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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경험
보도 키르히호프 지음, 서윤정 옮김 / 붉은삼나무 / 2017년 9월
평점 :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가 발달하기 전엔, 종이(묶음)를 매체로 삼는 출판업이나 언론 섹터가 더 호황을 누렸던 건 분명합니다. IT 분야의
혁신이, 저들 업종에 본질적 위기를 몰고 온 걸까요, 아님 이런 기술적 진보와 원칙적으론 무관하게, 대중의 기호가 더 이상
전통적인 방식의 "이야기와 정보의 소비"를 원치 않게 된 걸까요. 마셜 맥루언식의 오래된 문제제기처럼, 메시지가 중요한가 아니면
메시지를 담은 미디어가 더 중요한가의 딜레마가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라이터 씨는 중년 연배와도 제법 오래 전에 헤어진, 노인이라고 해도 무리 없을 나이 많은 남성("공식적으로".
p44:2)이며, 단 정황으로 보아 그닥 나이 들어 보이지는 않는 외모인가 봅니다. 그가 추억 속에서 그토록 자랑스레 여기는
"여자 친구"가, 예순을 넘기고도 마치 서른 살 먹은 여성 부럽지 않게 선명한 개성과 매력과 활기와 지성을 발산하듯, 모르긴 해도
이분 역시 근사한 스타일을 유지하며 품위 있게 늙어가는 중산층 신사 같습니다.
라이터
씨는 출판사를 경영하는 사장입니다. 아니, 사장이"었"습니다. 소설 후반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오는데요. "거대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마지막 빙하처럼, 진부하고 평범한 것들의 열기에 녹아 버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의 출판사(p162) (하략)" 이 한
마디로 그가 어떤 경위로 출판업을 접었는지는 짐작이 됩니다. 소설은 내내 자세한 설명을 삼가는 톤입니다만, 이는 주인공 라이터
씨나, 느닷 만나고선 이내 뜻이 통해 (이 소설의 주된 사건 줄기가 된) 짧은 여행의 동반자 노릇을 해 준(물론 그녀가 더
원했다고 봐야 할) 레오니 팜이나, "말이 너무 많은 것"을 싫어하는(예를 들어 p30, p55 등) 사람들인 걸 감안하면,
사건이 아닌 심상과 감정의 단면만을 툭툭 던지며 진득한 메시지를 담아가는(우리의 공감을 유도하는) 작품의 포맷은 명과 실이
상부하는 셈입니다.
특이한 여름 신발을
신고 찾아와 계절을 앞당긴(혹은, 반대로 혼자서만 계절에 뒤처진- 이 대목은 라이터 사장이 그녀에게 왜 반했는지 암시하는 중요한
의의를 갖습니다. 자신이나 팜이나 똑같이, 자신의 시대에 속하지 않는 "아름다움과 멋"을 지닌 동질감을 인식하거든요) 레오니
팜은 뜬금없이 라이터 씨의 직업을 묻고 나선, 자신을 두고 "폐업한 모자 가게 사장"으로 소개합니다. "음.. 제 가게에서 모자를
사는 사람들이 점점 줄더라구요." 요즘은 거꾸로 다시 모자를 채용한 패션이 슬슬 뜨기 시작하는 추세입니다만, 남녀 불문하고
사람들이 더 이상 헤어를 모자로 가리지 않게 된 건 꽤 오래 전입니다. 그러니 라이터 씨의 은퇴와 팜의 폐업을 같은 선상에서
보기는 무리고요. 이는 자신의 일에 더 이상 열정을 못 갖게 된 이들 중년(노년)들의 핑계, 혹은 "위장된 이름(p18. 표면상
다른 문맥이긴 하지만 결국 같은 함의라고 봅니다)"이 아닐지 저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속한 세대도 다른 두 남녀가 (이때까지는)
오직 이 지점에서만 교점을 갖는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타인의
일을 장본인보다 더 생생히, 신이 나서 타인들에게 내레이션하는, "남자들이 그녀를 볼 때면 잠자리까지 같이 연상하게
마련(p29)"인 불가리아 금발머리 여성 마리나는 결국 동료(?)인 에리트레아 여성 아스터와 공동 운명체입니다. 정작 아스터는
자신의 엑소더스 스토리를 그닥 즐기지 않고, 마리나가 요란스레 독일인들 앞에서 거의 규격화, 상품화한 버전으로 방송에 재방송을 해
대는 모습도 싫습니다. 이런 아스터에게 라이터 씨가 끌리는 건 확실히 이유가 있습니다. (리뷰 후반부에, 제가 생각한 이유를
적어 보겠습니다)
이제 "방문객에서
동행인으로 격상된"(p50) 팜은 라이터 씨와 함께 차를 타고, 남부 독일에서 알프스를 지나 이탈리아 남단으로 먼 여행을
떠납니다. 이탈리아 반도가 남북으로 아주 무한정 길게만 뻗은 거리는 아니겠습니다만, 번거로운 중간 설명이 일절 생략된 채 둘은
해협을 사이에 둔 시칠리아 섬에 어느새 도착하여 회포를 풉니다. 애착과 가치를 두었던 인연, 업무, 열정의 대상이 모두 자신을
배반하고 떠났다는 핑계, 혹은 "위장된 이름"을 대지만, 쿨하게 이들을 먼저 떠나도록 손짓한 건 오히려 라이터씨(나 그의 일시
동반자 레오니 팜)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아무튼 이 도중에 그들은 한 이상한 소년을 만나는데, 라이터 씨의 표현에 의하면
"애매한 게 아니라 끔찍한 침묵의 사자(p134)" 같았다고 합니다.
