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 종교개혁 - 루터의 고요한 개혁은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가 지성인의 거울 슈피겔 시리즈
디트마르 피이퍼 외 지음, 박지희 옮김, 박흥식 감수 / 21세기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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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감연히 저항하고 핍박 받는 이들을 위해 신명을 바쳐 투쟁한 인물의 생애는, 세월이 흘러도 그 위대함이 퇴색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 그 선구자적 행적이 더욱 빛을 발하는 마르틴 루터의 한평생은, 반추를 하면 할수록 그 원대한 시야와 단호한 결단력, 진리를 향한 일관된 몸짓에 더욱 큰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이 책은 논문집입니다. 논문집이라고 하면 대뜸, 어렵다거나 고답적인 논의, 혹은 다양한 필자들 간의 상충되는 의견 개진으로 책의 맥락을 못 잡겠다거나 하는 당혹감 등이 떠오를 수 있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미있습니다. 또, 역자 서문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만 "워낙 구성이 충실하게 기획된 덕분에", 필자들의 주장이 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듯한 느낌이 확실히 옵니다. 단일 필자의 선명한 주장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재미있다"고 한 건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 독자의 선입견과는 다른 참신한 사실 규명도 있고, 유머러스한 질문에 재치 있는 답변이 조화를 이루는 대담도 있고, 루터와는 직접 관계가 없을 듯한(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시대 상황에 대한 흥미진진한 설명과 논증도 실려 있습니다. 읽어 보시면 알지만 결코 따분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하면 개혁을 시도하고 추진해 나간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만, "개혁을 당한(?)", 혹은 개혁 대상으로 지목된 쪽에서는 찜찜하거나 불쾌할 수도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책은 그런 입장까지도 (어느 정도는) 배려하며 쓰여졌습니다. 이상할 건 없습니다. 다른 건 분명히 다르다고 짚어야 하며, 분명한 갈등을 억지 춘향 격으로 서둘러 미봉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러나 신교든 구교든 본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를 향한 신앙을 고백하는 한 형제들입니다. 따라서 언젠가는 화해하고 한 지붕 아래에서 오순도순 살아야 하겠으며, 이 책에도 나오지만 "칭의 교리"의 일정 사항에 대해 앞으로는 반목하거나 대립하지 않는다는 공동선언이, 1990년대 후반 로마 가톨릭과 루터 교단 사이에서 이뤄졌습니다. 이런 화해와 포용은 지난시절 양 진영이 얼마나 치열히 싸우고 증오했는지를 돌아보면 실로 역사적이라 할 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너무 성대히 기념하면, 구교 측에서 불편히 여길만도 하겠으며 화해 분위기 조성은 더욱 멀어지는 것 아닌가요?" 슈피겔(한국에도 잘 알려진 권위 있는 시사주간지이자 출판 기업이기도 하죠) 측의 다분히 짖궂은 이 질문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의연하고 성숙한 태도로 답변합니다. 구교 측 역시 지난 과거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있어야 마땅하며, 1517년의 그 사건 역시 구교에서 겸허한 태도로 현장의 문제 제기를 수용했다면 그처럼이나 큰 파장으로 번지지 않았으리라는 의견도 이 책에 나옵니다. 이전에도 구교는 큰 도전과 분열에 직면했으나, 고비를 수 차례 (현명하게) 넘긴 적이 있었고, 이때에는 그렇지를 못했다는 뜻입니다.

신교 신학자들은 구교에 대해 감탄하는 의견도 간간히 개진합니다. 종교 개혁으로부터 무려 500년이 지났지만, 그래서 신교 측으로부터 맹렬한 공격도 받고 위신도 크게 추락했지만, 아직도 단일 교단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놀랍냐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그런 점도 있습니다. 문제가 있으니까 "개혁"이 일어났던 거고, 그로부터 5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단일 실체를 유지한다면 오히려 승자는 구교 측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뭐 전혀 근거 없다고는 못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견이 신교 측에서 나온다면, 그건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참으로 관대하고 열린 시각과 마음을 가져서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도 누누이 강조되지만, 신앙이라는 게 특정, 소수, 지도층 인사(사제 계급)의 의견에 철저히 구애되기보다, 각 개인의 사정과 생각과 입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신에게 접근하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신구교 중 누가 옳으냐를 가리기보다 외연을 확장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게, 훨씬 더 절대자의 의도와 의지에 부합하는 선택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며, 이런 의미에서도 종교개혁은 획일과 맹신을 거부하며 보다 계몽된 방법으로, 이성(이 역시 신의 선물이자 도구라는 언급이 이 책에 여러 번 나옵니다)에 부합하는 신앙의 가능성을 열어 준 뜻깊은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1517 종교개혁의 챔피언은 물론 마르틴 루터입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영웅일 뿐 아니라, 로마에 자리한 교황청의 과도한 수탈과 독선, 부패, 착취로부터 독일 민중을 옹호한 게르만의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이것 관련 이 책에서는 참으로 재미있는 지적이 나오는데요. 스페인이나 다른 기독교 국가로부터 교황청이 거둬 들였던 재물의 양이, 독일의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라에서 저항이나 개혁 움직임이 일지 않고, 독일에서 들불처럼 이 거대한 행진이 벌어진 건 무슨 이유겠냐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제 생각에는 책이 어느 정도 완결된 해답을 마련해 주는 듯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논문집이긴 하나 구성이 워낙 치밀하여..." 가 바로 그 비결입니다. 잘된 구성과 기획은, 예상 가능한 질문에 대해 어떤 큰 그림의 퍼즐 맞추기를 이미 예비하는 것입니다.

