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린터 - 언더월드
정이안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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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단거리보다는 장거리 달리기에 더 특화된 종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라토너들 못지 않게 100m, 200m 등 단거리 선수들에게도 큰 환호를 보내며, 광고 시장 등에서의 "상품 가치"는 이들 단거리 선수가 더 높이 매겨지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에는, 인간의 눈 앞에 더 바싹 다가선, 더 높이 세워진 한계, 장벽에 도전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고 장쾌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있겠습니다.

폭발적인 스피드를 내려면 물론 근력도 갖춰져야 하고 (이 책 중간쯤에도 언급이 있는 대로) 유연한 리듬감도 배양되어야 만족스러운 기록이 나올 것입니다. 테니스 같은 스포츠와는 달리 육상 단거리는 10대 시절에 전성기를 맞기 어려운 까닭이기도 한데, 여러 이유로 동아시아인의 신체 특성은 백인이나 흑인 등에 맞서 겨루기 어려운 한계도 지녔죠. '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쾌거를 이룬 류샹 선수가 당시 크게 화제가 된 건 그래서 당연했습니다.

이 소설 속에서처럼, 아직 어린 청소년이, 우리 동아시아인에게 영원히 아득한 목표처럼 여겨지는 육상 단거리에서 빼어난 기록을 세우고, 전국민(나아가 세계인)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다면 참 신나는 상황일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작품 속 1인칭 주인공 "강단"은, 매니저 스티브의 실수로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도핑 테스트에서 적발된 탓에, (이 작품 속 표현을 그대로 따르자면) 한순간에 "국민영웅에서 국민 쓰레기로" 전락한 형편입니다. 악플에 시달리고 비전도 사라진 채 막막한 신세가 되어도 이 소년이 버텨낼 수 있는 건, 피 한 방울 안 섞였음에도 불구하고 친동기간보다 더 사이가 좋은, 창던지기 선수 지태, BJ 연아, 이 둘과 영원한 삼총사로 즐겁게 지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견뎌낼 수 없는 일도, 나의 분신, 혹은 alter ego라 할 또래 친구들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고통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세 소년소녀는 각각 다른 가정에서 자라다 한순간에 고아가 되었는데, 아이들을 모두 입양해 자신의 친자녀처럼 키운 고마운 "엄마"가 한 분 계십니다. 무작정 사랑을 베풀고 매사에 양보를 해 줘도 사춘기 아이들이라는 게 마냥 착하게 굴지만은 않는 게 차라리 당연한데, "어떤 일"을 계기로 이 아이들은 엄마가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깨닫고 정말 화목한 가정을 이룹니다. 이런 배경 사정은 회상과 대화 중에 지나가듯 언급될 뿐이고, 소설은 막을 엶과 동시에 거의 막바로 초대형 테러의 발생으로 서울, 우리가 사는 바로 그 도시, 전철 1~8호선과 몇 종류의 노선이 더 복잡히 얽히며 운행되는 그곳에서, 커다란 혼란이 빚어진다는 급박한 전개로 돌입합니다.

전철 테러는 픽션에서 드문 소재가 전혀 아닐 뿐더러, 아직 애들이다 보니 세 주인공들의 감정선이 지극히 단순한 터라(단, 여자애인 연아가 꽤 똑똑하고 예리한 편입니다), 처음에는 별 기대가 안 되었던 게 사실입니다. 대개 이런 영 애덜트 대상 SF 판타지(단, 이 소설이 판타지에도 무난히 분류될지는 좀 생각을 해 봐야겠습니다)에서 설정은 매우 참신하고 거창하게 벌여져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결국 참신한 초기 세팅이 재미의 전부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 소설은 반대였습니다. 갈수록 설정 밀도가 높아지고, 서서히 드러나는 진상도 충격적으로 꾸며졌습니다. 캐릭터들도 처음에는 "그저 애들"로 여겨졌는데, 이야기가 흥미진진 전개될수록 각자의 개성을 더 굳혀가더군요. 천진난만하면서도 의심이 많고, (요원 기현국의 노림수대로) 설익은 영웅주의에 쉽게 휩쓸리지 싶으면서도 영악하고 이기적인 면모도 드러내는 터라, 실감과 입체감이 돋보였습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육상 기대주였다고는 하나 능력, 인격, 감성 모든 면에서 성장 도상에 놓인 아이들일 뿐이고, 그나마 다른 두 아이는 평범한 자질일 뿐입니다. 또 자신의 세계가 붕괴 직전의 위험에 놓일 때, 그저 익다 만 "달리기 재능" 하나로 어떻게 만인을 구원하겠습니까? 물리적 능력은 물론 정신적 준비도 채 갖춰지지 않은 이들은 그래서 아직 영웅으로 부상할 마음도 안 먹은 상태이며, 당장 이 재난으로부터 자신들과 "엄마"부터 살리기나 하고, 이후에는 "하와이(그저 국외 세상의 은유로 보입니다)" 등으로 이주하여 자신들을 푸대접한 한국과 절연할 생각마저도 품습니다(특히 지태). 이 책은 앞으로 장대히 이어질 <스프린터> 시리즈의 첫 권인데, 이처럼이나 주인공들은 어설프고 무력합니다. 앞으로 길게 이어질 후속 사연에서 우리 독자들은 이들이 "커 나가는 과정" 그리고 죄 많은 세상이 어떻게 정화될지를 지켜 봐야 하겠지요.

