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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한 장으로 보는 최신 IT 트렌드 - 개정증보판
Saito Masanori 지음, 이영란 옮김 / 정보문화사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머리
속에 아무리 (특정 주제에 대해) 전망과 설계가 잘 이뤄졌다 해도, 별도로 이걸 시각화하여 눈으로 봐 가면서 일을 진척시키면
확실히 능률이 많이 오릅니다. 그래서 웬만한 조직 사무실 상황판(불레틴)에는 차트, 도표, 하다못해 번잡스런 메모나 사진 조각들이
잔뜩 붙어 있는 거죠. 일목요연하게 정돈된 그래픽 포맷이면 좋은 텐데(또, 거대 조직에서는 실제로 전문 인력(고용이든 외주든)을
써서 이런 일을 맡깁니다), 그 역시 시간과 정력이 적잖이 소모되는 터라 어쩔 수 없이 최상의 엔트로피는 포기하고, 필요
최소한의 시각적 자극을 받는 단계에서 만족합니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입니다. 온갖 키워드와 트렌드 심벌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데다, 그 정확한 개념과 유래까지 파악하기까지란
번거롭고도 어렵습니다. 시각적 보조 자료란 그래서 누구(업무 수련도가 높건 낮건)에게나 필요하기 마련인데, 인포그래픽하고는 또
미묘하게 다릅니다. 더 융통성 있고, 더 범위도 넓으며 직관적으로 고안된 훌륭한 "시각" 자료(책의 표현을 따르면 "그림 한
장")들이 이 책에 가득 실려 있습니다.
비교적
어려운 개념에는 당연히 그림이 필요하고, 잘 아는 사실이나 원리에도 그림이 곁들여지니까 기존의 이해가 더 선명해지는 것
같더군요. 그림도 그림이지만, 항목들 선정이 참 좋았습니다. 사전류에서 흔히 시도, 편집하듯, 같은 서열에 놓인 개념으로만 내용을
나누면 독자 입장에서 지루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주제 논의의 상하위층을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각론에서 지루해진
머리가, 책의 논의를 따라 불규칙적으로 총론으로 올라가곤 하니, 독서의 단조로움이 훨씬 덜합니다. 그뿐 아니라, 각론에서도
간간히, 큰 맥락(총론)에서의 위치를 짚어 주니, 하위 개념 단계에서만 기술적 의의를 파고드느라 근시가 되기 쉬운 안목이 더
넓어지는 장점이 분명히 있더군요. 논제에 대해 확실한 이해를 한 저자라야 이렇게 쓸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본문의
그래픽을 좀 찍어서 서평에 곁들이고 싶은데, 이런 책은 도판이 또 핵심이라서 사진 첨부는 자제하겠습니다. 그렇디고 텍스트가
평범하다는 게 아닙니다. 이 책 보면서 저는 오히려 그래픽보다 본문 서술의 시원시원함, 명쾌함에 더 끌리더군요)
p82에
보면 "약한 의미/강한 의미의 인공지능"을 준별합니다. 이건 제 개인적 사정인지 모르겠는데, 한창 인공지능 열풍이 불고부터
처음에는 무작정 (성취도나 완성도, 성능에 무관하게) 인공지능 예찬론 일색이다가, 일본 교수들이나 전문가들부터 슬슬 "의미의
강약/광협"을 나누기 시작하더군요(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 개인의 독서 편력에서는 그랬다는 뜻입니다). 이 책도 일본인 저자의
솜씨입니다. 아마도 일본에서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만큼) AI에 대한 관심, 투자가 높아서일 수도 있고, 그런 관심 수준에
비례하여 반발이나 반감도 부상했었기에 날카로운 비판이 제기되었겠으며(제 추측입니다만), 이에 대해 논의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저런
분류법(혹은 면피성 핑계)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저자는
1년 반여 전 알파고의 대국 승리를 거론하며, 대단한 기술적 성취이긴 하나 이 시스템이 하는 일이 고작 바둑 두는 일 하나라면
무슨 큰 의의가 있겠냐며, 이제서야 마케팅 광풍 때문에 사람들 시야를 가렸던 거품을 걷어내는 듯한 유력한 발언을 합니다.(참고로
저자는 IBM에서 잔뼈가 굵은 기업인 출신으로, 현재는 중견 IT 기업의 CEO입니다) 게임에서 수행해야 할 목표는 단순합니다.