"독일이 가장 가혹한 수탈의 장이었기에 종교개혁의 진원이 되었다"가 일종의 "신화"이듯, 대문에 못을 꽝꽝꽝 망치로 박으며 그 유명한 95개조를 공개한 루터의 제스처도 사실은 가공되었다는 게 많은 학자들의 지적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런 선언문을 게시할 때는 아교로 붙이는 게 당시의 더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이죠. 아교로 붙이는 장면이라니 상상해 보면 왠지 드라마틱한 맛이 떨어지기도 하고, 더중요한 건 루터 개인의 회고로는 그때 상황의 기억이 구체적이지도 않다는 겁니다. 그런 문제 제기는 독일의 대학에서 드물게 벌어지지도 않았으며, 루터는 흔히 목격되던 "대자보 붙이기"가 (자신이 주도한 행위라고 해서) 그리 뚜렷이 기억에 남지도 않았으리라는 거죠(본인이 직접 했을지도 의문이고). 이 점에서도, 어리석은 당시 교황청의 대응이 공연히 위기를 자초한 면이 크다는 겁니다.

이 외에도 학자들은 흥미로운 역사상의 if 놀이를 여럿 펼칩니다. 예를 들어, 만약 클레멘스 교황이 황제로 다른 후보(예컨대 루터를 일생 동안 보호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밀었으면 과연 종교 개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하는 논의도 있습니다. 이 시기는 카를 황제와 프랑수아 국왕, 오스만의 술탄 슐레이만 등이 각기 빼어난 수완으로 유럽과 지중해 정세를 좌우할 시절인데, 이들 사이에서 형성된 묘한 파워게임의 균형이 종교개혁의 경로를 좌우한 면도 크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 저들 영명한 군주들의 정치 놀음은 다 잊혀지고, 기개 높은 전직 수도사의 영웅적인 투쟁만 역사에 뚜렷이 각인되었지만 말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던 도중 사탄과 결전을 벌이다 잉크병을 던져 그를 일시 퇴치한 이야기도, 그를 존경하고 숭모하는 이들 사이에서 전해 오는 아주 유명한 "전설"이죠. 이에 대해 그 방의 벽에 남은 자국은 잉크 성분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어서 흥미를 돋웁니다. 물론 루터 자신은 "사탄과의 결전"을 직접 언급한 적 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그런 위대한 영혼은 삶의 매 순간이 악마와의 투쟁이겠으며, 그런 순수한 정신이어야만 "구원은 선행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에서 연원한다" 같은 선포, 고백, 확신을 행하고 지닐 수 있는 거죠.

마르틴 루터에 대해 필자들이 내리는 결론 중 가장 뜻깊은 것은, "그는 언제나 같은 시대 같은 공동체에 사는 이들이 타협하고 화해하며 공동선을 모색해 나가게 하려는 쪽이었지, 과격한 변혁과 독선으로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기조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신중한 스탠스였으며, 일부 급진적인 농민세력이나 (영주 때문에 기득권을 억눌린) 기사 계급의 봉기를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재미있는 건, 언제나 암살 등 신변에의 위협을 느껴 오던 그가, 융커라는 가명을 고르고 (성직자나 학자가 아닌) 기사인 양 위장 신분과 외양으로 지낼 때, "기사답지 않은 행동과 처신"으로 여러 번 정체가 들통날 뻔도 했으며, 이때마다 영주가 지정해 준 관리인이 조언과 무마책을 코칭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의 본뜻은 "원형으로의 복원, 회귀"라고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정신으로 복귀하여, 더렵혀지거나 왜곡된 것, 진리 아닌 것을 모두 걷어내려는 움직임이죠. Rückformung이라고도 독일어로 표현하는데, Reformation 역시 정관사 die가 붙은 독일어입니다. 500주년을 맞아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얼마나 초기 기독교의 정신을 회복했으며 얼마나 루터의 위대한 초심을 잃지 않았는지 깊이 성찰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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