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미래 사람이 답이다
선태유 지음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공지능이 4차 산업혁명 트렌드를 이끌어나가리라는 판단은 기업인, 학자, 저널리스트,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지지를 받는 형편입니다. "인공지능"이 의미하는 바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아직 폭 넓은 합의가 이뤄지지는 못했습니다만, 대체로는 사람의 불완전하고 속도가 느린 연산능력, 못 믿을 감성, 변덕스럽고 편차가 심한 의지 등을 대신해, 오차 없고 빠르며 일관된 기계의 능력이 그를 대신하리라는 예측 쪽으로 수렴하는 듯합니다. 이런 미래라면, 가뜩이나 지금도 자동화 추세에 밀려 일자리를 잃어간다는 불안이 모두를 엄습하는 판에, 더군다나 암울하고 비관적인 연상만이 우리들의 마음을 잔뜩 채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비관적인 시선을 두지는 않는 분들이라 해도, 인공지능 주도의 산업상, 사회상이 그리 "인간적"이지는 않으리라는 예상에는 거의 이견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흔한 선입견과는 상당히 다른 결론을 내시네요. "미래에도 여전히 사람이 먼저이며, 오히려 지금보다도 사람은 더 중추적이고 중심적인 기능을 수행하겠으며, 사람의 가치가 우선에 놓이는 사회가 더 질적으로 우수한 번영과 발전을 누린다." 독자인 제 생각대로 책의 결론을 요약해 본다면 이 정도입니다. 우리들 독자들도, "그렇게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같은 희망은 품어 왔고, 다만 현황이 그리 밝은 전망을 제공은 못 할 듯하기에 쉽사리 동참을 못 했던 것입니다. 책은 선명하고 풍부한 근거를 들어가며 "우리의 건전한 믿음과 진보에 대한 소망은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독자에게 납득 시킵니다. 책을 다 끝내고 나면, 과연 그러리라는, 혹은 그런 당위를 위해 우리가 한층 각성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다짐을 품기에 충분할 만큼 소통이 이뤄져 있습니다. 우리 독자와, 저자 사이에서 말이죠.

"뭔가 다르다, 뭔가가 더 있다." 무슨 뜻일까요? 저자는 얼마 전 <히든 싱어>라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고 김광석의 라이브 무대와 음반(그때쯤이면 이미 CD가 대중화할 무렵입니다)에서의 목소리가 꽤 달랐다는 청중의 반응을 소개합니다. CD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 선명하고 정확한 디지털 음질의 재현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흔한 표현으로 "신세계가 열리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이미 그때도 일부 고급 팬들은 "이게 이상하게도 LP를 못 따라간다"며 전통적인 매체를 고집했습니다만, 그런 고급 귀를 못 가진 다수 대중들은 "레코드의 지직거리는 친숙하고 서투른 잡음의 향수" 정도로 (자기 한계 안에서 자기 편할 대로) 정리하고 말았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뭔가가 더 있다는 겁니다. 폰 노이만이 초석을 놓은 패턴에서 아직은 "질적인 발전"을 못 이루고 있는 컴퓨터가, 일방향 연산 능력의 쾌속 질주만으로 달성 못 하고 현저히 간과하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겁니다. CD가 나온지 근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 왜 라이브 무대에서 인간이 발성하는 "그 무엇"을 재현하지는 못하는 걸까요?

저자는 아주 단언하다시피 합니다. "알파고가 분명 세상을 놀라게 했으나, 그 기기의 능력은 지능이라고 볼 수도 없고, 그가 수행하는 활활동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차원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아직 학습도 아니다." 저자분뿐 아니라 이미 관련 분야의 학자들은 "강한 의미의 인공지능/ 약한 의미의...." 같은 편의적 구분을 만들어내어, 소모적인 "어의를 둘러싼 논쟁"을 비껴가려 합니다만, 업계에서 그토록 자신 있게 마케팅을 펼쳐 나갈 때의 톤, 어조에 비하면 뭔가 앞뒤가 단단히 맞지 않다는 느낌이네요.