[이하 내용 누설이 있으므로 주의해서 읽으십시오. 가능하면 안 읽는 편이 낫습니다]

타락하고 음흉한 정치인인 박정근 대통령, 주한미군 사령관, 국정원장, 에너지공단 이사장(ㅎㅎ) 등은 거의 절대악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남산(과거 중정에 의해 여러 만행이 저질러져 탄압과 압제, 음모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도 한) 아래에 "노아"라는 거대한 지하 공간을 건설합니다. 여기서 권력은 노숙자들, 실직자들, 혹은 4류 코미디 영화에서 참된 자아상을 발견하는, 테러리스트를 닮은 부적응 호구 등을 대거 끌어들여 생체실험을 하는데, 기본 전제는 "이 좁은 지구에 사람이 너무 많이 산다"는 겁니다. 다수는 생산에 기여도 못 하고 그저 다른 이의 짐이 될 뿐인데, 그렇게 의미 없는 연명을 할 바에야 마루타 노릇으로 동시대인과 후손에 좋은 일이나 좀 하라는 거죠. 과학자들은 인체를 통해 핵에너지를 능가할 만한 엄청난 근원적 힘을 뽑아낼 수 있게 되는데(소설 속의 표현에 따르면, 이 배터리를 일렬로 세워 미 대륙을 횡단하게 할 경우 일시에 폭발시켜 지각 전체를 다 날려버릴 수 있다네요), 이들 노숙자들이 항구적 바이오매스처럼 포박된 채로 지상의 거주자들을 위해 싼 값으로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괴생명체인 프로젝트 피조물 하나가 중요한 구실을 하는데, 얘 이름이 "신야"입니다. 정체가 계속 가려져 있다 후반부에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는데 마치 폴 버호벤의 <토탈 리콜>에서 반란군 지도자 쿠아토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사실상 하등 종족으로 고착화한 노숙자나, 그곳 화성의 방사능 오염 돌연변이 족속이나 닮은 점도 많은데, 여기서의 신야는 섬뜩한 늙은 추물인 쿠아토와는 달리 중성적 외양의 꼬마이며 독립 신체를 지니고 잘 돌아다닙니다. 잘 돌아다닐 뿐 아니라 염력으로 비언어적 소통을 자유롭게 행하는데, 쿠아토뿐 아니라 <맨 인 블랙 III>에서의 그리핀과도 비슷한 능력입니다. 아니면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에 나오는 그 누구하고도 좀 닮았죠.

여기서 압권인 건 국정원 요원 기현국이 아이들 셋의 행방을 드론으로 파악한 후, "빨간 버튼을 눌러" 모두를 구하라고 이중의 거짓 설득을 하는 장면입니다. 자기 딴에는 철두철미한 양심의 발로로써, 윗선의 (더 잔인하고 야비하며 파렴치한) 지시까지 생까고 짠 계획인데, 이 말을 들으면 우리의 주인공들은 다 죽게 됩니다. 이들이 위기를 모면하는 과정은 직접 책을 읽어 보고 확인하시고요. 근데 신야가 너무 사기 유닛이라 능력치 밸런스가 좀 안 맞기도 합니다. 신야는 모든 것(못나고 유한하며 어리석은 인간들[동시에 자신의 창조주이기도 한]의 탐욕, 감정 따위)를 이해하지만, 그 천박함과 빤함에 질렸는지 내내 냉담하고 태연하며 무관심한 표정입니다. 이런 캐릭터의 매력과 개성이 앞으로 이 긴 사연을 이끌어 갈 하나의 동력이기도 하겠습니다.

p280이하에 보면 철덕을 자처하는 어느 네티즌(이렇게 평범하고 이름없는 선의의 시민들이 모여, 아직은 어설픈 주인공들을 도와 악한 세력의 음모를 분쇄한다는 게 주제의식 이해에 필수인 사정이죠)이, "이 테러가 참으로 이상한 게, 그렇게 특정 구역만 클리어 커팅하듯 파괴하는 폭파가 현 기술 수준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웹에 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대목의 상세한 설정은 작가의 심도 있는 연구가 선행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서술이었을 겁니다. 그저 기발한 상상만으로는 SF가 현대 독자의 구미를 사로잡을 수 없는데, 이런 성의와 설계상의 치밀함이 읽으면서 참 좋았습니다. 다만 용병대장 뭐 이런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뿐, 이런 극비의 프로젝트에 뭘 한몫 낀다는 게 좀 현실감이 떨어지지 않나 싶었고, 작가도 그 점을 의식했는지 의심을 받고 발끈하는 모습을 삽입하기도 합니다. 2부가 여튼 많이 기대되네요. 투자비 많이 들여서 한국형 헝거게임이 영화 포맷으로 또다른 한류 열풍을 일으켰으면 하는 응원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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