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2041
로버트 스원.길 리빌 지음, 안진환 옮김, W재단 / 한국경제신문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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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향하는 기온의 절댓값보다는, 아래로 치닫는다는 지향 자체가 사람에게는 공포와 좌절감을 안길 수 있습니다. 극지에서 얼마나 차가운 물체, 대기, 적대적 동물과 자주 마주했느냐보다는, 안온한 삶을 버려두고 나와 내 동료들이 왜 이 극한의 도전을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지의 회의가 자아내는 중도 포기에의 유혹이, 아뇌쿠네메(Anökumene)를 헤집고 지나가는 모험가와 탐험대를 더 괴롭히는 요인임을 이 책을 읽고서 깨달을 수 있더군요.

본디 영하로 기온이 얼마나 떨어지느냐보다는, 옷깃을 더욱 여미게 강요하는 칼바람의 위력이 보행자를 훨씬 크게 위협합니다. 버젓한 중위도 지역의 동장군 위세가 이 정도인데, 극지방이나 그 아래 한대 지역의 살벌한 냉기란 사실 일반인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짐작이 불가능합니다. 이 책 중에도 나오듯, 겨울철이라곤 하나 겨우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근방에서 쓸만하면서도 저렴한 트롤선을 물색하러 돌아다닌 친구, 동료(즉, 피터 맬컴을 말합니다. 이 책 중의 사연[저자의 일생이라고 해도 될 기간]에서 끝까지 요긴한 역할을 해 주는 인물이죠)의 행색이 마치 얼굴에서 고드름이 뚝뚝 떨어질 듯한 행색이라 아무도 남극 탐험을 위한 그의 구상 설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도 태평인 국외자들은 "이런 온대 지방의 추위도 제대로 감당 못 하는 자가 무슨 남극까지를 다녀오겠냐"며 더욱 못미더워했을지 모를 일이겠습니다.

지난주 일요일 SF 고전(?) <생명창조자의 율법> 독후감 중에서도 그런 풍자에 대해 언급했습니다만, 어리석은 인간, 마케팅의 부추김에 같이 미쳐 날뛸 줄밖에 모르는 하등한 지성을 가진 인간은, 어떤 "바람"에 의하지 않고는 행동의 동인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혹은 뿌리깊게 존재를 짓눌러 온 열등감의 폭발이든지 말입니다. 이 책은 탐험가의 단일한 지역 탐사, 혹은 모험 성과 보고서라기보다, 한 운동가(물론 저자)의 자서전에 가까운 내용이더군요. 유머러스하고 (탐험가치고는) 꽤나 현란한 수사법, 혹은 명언들의 습관적 인용을 특유한 스타일로 삼는 문장이었고, 세계관도 낙천적임을 엿볼 수 있었지만, 그가 장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어서도 끝내 서운함과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대목은, 어리석은 대중의 변덕, 꽉 막힌 관료제적 사고방식, 남의 단순 취향과 과학적 지식, 문학적 공통 원리를 분별 못 하는 천박한 트집 잡기 근성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직시하는 현실은 꽤 절박합니다. 그의 독단 같은 것(사실, 그가 지향하는 이념이야 대단히 숭고한 것이겠으나, 언행과 성격은 주변의 공감을 사기 무척 어렵지 않을지 짐작은 되더군요)에서 도출된 결론이 아니라, 극지방의 환경이 오염되거나 이상 징후를 보이면 다른 곳의 사정은 뭘 애써 분석하거나 검증할 필요도 없이 망가졌다는 뜻이죠. 저자는 책 여러 군데에서 "탄광의 카나리아"를 거론하는데(너무 잘 알려진 풍유라서 진부한 느낌마저 있지만), 사실 최초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카나리아에 빗댈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이미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다고나 봐야 합니다. 카나리아가 죽어나가도 위기 의식을 느껴야 할 판에, 내가 디딘 발 아래의 비계판이 아니라 지반 자체까지 무너져나가는 데도 태평이라면 그 무신경이란 이미 죽음을 자초할 만한 병적 근성이라고 봐야겠죠.

책은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았을 무렵 그가 스스로 자금을 모으고 유력자의 후원을 받아 남극 탐험에 나섰던 엄청난, 말 그대로 "무모한 도전"에의 회고부터 시작합니다. 이런 모험에 나선 계기 중 하나는, 저자가 유, 청소년기부터 마음의 우상으로 떠받들던 로버트 스콧에 대해, 우파 극단주의 저술가(일단 저자는 그리 규정합니다)인 롤랜드 헌트퍼드(Roland Huntford)가 그간 과장되이 유포된 전설, 신화에 대한 조목조목의 반박을 담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역시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그 영향으로 아직까지도 명예 회복이 되지 못한 현실에 개탄하여, "스콧의 발자취를 따라" 무지원 횡단을 벌여 보겠다는 각오를 품은 일이었다고 합니다. 역시 젊고 순수한 영혼만이 떠올릴 수 있는(또한 실천에 그 일부라도 몸을 담을 수 있는), 강단 있는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헌트퍼드의 책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일부 타당한 주장도 있는가 하면, 그의 비판이 꼭 스콧의 위업을 결정적으로 재평가(물론 평가절하)하는 모멘텀, 돌아올 수 없는 이정표가 되었다고 보기 힘든 면도 많습니다. 그가 거둔 객관적 위업에 대해서는 (저자가 주관적으로 어떤 애석함을 느끼든 간에) 아직도 절대 다수가 긍정적 평가, 존경을 품고 있습니다. 영국인이 아니라도 스콧이 위대한 탐험가인 줄은 다 알며, 다만 영국 외의 국가에서는 스콧보다는 아문센을 더 높이 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고, 이 점을 헌트퍼드가 새삼 영국의 폐쇄적 독자들에게 각성시킨 업적은 분명히 있습니다.

