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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2 - 민주주의의 빛과 그림자 ㅣ 그리스인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경덕 옮김 / 살림 / 2017년 10월
평점 :
세상 모든 일에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만, 서양 고전 문화의 원형을 만들었고 (놀랍게도)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의 초석을 놓았던 그리스 역시, 그 역사와 문화에는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 모두가 선명히 존재했습니다. 이 2권 역시 시오노 나나미 여사 특유의 열정적이고 치밀한 분석과 추적이 돋보이더군요. 아름답고 우아하며 현대인의 눈에조차 세련되고 현명한 족적을 남긴 고대 그리스인의 성취가 뚜렷이 부각되는 반면, "그 어려운 일들"을 남보란 듯 해내고 나서도 버젓이 저지르는 "인간적인 오류"가 안타깝게 역사의 바른 궤도를 뒤집어 놓습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 역시, 초인적인 업적을 달성하고 난 후, "너무도 인간적인" 바보짓의 연발로 비참한 몰락의 내리막 운명을 타는데, 이들 위대한 문명인들 역시 그 운명의 경로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오노 여사는 이 시기 지중해 3대 강국으로 아테네, 스파르타, 페르시아를 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권에서 잘 보아 알듯,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둘을 합친다 해도) 인구 수, 강역, 국부(國富) 면에서 대제국 페르시아와 상대가 안 되는 처지였으며, 1권에서 저자의 감동적이고 세밀한 묘사를 통해 잘 배웠듯, 골리앗을 꺾은 다윗처럼 믿을 수 없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여 절멸과 병합의 위기를 면하고 오히려 상대를 제압하는 쾌거, 기적을 이뤄냈던 것입니다. 오리엔트 저편의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3대 강국은커녕 그 밑에서 노예살이나 할 뻔했던 그리스인들은, 절묘한 타협과 전략적 사고, 자존에 대한 확고한 결의로 생존, 번영, 자존 모두를 지켜 냈습니다. 1권을 꼭 먼저 읽지 않아도 내용 이해에는 지장이 없으나(저자 특유의 스타일로, 책과 주장의 맥락을 독자가 따라오게 하려고 몇 번의 신나는 강조와 되풀이가 이어지기 때문이죠), 1권에 이어지는 독서라야 감동이 몇 배는 더 늘어납니다.
(결과를 뻔히 다 아는 이야기지만) 강력한 페르시아 제국의 진군이 실패로 이미 귀결되었기에 이 2권은 독자 입장에서 "어휴 우리 잘생기고 착한 그리스가 저 덩치 큰 악당에게 혹시 맞기라도 하면 어쩌나" 같은 조바심은 일찍 접고 편안히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저자는 언제나 우리 독자들에게 확실한 감정 이입 대상을 정해 주고 자신만의 신나는 이야기를 따라오게 만들죠. 1권에서도 그랬지만 주인공도 아니고 빌런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이긴 한데, 그래도 미련할망정 정을 완전히 끊을 수 없고 아테네인들 못지 않게 무슨 후속담이 자꾸 궁금해지는 (다른 이유에서 위대한) 스파르타인들 역시, 1권에서처럼 마냥 강력하고 강경하고 무식한 게 아니라, 자기 개성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많이 약한, 또 더 유연해진 모습을 이 2권 전반부에서 드러냅니다. 용기와 지혜의 결과, 포상으로 최상의 번영을 누리는 주인공 아테네, 좀 기가 죽고 유해진, 주인공에 대한 질투 때문에 발목잡기를 일삼던(일단 이렇게 쉽고 유치한 프레임으로 봐야 재미가 나죠) 스파르타, 기가 팍 죽은 악당 페르시아, 이 3자간의 편안한 역할 배분이 이뤄진 덕에 2권 전반부는 확실히 편안하게 읽어갈 수 있습니다.
1권에서 비교적 다양한 얼굴들이 등장해 이야기 뼈대를 잡기가 조금은 귀찮았던 독자(그런데 정말 이렇게 느꼈다면 그런 독자들은 정말 많이 게으른 분들입니다. 줄기가 정말 복잡히 뻗은 고대 그리스사를 그 정도로나마 요령껏 간추려 놓기도 힘들거든요. 로마사와는 또 차원이 다른 분석상의 난해함이 엄존하는 그리스 역사 다루는 솜씨를 보고, 이제서야 시오노 여사의 진가를 확인하게 되네요)라 해도, 이 2권은 진짜 "이야기"만 쭉쭉 진행되는 구조라서 훨씬 재미있게 읽힙니다. 1권은 또한 진지한 제도사 분석이 부분적으로 이뤄져서(굉장히 유익하긴 해도) 흐름이 끊기는 면이 있었다면(그렇지도 않았습니다만 정말 "이야기" 하나만 추구하는 독자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었을 겁니다), 2권은 그나마 그런 애로(아니지만)도 없이 시원한 관람과 질주가 가능합니다.
왜 그리스, 로마 역사가 재미있는가 하면, 구도상 승패가 빤히 정해져 있을 것 같은 싸움도, 영리한(혹은 위대한) 주인공의 기지와 자질 때문에 의외의 방향으로 확 뒤집히는 결과가 빈번히 일어나거든요. 키논 역시 상식대로라면 그 위업과 공적 때문에 영원한 정치적 승자로 위상이 굳어야 할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라는 놀라운 정치적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대 정치가(키논에게는 후배이자 라이벌 진영의 경쟁자)가 등장하여, 아테네와 전체 그리스의 역사가 지극히 아테네적인(후대인들의 규정대로) 방향으로 흘러가게 키를 틀어 버리는 역할을 맡습니다. 시오노 여사의 평가에 의하면 "모든 것을 다른 관점에서도 바라보게 만들어 버리는, '유도하는' 천재적 능력" 때문이었죠.
