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창조자의 율법 미래의 문학 8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자연계를 관찰하면 그 기기묘묘한 다채로움에 압도되고 경이로움을 느끼는 게 당연합니다. 먹을 수 없는(=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실제 효용을 제공하지 못하는) 꽃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이를 놓고 한없는 상념에 빠져드는 것도 인간만의 능력입니다. 기실 우리가 "다양함" 그 자체에 높은 평가를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여태 힘들게 걸어온 진화의 길 말고도 저런 다양한 대안(alternative), 경우의 수가 더 존재했구나" 같은 놀라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 진화의 경로 혹은 결과(아직도 진행 중이니 결과를 논하기란 참으로 경솔합니다만)에서 가장 위대한 지점이라면, 우리의 의식 중 무엇이 무지몽매이며 무엇이 계몽됨, 이성적 요소인지 분명히 분별하기 시작한 바로 그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현대 SF의 "고전" 중 하나로 이제는 넉넉히 자리매김될 만한 제임스 P 호건의 이 작품은, 엄청나게 큰 스케일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고는 있습니다. 헌데 내용을 뜯어 보면, 의도와 시선은 철저히 역사와 사회 풍자 쪽을 향합니다. 마치 (그의) 까마득한 선배인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등이, 우주적 세팅을 전면에 내세운 후 속뜻으로는 (그 역시 원대한 스케일이자 뜻깊은 시도이긴 하지만) 인간 본성의 사악함과 헛된 탐욕이 저지른 과거의 온갖 실책, 현재까지도 반복되는 정치인들의 음모와 헛발질에 대한 풍자를 품었던 경우와 비슷하게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장편은, SF로서의 재미도 넉넉히 선사하겠지만, 1980년대 서구 사회를 휩쓴 유행과 풍조를 혹시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더 유쾌한 다층서사, 혹은 패러디로 독해되는 재미도 있겠습니다.

역자 후기 중에도 언급되듯, 이 작품이 우스꽝스럽게 전면에 내세운 희대의 사기꾼인 카를 잠벤도르프는, 작품 발표 시기 즈음에 큰 유명세를 타며 지구 곳곳을 누빈 유리 겔라 같은 쇼맨을 다분히 연상케 합니다. 개인 유리 겔라를 신랄히 비꼬고 조롱하는 건 큰 의의가 없을 수 있고(당장 우리 시대만 돌아보더라도, 준엄히 비판, 심지어 단죄받아야 할 사이비들이 겉으로만 그럴싸한 명분을 걸고 [사실은 그 명분을 무엄하게도 모독하며] 얼마든지 설치고 다닙니다), 이런 풍자의 진짜 의도는 서푼짜리 사기꾼에게 바보 같이 속고 다니며 소중한 자원(국가 예산의 일부일 수도 있고, 다중의 열정과 지지 같은 무형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을 낭비하는, 혹은 낭비되게 돕는, 현대의 생각 없는 소비 대중이라고 봐야 옳겠습니다.

- 아니, 물론 올바른 목적을 위해 프로젝트가 마련된 줄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왜 잠벤도르프 같은 작자에게 그 정도 대우를 하며 편법을 써야 하나요? 그자가 사기꾼인 줄은 여기 계신 누구나 다 알지 않습니까? 왜 대중에게, 올바른 교육과 계도를 실시하여 결국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더 정당한 길을 걷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화성을 다녀오는 기적을 누리는 세대입니다.
- 그 방법이 가장 빠르고 확실하기 때문이죠. 어리석은 열광과 골빈 신드롬만큼 우리를 목적지에 신속히 데려다 줄 범선, 증기선은 없으니까요.

저자 호건은 이 외에도 갖가지 신랄한 반어와 유비를 통해, 과장된 선전과 싸구려 마술쇼를 통해 대중의 헛된 환상에 아부하며 부와 명예, 권력을 챙기는 일부 개인과 집단을 신랄히 비꼬며, 이런 자들을 먹여살리는 대중과 미디어의 천박한 행태에 대해서도 (웃어야 할지 뜨금해야 할지 모를 만큼) 적실한 알레고리를 현란히(장르작가로서의 상상력 못지 않게 그는 표현력이 참 빼어납니다. 반면 하드 SF 작가 중에서는 이런 자질이 다소 아쉬운 이들도 많죠) 구사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특히나, 새뮤얼 딜레이니나 앨프리드 베스터보다는 마이클 크라이튼, 혹은 아예 윌리엄 골드먼(켁)에 더 가까워지는 분위기처럼 (독자인 제게는) 다가왔습니다.