또, 이 책 중에도 언급이 있지만, 사람이 끄는 썰매가 개썰매보다 낫다며 스콧과 에저튼 경 등이 극구 개를 감싸고 돈 건, 현대 같으면 계급의식의 발로가 아니냐며 큰 논란이 일었을 만합니다. 스콧 등은 당시 "말 못하는 개한테 고생을 시킬 게 아니라 더 처지가 나은 너희 인간들이 모범을 보이는 게 존엄의 발휘이자 의무 아닌가?" 같은 발언을 했으나(이 워딩은 스콧, 섀클턴을 소재로 삼은 여러 저서들에 두루 인용됩니다), 바로 이런 가치관이 귀족적 사고방식일 수 있죠. 이에 대해 저자는 다소 논점을 에두르며, 자신이 실제로 현지에서 적용해 보니 인간썰매가 개썰매보다 나은 점이 많다고 주장합니다. 실용적 근거를 대는 셈인데, 극지방은커녕 캐나다 타이가 지대에서 썰매로 교통수단을 삼아 본 체험도 없는 일개 독자로서, 탐험으로 잔뼈가 굵은 저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데는 더 반박할 수 없긴 합니다.

저자는 극지방 탐험 비용 마련(과 그 전 과정)을 위해 육체노동도 불사한 청년이었으나, 알고보면 출신은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습니다. 집안은 대대로 옥스퍼드를 나온 엘리트층이었고, 가문의 후광으로 얼마든지 해당 대학 입학이 보장된 상황이었으나 그는 끝내 소신과 (무모한) 꿈을 위해 부친과 학교의 제안을 거부합니다(책 중에 간간이 언급되는 미모의 여친 여러 분을 보면, 이양반 은근 풍류남아이기도 한가 봅니다. 심지어 "극지방 체험담만큼 작업에 성공적인 소재는 없다" 같은 말도 있습니다ㅋ). 이후 극지방 탐험을 위해 여러 인사와 기관, 법인체들과 접촉하는데 사실 이런 만남 주선 자체가 초고위층의 연줄이 있어야만 가능한 기회입니다. 이런 고위층 중에는 정말, 우리가 알 만한 영국 유수의 대기업과 금융 기관 이름은 한 번씩은 다 나오고, 칠레나 아르헨티나의 유력 단체는 물론, 심지어 일본의 암웨이까지 등장하더군요. 무튼 연줄 자체로는 기회만 마련될 뿐이고, 기회를 성과로 빚어낸 건 그의 진정성과 인간적 매력이었습니다.

비용 마련을 위해 그는 여러 장소와 공동체를 누비며 강연에 열중합니다. 그 중 그가 만난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한눈에도 빈곤층 밀집 지역(이스트엔드) 출신임이 드러나는 "눈이 툭 튀어나온 남루한 행색의 소년"이었습니다. 이 소년이 다가와서 강연을 마친 자신에게 쥐어 준 "50펜스 동전"이, 이후 역경을 마주하고도 초심을 유지하며 본연의 진로를 헤쳐나갈 수 있게 돕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첫번째 장정인 남극 탐사에 돌입합니다. 책 여러 곳에서 그는 "책에서 배우는 지식"과 "몸이 현지에서 비로소 절감하며 깨닫는 지식" 사이의 크나큰 괴리를 여러 번 토로하는데, 성공이라기보다는 서투른 시행 착오로 점철된 고난의 행군에 가까웠습니다. 남극에서 긴 세월(물리적으로도 길고, 주관적 체감으로야 또 얼마나 길었겠습니까)을 체류하고 의도했던 작업을 마쳤으나, 타고 돌아가야 할 서던퀘스트 호가 (마치 타이타닉처럼) 빙하에 부딪혀 침몰하는 바람에, 이 탐사대는 결정적 좌절을 인정하며 간신히 급파된 비행기편으로 문명 세계에 귀환합니다. 처음부터 그들의 시도를 비웃었던 대중과 미디어는 (그래도 무관심보다는 낫다 할) 싸늘한 냉소와 조소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저자 스스로도 "자신은 탐험가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오지에서의 생존과 귀환이라면 이분보다 더 뛰어난 전문가가 우리 한국에도 여럿 있을지 모릅니다. 저자는 그러나 본분이 탐험가라기보다는, 탐험의 시도를 통해 환경 보호의 명분을 널리 홍보하는 운동가에 가깝습니다. 그의 시도 중에는 실패도 있고 성공도 있었으나, 실패마저 위대한 도전으로 결국은 대중에게 각인시킨 그의 인간적 진정성이야말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뇌쿠메네에서 극한의 상황에 직면하며 그가 절감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리더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이 투철해야 하며, 자신의 자질에 대해서는 다른 누구보다 그 자신이 정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천한 인간은 권력 앞에서 아부하다가도 그 권력이 퇴조의 기미를 보이면 바로 적진의 사냥개로 돌변하여 물어뜯는 극악의 근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런 인간은 환경의 변화에 카멜레온처럼 영합하며(그나마 기민하지도 못하죠), 현실의 다양한 정보와 양상을 진지하게 살피지는 않고 사냥개처럼 특정 진영의 가치를 폭주 맹종하는 데서 "깊이"를 찾는, 근본이 썩은 가치관을 지닌 종자들입니다. 저자 로버트 스원은 죽을 고비를 여럿 넘기며, 동료와 자신을 생존의 위기에서 지켜 주는 건 자기기만이나 환상이 아닌 현실에의 통찰을 거친 참된 확신임을 깨달았습니다.