이 능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단 자측이 수세에 몰렸을 때, 생각지도 않은 지점에서 돌파구를 찾게 도와 줍니다. 혹 싸움에서 져서 침체되었을 때, 재기와 대안과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건 이른바 아Q식의 정신 승리와 달라서, 발상이 그에 도달한 순간 바로 의욕을 갖고 극복을 위한 실천에 나설 수 있다는 게 큰 차이입니다. 억지로 기뻐 날뛰거나 합리화, 자기 위안, 현실 도피를 하는 게 아니라, "왜 그걸 몰랐지?"하며 진지한 각성효과가 나타난다는 게 특징이죠. 책에는 "키논이 연설하면 청중들은 감동하고 울컥하고 격동되었지만, 페리클레스가 연설하면 사람들은 자기들 생각을 멈추고 골똘히 경청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날카로운 지적이자 충분한 근거 있는 상상이며, 정치가나 지도자가 전자 같은 자질을 갖기도 힘들지만 후자는 정말로 드물며 위대한 자질입니다.
마치 카이사르나 중근세 체사레 보르자에 대해서처럼, 이제 미남 페리클레스를 붙잡고 이 시오노 할머니가 또 덕질 동인질 시작이구나 하는 분들도 있겠는데, 그 정도로 감정적 폭주를 하시지는 않습니다(저도 왕년에 여사의 그런 경향을 엄청 개탄했던 독자로서, 이 점은 제가 보증합니다. 진짜 원숙해지셨어요). 아 물론, p119를 보면 "고대 3대 미남"'이라면서 아휴! 이분 또 시작이네 싶은 대목도 없지는 않은데, 게다가 간지럽게도 그 구체적 규정은 페리클레스=편안한, 알키비아데스=위험한, 옥타비아누스= 냉철한 아름다움 이라니 독자의 오래된 닭살이 또 돋을 밖에요. 근데 좀 다분히 의식을 하셨는지, 페리클레스에 대한 기술은 꽤 차분합니다. 이거 후반부나 3권 위해 뭘 아껴 놓는 것 아냐? 이렇게 드라이하게 진행할 리가 있나? 모르긴 해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분명 의식을 하시는 겁니다.ㅋ
키논에 대해 저자는 "친 스파르타"로 분명히 포지셔닝을 합니다. 위업은 위업대로 이루고도 제 본향에서 흔쾌히 인정 못 받는 거물들이 꼭 있는데, 그 이유는 인물 개인의 정체성과 지향이 소속, 출신 집단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파르타에 태어나 불세출의 패권 정치가가 되어야 했을 사람이 이 시끄러운 아테네에 태어나 할 말도 채 못 하고 저 마음고생을 하고 있으니(물론 스파르타도 전통과 시스템에 의한 독재지 개인의 의지가 체제를 바꿀 수는 없는, 희한한 보수 구조였죠)... 그렇다고 그 위대한 인물이 개인 감정이나 에고 때문에 배신자의 길을 걸을 수는 없고, 동시대인들을 안타까이 여기면서("에휴.. 니들도 참. 답은 저건데 말이야....") 최대한 키를 그쪽에 가깝게 몰고는 갑니다. 그는 분명 스파르타식의 엘리트 과두정치를 꿈꾼 인물 아니었겠습니까? 그의 현명한 선택은, 자신의 시선과 조국의 열망 그 방향이 어긋나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절제를 유지하면서 최대한의 타협과 조화를 도모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도 마찬가지로 현명했습니다. 싫은 사람 무작정 배척하지 않고, 그의 위대한 자질(특히 군사 방면)이 최대한 (자신을 위해, 그리고 조국과 사회를 위해) 발휘되도록 최소한의 리스펙트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스파르타는 이 시기 특히 하층민들의 반발로 큰 고생을 하는데, 종래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던 대목이 드라마처럼 재생되는 느낌이 신기하더군요. 이런 거 하나만 봐도 확실히 시오노 여사 특유의 맥락화, 팩트의 재정돈 버전으로 읽으니 뭔가 재미랄까 역사 읽는 동기 부여가 확실히 되는 느낌입니다. 다 아는 소린데도 재미있고, 이거 내가 알던 지식을 이렇게 강제(?) 재해석 당해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도 금세 진정될 만큼, 이 2권은 밀도 있게 잘 쓰여졌습니다. (거칠게 요약해서) 전반부가 페리클레스, 후반부가 알키비아데스(의 모에화?)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좋은데, 다 읽고 나니 이런 위대한 남성들의 행적은 열정적인 여성 찬미자의 시선과 해석으로 읽을 때에만 비로소 눈에 띄는 뭔가가 있지 않은가 하고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얼씨구!). 알키비아데스 같은 인물은 고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도 꽤 인상깊게 다뤄지곤 하는데요(페리클레스도 마찬가지지만 그 사람이야 또 위상 자체가 다르니), 이처럼 재미있게 낭독되면서도 사료 조사가 치밀히 이뤄진 웰메이드 대중서 덕분에 그 고전의 수요가 좀 줄어드는 건 아닌지, 아주 쓸데없는 걱정도 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