소설은 두 개의 별개 시공간을 무대로 넘나들며 전개됩니다.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물질문명의 기술적 진보는 눈부시나 의식 수준은 현재, 아니 1980년에 머무르는 듯한) 인간들이 바글거리는 지구이며, 다른 하나는 탈로이드들의 세계입니다. 탈로이드들은 자신의 행성을 "로비아(Robia)"라고 부르며(여기는 우리가 아는, 토성의 위성 타이탄입니다), 스스로를 가리키는 이름은 "로비잉(책에서는 "로빙[Robeing]"으로 표기)입니다. 엄숙한 표정을 짓고 거짓으로 구축한 권위를 행사하는 종교 엘리트들이 걸치는 robe를 떠올리게도 되고, 혹은 robot+human being의 합성어일 수도 있습니다.

하늘을 바로 바라볼 수 없는 대기 상태 때문에 그들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을 키워 왔고, 이런 맹신을 악용하여 종교적 계율로 대중을 통제, 통치하는 소수 집단이 있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듯 암흑시대 유럽의 교회를 비꼰 설정이겠고요. 그들이 사는 세계가 구체임을 증명하려다 정죄될 뻔한 로프베이엘 같은 캐릭터는 갈릴레오의 아바타이겠습니다.

"크기는 유한하지만 경계 또한 없고, 중심이 따로 없지만 어느 곳이나 중심인 곳". 마치 기독교 구약에 나오는 알쏭달쏭한 수수께끼처럼 들리지만(정말 그렇게 들린다면 당신은 물리학 소양이 부족한 겁니다), 이는 기실 뉴튼과 아인슈타인이 일찌감치 규명한 우주의 구조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막대한 발품을 팔아 완전한 지도 제작의 소명을 이루려던 로프베이엘은 결국 자신들이 발 디디고 선 세상이 구체(globe)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동시대인을 설복하려 들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이단자에의 차디찬 낙인뿐이었습니다.

미개한 맹신이 지배하는 세상을 처음 "발견"한 잠벤도르프들은, 이들의 무지몽매한 행태가 자신들에게 어떤 가능성을 열어줄지 직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극소수 레니게이드(어느 사회에나 이런 존재가 있기 마련이죠)와 서로 언어 소통이 가능해지고부터는, 의식과 지성과 의지, 감정을 지닌(설령, 신체 구조나 진화 과정은 별개였을망정) 존재들 특유의 공감으로 인해, 어떤 미래가 모두에게 당위일지에 대해 더 복잡한 생각을 품게 되지요.

왜 잠벤도르프를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설정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작품 중에 스스로를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동일시했다는 설명이 나오더군요(프로이트가 알았다면 크게 화를 냈을 법합니다. 가뜩이나 화 잘 내는 분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약간 분하기도 한 게, 제임스 P 호건이 직접 말을 하기 전에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어야 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고등 사기꾼은 심리학의 대가라야 한다는 그의 소신(일 뿐 아니라 등장인물들 모두. 나아가 우리 독자들의 컨센서스)는 타당하겠지만... ㅎㅎ 소설 중에서 간간히 언급하는 "집단 오류의 어리석음"은, 근래 큰 발전을 본 "행동경제학"의 여러 결론과 곧 못 통할 바 없습니다. 소설 중에 행태(behavioral)라는 말이 세 번 정도 등장하는데, 확실히 빼어난 픽션은 이후 지성사의 발전 전반에 영감을 주는 게 맞는 듯합니다.

p569 역자 후기에 보면 ".. 하드 SF를 좋아하는 엄격한 독자에게는 ( 정작 본 줄거리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거창하게 마련된 이런 프롤로그가) 낭비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고전"에 대해서는, 그간 말로만 들었지 원어로도 중역본으로도 접해 본 적 없었는데, 그 유명하다는 프롤로그를 읽고 본문 20여 페이지까지 읽고 나서, 저도 정확히 저런 느낌이었더랬습니다. 근데 마련된 서두가 너무 거창하면, 어지간한 역량의 작가로서는 이를 감당할 만한 대작(필연적으로 세계 문학사를 바꿔 놓을 만한 대작이라야 합니다)을 짓기 벅찰 겁니다(즉, 이 정도 프롤로그를 "낭비"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 줄 픽션 우주의 건설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뜻). 다 읽고 나서 오히려 저는, 프롤로그(어차피 제임스 P 호건만의 독창적 상상의 산물도 아니지 않습니까?)의 무게 때문에 본 내용의 가치가 괜히 가려진 면도 없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소속 장르가 무엇이건, 풍자와 우화는 언제나 독자를 유쾌하게 하며, 문제 의식은 항상 우리가 속해 있는 체제와 사회, 혹은 "우리 자신"을 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유에서 이 작품은 "훌륭한 고전" 자격이 충분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