존 밀스는 지난시절 영국과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여러 고전에 출연한 이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로 큰 인기를 누린 배우지요. 이분이 특별히 저자를 불러(이유는 저자가 존경해 온 스콧의 형상화란, 영화 속에서 이 대배우가 빚은 명연기가 전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모금을 위한 대중연설에 아직도 서투른 청년에게 특별 지도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거울을 봐. 누가 있나?"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 듣기 싫은 목소리로 뭐라고 하는군요."
"이봐, 평생을 배우로 살아온 나는, 지금 거울 속의 저 인간이 마음에 들고 그 목소리가 안 거슬릴 줄 아나? 다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쉽게 믿을 수 없었다고 하네요. 배우들은 자기 도취에 빠져 사는 부류가 아니었는지 하면서요)
"자네는 지금부터 거울 속의 저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하네, 이 과정이 끝나면 보다 유려한 연설가로서 남들 앞에 나설 수 있을 거야."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객관화한 후에 비로소 드러나는 단점을 교정하여 스스로에게 자신을 가진 다음이라면, 다른 이들도 그의 매력에 호응할 수 있으리라는 가르침입니다. 탐험가 못지 않게 대중 운동가로서 평생을 헌신했던 그에게, 이 대배우와의 만남은 중대한 이정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 제목은 남극 2041입니다. 2041년은 그간 잠정적으로 약탈적 경쟁을 자제해 왔던 북반구의 강대국들(여기에는 중국도 포함됩니다)이, 본격적으로 영토와 자원 확보 경쟁에 돌입할 수 있게 되는, 남극조약의 만료일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나치가 비행기로 극지방에 뿌린 수천 개의 스와스티카를 거론하며, 도대체 근시안적 탐욕에 절어 어머니 지구의 표면을 훼손하고 파국에의 질주를 서슴지 않는 이들 강대국 정부들의 작태가 나치의 만행과 우행에 다를 바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집니다. 무관심은 곧 공범 행각에의 참여나 마찬가지입니다.

저자는 부대원과 대중의 호응,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종전의 미숙한 청년에서 원숙하고 신념 강한 지도자로 인간됨이 거듭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평 앞에도 적었지만) 가장 방해가 된 건 주변의 마케팅 열풍에만 그 동기가 반응하는, 소비체제에 철저히 길들여지고 싸구려 진영 논리에만 중독되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을 깨어 있는 의식으로 과대평가, 착각하는 일부 대중들의 무관심한 작태였습니다.

남북극을 탐사하며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홍보하는 일 못지 않게참된 자신을 재발견하며 리더로 거듭났던 저자의 외침은 그래서 그 울림이 각별합니다. 지구의 환경을 수호하는 일에 동참하기란, 우리들 대중이나 독자들도 그저 적선이나 생색내기식 캠페인의 일부가 되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인격을 다른 단계로 도약시키는 노력이기 때문이죠.

책 중 "구름 끝에 황금빛 경계가 보였다"는 표현은, "실버 라이닝"이라고 해서 영어에서 즐겨 쓰는 관용구를 살짝 바꾼 것입니다. 역주에 보면 "여기(라스베가스)에서 일어난 일은 여기에 머문다"에 대한 설명에서 이 구절이 "관능적"이라고 한 건, 바람을 피우든 외도를 하든 가정과 본업으로 복귀할 때 그 일이 발목을 잡지는 않을 테니 마음껏 기분 내다 가라는 속뜻을 담았기 때문이죠. 이 구절을 제목으로 삼은 헐리웃 영화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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