인간의 지능과 학습 활동을 아주 단순한 차원에서 이해하는 이들은 이런 거품 잔뜩 낀 마케팅이 마냥 신기할지 모르겠으나, 사람만이 행해 온 창의와 도약, 혁신, 고유의 소중한 감성을 중시해온 이들이라면 대뜸 이런 과장된 선전에 회의를 느끼기 마련이죠. 또, 기계가 (거의 반사회적이라 할) 단차원 효율로 사회 곳곳을 침투해 들어온다면, 가뜩이나 신자유주의 흐름에 침식 받고 상처 입은 연대와 공감의 가치가 더욱 훼손되지 않겠습니까? 아날로그 고유의 영역을 지키려는 이들은 이런 진보의 이념에도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또, 예컨대, 현 문재인 정부가 이미 5년 전부터 내세운 "사람이 먼저다" 같은 슬로건도 염두에 둔다면 이런 현상적 의의를 새길 때에 더욱 깊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저자는 러다이트 운동을 거론하며, 이런 문명의 기술적 발전상에는 언제나 그 부작용을 우려하거나 현상의 변경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있어 왔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반발이 그저 역사의 필연에 저항하는 이러석은 반동일 수도 있고, 반대로 무분별한 기술적 팽창이 "인간다움, 존엄"의 이념을 훼손하지 않게 하려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견제적 성찰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와 후자의 구별은, 사고의 주체가 얼마나 사려 깊고 이성적인 근거를 토대로 반응, 해석, 통찰한 후 행동에 나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공지능 맹신, 만능론은, 사이비 신앙이나 무작정 저항의 몸부림만큼이나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감정"이란 것의 실체를 모르는데, 딥 러닝의 효율과 성과를 낙관하는 측에서는 이 역시 빅데이터의 개선된(개선되어 가는) 처리와 (그 결과로 실체를 잡아가는) 알고리즘의 작동이, 이 과제 역시 해결하리라는 쪽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폰 노이만 시스템이 아직 극복 못한 "즉흥성"의 결여라는 요소를 근거로 들어 이런 예측에 반대합니다. 저자는 구체적으로 가수 신승훈이 2집 타이틀 곡 작업 과정에서 체험한 "놀라운 영감"이라든가, 전인권과 이적의 "걱정 말아요 그대" 해석이 판이하게 다른 점 등을 떠올리며, 폰 노이만 시스템은 이런 문제 해결(인식)에 그저 척도적 정확성이라는 양적 접근만 고집할 뿐이며, 그 결과가 극히 비효율적 비경제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실제 허사비스 CEO도 "전력 소모 경감"을 계속 미디어에 어필함으로써 이런 "삽질론"을 어지간히 신경은 쓰는 듯한 불안감을 노출하기는 합니다.

저자는 전산을 전공한 정통파 프로그래머이신데도, 인간이 자기 앞에 가로놓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동원하는 "철학"이라는 도구를 꽤 높이 평가합니다. 저자는 이어 어렸을 적 할머니의 시골집에서 경험한 "온돌"이라는 전통 방식의 대안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하면서, 오로지 사람만이 지닌 소통과 반성, 상호 갈등과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어느 순간 떠오르거나 감지되는(사실은 그 배후에 무수한 노력과 자원 투입이 행해졌지만) 창의적 출구의 발견에 대해, 기계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인간적인, 인간만의" 성취라며, 인공지능이 사람을 능가하려면 이런 자질을 (그 최소 맹아만이라도) 구비하기 전에는 결코 불가능하다고 단언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지난 인문의 족적을 보면 대개, 우화적 형태이건 명시적인 매뉴얼 포맷(드물지만)로건, 읽는 이의 역량에 따라 답을 얻어낼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가하게도 인간은 이런 열린 텍스트의 형태로 후손들에게 비법을 전수했고, 따라서 우리는 같은 텍스트를 놓고서도 상황과 기분(?), 맥락에 따라 각각 다른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반면 인공지능은 어떨 것 같습니까? 답이 일관되면 그 융통성 없음을 놓고 우리는 경멸감을 표시하며, 답이 왔다갔다이면 우리는 그 신뢰성에 의문을 품습니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이긴 하나, 아직 우리는 알고리즘화할 수 없는 그 유동성에서 오히려 고차원 해답을 찾기도 하는데, 이 역시 빼어난 지성만이 누릴 수 있는 체험입니다. 폰 노이만 시스템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폐인이나 외상 후유증을 앓는 이가 계산 등에 한정하여 놀라운 성과를 내는 걸 보고 전혀 경외감을 품지 않으며, 오히려 저건 정신적 육체적 질환이 낳은 병적 우연에 불과하다며 경멸, 폄하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 이제 폰 노이만 시스템의 놀라운 작업 능력을 봅시다. 이게 그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현재 인공지능이랍시고 과장되이 추켜지는 게 그 실상이 고작 이와 같습니다. 디지털 효율을 무작정 숭배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이 이와 같습니다. 디지털은, 그를 요긴히 쓸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갖춘 이에게 유용한 도구로 봉사할 뿐이지, 결코 사람과 주종의 위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저자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 한 대목을 인용하며, 사람이 위대해지는 건 자기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타인의 아픔을 함께 나눔으로써 개체의 한계, 협량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데 있다고 지적합니다. 참으로 타당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기계도 클라우딩 방식으로 손에 손을(코드에 코드를) 맞잡으면 훨씬 역량이 강해지긴 하죠.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수억 서버를 모두 자원병합한들, 타인의 고통에 눈물 짓는 단 한 사람의 착한 마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력, 기적을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간다움"을 잊을 때, 우리는 우리보다 하등한 기계(혹은 그 무엇이든)의 노예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우리 자신의 (사라져 가는) 존엄이지, 기계의 굉음과 차가워서 경멸스러운 연산 효율일 수는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