바둑은 집의 수를 늘리면 이기는 방식으로, 비록 그 숱한 전술을 헤아리는 경우의 수는 우주 원자의 개수보다 많다고 하나 달성해야 할
목표의 성격은 오히려 체스보다도 단순합니다. 예기치 않은 장애가 발생했을 때 문제 해결을 능률적으로 해 내려면, 유기체 특유의
"의지, 직관"이 발휘되어야 하는데 기계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사회적 위상으로 볼 때 당연하지만) 언젠가는 강한 의미의 인공지능, 즉 스타워즈의 C3PO나 R2D2 등처럼
인간과 대등한 인식, 센스를 발휘하며 대화를 주고받을 날도 머지않아 다가올 것을 예견합니다. 단, 그 과정에서 넘어야 할 기술적
장벽이 여전히 만만치 않음도 분명히 짚는데 이는 민완 기업인 특유의 예리한 직관입니다. CEO들은 기술적 세부사항에 대해 정확한
이해도 하고 있으면서, 전체 국면을 보는 넓은 시야도 동시에 갖추었기에, 오히려 엔지니어들보다 대화하기에 더 유익하고 배우는 것도
많더군요. 이 책도 그런 유능하고 현명한 CEO의 솜씨라는 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은 많이 듣기는 들어도 정확히 뜻하는 바가 뭔지, 누가 먼저 개념정립을 한 것인지, 4차가 있으면 1차, 2차, 3차도
있었다는 뜻인데 어느 단계를 정확히 이르는 건지 아는 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레온티예프 장기 파동을 설명할 때(물론 창안자인
레온티예프의 설명이 오리지널이죠) 암묵적으로 1차, 2차를 구분하기도 했고, 경제사 교과서에 보면 2차 산업혁명을 두고 철도,
전기의 발명이 파급한 거대한 기술 혁신과 대호황으로 설명하는 태도가 흔히 보이긴 했습니다. 이거하고 "제3의 물결"은 또 다른
계열로 논하는 겁니다. 거기다가, "3차 산업(서비스업)"하고는 전혀 논의의 성격이 다르고요. "4차 산업"은 (완전히 정착된
개념은 아니지만) 지식 산업의 통칭이며, IT와 개략적으로 통하기도 합니다만 그보다는 넓은 개념이죠. 그러니 "4차 산업"이
일으키는 대변혁을 두고 "4차 산업혁명"이라 이르는 게 전혀 아님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건 오히려 "3차 산업혁명"이었죠)
역시
저자께서 보는 시야가 넓다 보니, 1960~70년대에 일본에서 시도되고 소기의 성과도 거두었으나 타 분야로 파급, 확장되지는
못한 여러 기술적 성취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아메다스(기상관측 시스템), 신칸센 제어 시스템에서 이미 "사물, 기기에 센서를
내장시켜 데이터를 수집하는" 기초 발상이 있었다고 하네요. 이런 게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해당 기업 입장에서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원천 기술로 특허를 내어 두고두고 미국, 독일의 선두주자들한테 우려먹을 좋은 계기였는데 말입니다. 우리도 그 비슷한 게
있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삼성 pcs폰에서 채용한 음성 인식 기술(집, 여친 등으로 발성하면 자동 다이얼을 해 주는 식)이
(지금 생각하면) 꽤 시대를 앞서나간 쾌거였는데, 이후 그냥 묻히고 말았죠. 여튼 저자는 일종의 retronym으로 M2M을
회고합니다.
