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선비들 - 광기와 극단의 시대를 살다
함규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광기와 극단의 시대를 살다."

선비들이 가장 처세하기 어려운 시기라면 당연 정치권력의 지평이 급변하는 때이겠습니다. 교활한 상인들이나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저 새로운 질서에 영합하여 잇속을 취하거나(참으로 가증스럽지만 본디 천한 장사치들의 생리가 그러하니 탓할 일도 아닙니다), 가뜩이나 주리던 배를 혼란기에 더 곯지나 않게 생존에의 고민에 정력을 쏟으면 그만이죠. 하지만 특히 동아시아 전통 유학의 가르침에 지조와 지성을 바친 이들이라면, 육신을 지닌 인간이기에 물리적 생존도 꾀해야 하고, 공부한 게 아까워서라도 입신 출세의 길을 곁눈질도 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닦은 정신의 칼날이 아까워서라도 아무에게나 충성을 바칠 수는 없고, 여러 모로 고민의 겹이 두터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뼈대 있는 가문에서 자라 남달리 총명하단 소리를 듣고 자란 이들이, 하필 이런 난감한 시절을 만나 극단의 번민과 훼절을 일삼거나, 혹은 반대로 대쪽 같은 지조를 지키다 한생을 마치는 과정은 그래서 남다른 감회를 부릅니다.

이 책에는 주로 구한말, 일제 강점기를 시대 배경으로 삼아, 다양한 이력과 평판을 지닌 이들의 생애가 압축되어 실렸습니다. 모두 스무 명의 "선비" 열전인데, 이들 중 상당수는 (당연하지만)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름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유방백세, 어떤 이들은 유취만년, ... 그들이 몸 담고 분투한 분야는 다양해도, 이처럼 "선비"라는 범주 하나에 공통적으로 묶일 수도 있다는 점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선비의 생을 압축적으로 소개했다지만, 다들 익히 알려진 인물들이기에, 사항 나열이나 행적 요약에 그치는 또하나의 책 아닌가 생각도 잠시 했었으나,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매 장은 저자의 개성적인 관점이 충분히 녹아 있고, 그간 전해 오는 정보를 비교문헌 방법론이나 일반 고증을 통해 비판한 대목도 많으며, 무엇보다 문장이 명쾌하고 유려합니다. 그런 반면 현재 한국의 정치판을 어지럽게 더럽히는 진영 논리(어느 편이건 간에)가 최대한 절제되어 있어, 어떤 편향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 친일 성향이 두드러진 인물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인간적인 번민이라든가, 권력과 총칼 앞에 누구라도 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치를 고려하여, "인간을 인간으로 본 시선"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완용 같은 구제불능의 악질은 (그가 혹여 선비적 소양이 매우 뛰어난 면 있었다 쳐도) 아예 논의의 대상이 안 됩니다.

친일파의 대척에는 당연히 우국지사의 지조 높은 삶이 서 있겠으나, 이 책은 무능하고(선비로서야 탁월했겠으나, 관료로서 지도자로서 한없는 결함을 노출했던) 유약한 선비들 못지 않게, 그들의 꽉 막히고 융통성 없는 사상적 경향, 나아가 시대에 뒤떨어진 사대, 모화사상까지도 짚고 넘어갑니다. 모든 선비는 그 나름의 이유에서 비판 받을 이유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남다른 재능이나 의기, 집념으로 이룬 학문적 성과를 또 따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고지식한 훈구 척사 진영이 있는가 하면, 양심과 쓸개를 모두 팔아넘기고 일제에 들어붙은 이들도 있는데, 그 중간에 서서 추상같이 민족 반역자를 타매함은 물론, 시류를 무시하고 고지식하게 옛 질서에 집착한 이들까지도 싸잡아 비웃은 매천 황현 역시, 저자는 그만이 범했던 독특한 오류를 지적하며 비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물론 뛰어난 점은 그것대로 선명히 짚고요. 이처럼 오로지 근대성의 관점에서 모든 인물을 재해석하기에, 유치한 선과 악,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이 독자를 호도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최익현은 일생을 두고 흥선대원군과 척을 진 사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물론 대원군 개인에게 증오의 초점을 두어서라기보다, 그가 지향하는 정통파 유학의 이상향을 구현하는 데 이하응이 일일이 장애물 구실을 해서였을 겁니다. 척화비를 세우는 등 대원군이 필요 이상의 강경노선을 걸었던 것도, 이들 최익현으로 대표되는 정통파 유림과 선명성 경쟁을 벌이다 보니 원치 않던 선을 넘은 것도 있겠지요.

