아가 잠재적 기대에 선제적으로 부응하는 진취적 약사상을 해당 기관이 수립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학장님은 "지금까지는 그저 기술적 지식만 주입할 뿐, 사회적으로는 준비가 덜 된 약사들을 내보내는 경우가 많았다"는 자성 결들인 멘트를 하시며, 졸업 후에도 최신 지식에 역동적으로 업데이트가 가능한 "자기계발형 약사"를 이상적인 학생상으로 삼는다고 밝히십니다. 둘째 사회적 책임감과 봉사 정신에 철두철미한, 인성과 참여의식으로 무장된 약사를 배출하여 지역 공동체와의 유기적 합일을 이루는 열정적 인력상의 수립에도 진력하신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어느 회사, 혹은 공공기관에서도 상사와 동료들과 잘 융합하며, 그저 자영업자형으로만 인식되기 쉬운 약사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슈퍼 인재 = 곧 약사"라는 역동적 이미지를 국민에게 함양하는 게 목표라고 밝히십니다.

본래 공대 엔지니어들이 즐겨 품는 꿈이 변리사직입니다. 변리사는 자격시험만 통과하면 부여되는 직함이지만 경쟁률도 높고 시험도 어려운 걸로 알려졌습니다. 약사와 변리사를 선뜻 연결 못 시키는 통념도 있는데 공학 분야보다는 커버해야 할 범위가 좁을지 몰라도 약학계 역시 특허 관련 분쟁의 수위, 강도가 장난 아닌 영역입니다. 박종혁 선생님은 약학박사이실 뿐 아니라 변리사 자격까지 취득하신 전문직 중의 전문직으로, 현재 본인 명의의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 유관 단체의 제반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시는 등 가히 글로벌 엑스퍼트라 불릴 만한 화려한 커리어를 꾸려가는 분입니다.

박 선생님의 경우 약사로서의 정체감도 정체감이지만 법률 전문가로서 누리는 뿌듯한 성취감이 더 크신 듯, 이 책의 회고문 곳곳에는 그런 심회의 피력이 두드러지더군요. 혹시 말입니다, 학생 자신의 꿈은 좀 다른 쪽인데 집안에서는 (부모님의 직업이 약사라든가 해서) 약대 진학을 강권하는 분이라면(아니면 정반대로, 본인은 약사가 꿈인데 집안에서 다른 전문직을 권한다든가), 이 박종혁 선생님의 진로를 롤 모델로 삼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약사라고 해서 흰 가운만 입고 동네 주민들 상대로 반복적인 일만 꼭 하라는 법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어느 정의로운 도서관 사서"의 이야기도 꼭 한번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박 선생님이 특별한 존경심으로 기억하는 분 이야기라서 말이죠.



적성은 능력과도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능력이 빼어나도 그 일이 너무 싫으면 직역을 배겨낼 수가 없습니다. 이 책에 실린 많은 약사분들의 진정 담긴 사연을 들으면, 능력도 다들 빼어나시지만 적성부터가 남다르게 해당 직분에 잘 맞았다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책 말미에는 꿈결 기획에 언제나 핵심 역할로 참여, 주도하시는 직업 전문가 고정민 선생님의 유익한(객관적 제3자로서의) 조언이 실렸습니다. 자신의 진로가 혹시 약사쪽이었으면 하는(아직 확신이 없을 나이들이죠) 학생들은 이 책을 읽고 꼭 치열한(아직은 행복한) 고민을 해 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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