이 책은 역자께서 꽤
"현지화"를 시켜 놓은 번역이 눈에 띄더군요. p191 같은 데를 보면, "... 2007년 당시 한국의 휴대전화에는 이미 음악
플레이어가 내장되어 있었고... " 같은 서술이 다 있습니다. 이거는 수식어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일관 변환한다고 문맥이
통하거나 내용 타당성이 유지되는 이슈가 아니거든요. (일본산 휴대폰은 그런 컨셉과 기술적 성취를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노키아나 RIM 등을 서서히 추월해 가는 기색을 보이며 애니콜이 피처폰[당시에는 이런 말이 없었지만] 시장의 1인자로 떠올랐던
건데) 아무튼 외국인 저자의 책을 읽는다는 위화감이 안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이 외에도 p159를 보면 한미 양국의 비즈니스 문화
차이를 논했는데, 미일이 아니라 한미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대목들은 번역이 아니라 저자의 독창적인 연구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사실 저는, 예컨대
1980~90년대에 쓰이던 전화기 다이얼 방식을 보고 표준으로 채택된 프로토콜의 놀라운 확장성에 감탄하곤 했습니다. 기술적 발전이
아직 지원 못 하는 기능을 두고서도 엔지니어들이 장래의 진화상을 예상하여 물리적 구조를 그리 짜 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걸
가리켜 "워터폴 방식"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이런 패러다임으로 접근하는 게 어렵습니다. 말 그대로 기하급수적으로 기술이 진보하는
데다, 소비자의 기호 역시 변덕스러운 터라 가까운 미래도 예측이 어려우니까요. 사용 빈도가 높게 예측되거나, 업무에서 우선순위가
높은 기능에 먼저 전력 투구하는 방식이 요즘은 일반적인데 이런 걸 두고 "애자일(agile)" 방식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인들은
잘 의식 못하지만 업계에서는 그 혁신성과 편의를 두고 (시간이 상당히 지났지만)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게 클라우딩 방식입니다.
기업에서는 (2차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자체 발전 시스템을 도입해서 전력 수요를 충당했는데, 거대 전력 회사가 일원적으로
설비를 차려 낮은 추가원가(초기 설립비용이 막대할 뿐 한계비용은 상대적으로 미미하죠)에 전기를 공급하면서 기업들이 원가 부담을
크게 덜게 되었습니다. 업체마다 대용량 서버를 갖추기도 초창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하중을 떠안았는데, 이제는 마치 한전에서
공급하는 전기 상품을 종량제로 사용하듯, 클라우딩 업체에 사용요금만 내면 그만이니 말할 수 없이 편하죠. 게다가 표준적인 서비스를
기복 없이 소비할 수 있다는 장점도 큽니다. pp.146~147에 보면 프라이빗- 퍼블릭- 하이브리드 각각의 방식을 보기 좋게
도식화해서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규모의 경제"란, 여기에서도 유효한 현상 포섭에 성공합니다.
대중적
GUI의 사실상 창안자이자 가장 큰 수혜자인 마이크로소프트의 브라우저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정작 준수하지를 않아 여전히 논란인
HTML 표준 규약에 대해서도, 이 책은 그간의 변천사를 정연하게 제시해서 독자의 인식 혼란을 바로잡습니다. 무엇이든 그 현재적
의의와 미래의 비전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프로토콜이건 패러다임이건 개별 상품이건 그 걸어온 지난 족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엔지니어의 저작은 대개 당대의 첨단 결과상만 집중 조명하기에, 현황을 살피기에는 좋아도 응용성과 유효기간에 한계가 뚜렷한
지식이라는 약점이 있습니다. 반면 이처럼 시야가 넓은 CEO의 설명, 담론은 무엇을 화제로 꺼내든 간에 통시적으로 일단 짚고
봅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현재의 기능이 어떤 맥락 속에서 진화했는지, 비교적 먼 미래까지도 그 발전상의 경로를 대강이나마 유추할 수
있는 도움도 받을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