두
남녀는 그간 작위적으로 불러들인 고독 때문에 견딜 만한 취미성 마음앓이를 하는 중이었습니만, 동행인이 생기자 단수에서 복수로
위상이 바뀝니다. p95에서 procedunt, p101에서 ambulant라며 서로 반대되는 뜻의 라틴어 동사(꼭 반대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튼 라이터 씨는 그리 의미 부여를 하네요)의 (3인칭) 복수형을 되뇌는 건 다 그런 "극복, 탈출"의 안도감을 그들
나름대로 표현한 겁니다. 지중해 저편에서 목숨만을 그저 건지기 위해 험한 꼴을 다 겪으며 바다를 건너는 난민들과는 사뭇 다른
의미겠습니다만. 저 동사들이 1인칭 복수("우리")가 아닌 3인칭 꼴을 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겠고요.
앞의
저 소년이 일종의 예고편이었다면, 본편은 타오르미나 어느 식당에서 만난 부랑아 소녀였습니다. 이미 "단수(single) 신세"를
면해 복수(plural)이 된 그들이지만, 뭔가 이기적인 섬처럼 (아름다우나) 낯선 땅에서 스쳐지나가는 관광객이 되긴 싫었던
그들입니다. 그들은 소녀에게 속하고 싶었고, 이런 체험을 통해 서로에게 더 단단히 결속되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저 부랑아
소녀를 가운데 두고 "의사 가족"을 이루려던, 작은, 꼭 진지하다고만은 할 수 없던, 소망이 "칼라 밑까지" 이미 내려간 겁니다.
입에서 오물오물 희망만 되뇌던 단계는 지나갔다는 뜻이죠.
이
소녀는 앞에서 말한 에리트리아 출신 난민 아스터의 "다른 분신" 정도로, 그들은 시칠리아의 풍광 속에서 받아들였던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칠리아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마련해 둔 영화 <대부>의 상징물처럼, 그들은 어쩌면 이기적으로 이 소녀의
마음은 아랑곳않은 채 자신들의 허한 마음을 채우는 매개체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나마 소녀의 속마음에 공감한 건 팜이었으며,
어느 순간 전혀 근원이 다른 존재의 이질감, 거리를 확인하고야 만 라이터 씨는, 짧은 충돌과 몸싸움 끝에 팜과 소녀 모두를
잃습니다. 그는 그렇게 다시 "혼자, 단수"가 됩니다.
여담입니다만
주인공 라이터씨는 독일어 철자가 Reither인데, 이걸 한국어로 음사하면 "라이터"가 되어, 소설 곳곳에서 "담뱃불 붙이는
라이터"라든가, "차의 전조등" 같은 것과 내내 가까운 거리에서 착시를 유발합니다만, 이는 한국어판에서만 우연히 빚어진 재미있는
사정이겠습니다.
(전략)나이지리아 남자에게 담배 한 개비를 줬으나, 그는 그저 라이터란 이름을 라이더로 반복해서 부르며 화제를 바꿨다. (p256)
(전략)라이터를 가리키며 라이터라고 그의 이름을 말했다. 그래도 그녀(소녀)는 테이블 위 담배와 라이터만 바라보고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p168)
이 대목들 말고도, 숙소에서 라이터가 라이터를 떨어뜨렸을 때 소녀가 집어 주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도 주어와 목적어가 같은 꼴이라 묘한 느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