중반부 박제순 항목에 지나가듯 언급되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외국의 외교관들이 그를 평가하길, 말귀를 잘 알아먹으면서도 강경하지 않아서 좋다고들 했다..." 이 말은 뒤집어 새기면, 말귀도 못 알아먹고 무조건 대책없고 비현실적인 강경론만 고집한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도 됩니다. 물론 박제순은 뛰어난 어학 실력을 자랑하는 유능한 관료였겠으나, 이 책에서도 뼈아프게 지적하듯 강단도 없고 의기도 부족하고 긴 시야로 시국을 내다보지도 못한 채, 그저 무력과 협박에 굴복하는 걸로 처신의 전부를 채운 불쌍한 친일파였습니다. 이 점에서, 저 혼자 신이 나서 친일과 매국의 풍악을 울린 이완용과는 구별되죠. 또 책 뒤에 나오듯 마음으로부터 일본의 문물을 사모했으면서 정작 세상이 바뀔 때 훈작이나 금품을 챙기지도 못한 이인직(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빈선랑을 두고 저자는 전국시대의 세객 장의와 비교하는 탁견을 제시하네요) 같은, 어리석고 둔한 친일파와도 다릅니다. 김윤식은 어떤 포지셔닝을 하기가 좀 모호한 편인데, 유명한 불가불가(세 가지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되죠) 코멘트가 그의 흐릿한 개성을 잘 대변합니다(저자께서는 이 일화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입니다). 여기 잠시 등장하는 외부 교섭국장 이시영은 물론 우리가 잘 아는 권투선수... 가 아니라 초대 부통령인 바로 그분입니다.

유길준과 김옥균은 이들과는 또 빛깔이 많이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는, "양반 권귀 가문의 엘리트들은 물론, 상놈(책에 나온 표현 그대로입니다) 출신, 궁녀 할 것 없이 그가 내세운 대의에 공명하여 죽음도 개의치 않고 거사에 동참했다"고 하시는데, 그가 예사로운 인물 같았으면 결코 이런 헌신적인 동지들이 따르질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본에 망명하여 파당적 활동에 몸 담는가 하면, 특유의 풍류 거사 기질을 못 버리고 한가하게 로맨스를 벌이기도 하죠. 저자는 특히 "마지막 몇 달만 참았던들 오히려 정계 중심에 화려하게 복귀할 수도 있었다"며 정치적 안목에 대해 낮은 평가도 하는데, 제 개인적 생각으론 결과론적 성격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여튼 흥미로운 견해이긴 합니다.

김옥균 못지 않게 부유한 태생이었으면서도 유교의 정통 교리에 충실하기 위해 "극단적 청빈"을 택한 선비로는 전우라는 분이 있습니다. 사실 서양의 초기 기독교도 그랬고 특정 가르침에 문자 그대로 충실하며 엘리트의 가치를 지키려 든 이들은 대개 물질과 물욕을 아주 크게 배격했습니다. 전우의 사례는 좀 의아한 면이 없지 않으나, 그가 가르친 제자들 중 김병로, 백관수 등이 모두 빼어난 인재로 성장한 걸 보면 은둔자로서의 그의 생이 참으로 보람에 가득찼다고밖에 평가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평안히 다지고 정신의 평형을 찾았기에 당시로서는 극히 장수한 편인 팔십수를 누린 것이겠고요.

최익한 역시 뼈대 있고 가세도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기로 유명했는데, 다만 저자는 특유의 예리한 분석으로 "그저 암기력이 출중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놀랄 만한 기재를 뽐냈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 마디를 하시네요. 어느 편이든 간에 종래의 유학 경전 암송, 과거 급제, 출세의 루트가 유일한 인생의 목표였던 세상이라면, 이분은 의심의 여지 없는 신동 반열에 올랐을 겁니다. 대개 신중한 성품이었던 그는, 스승이자 아버지와도 같았던(저자의 표현입니다) 곽종석이 일제의 모진 처사로 목숨을 잃자, 그때부터 거침없는 실천가, 혁명가로까지의 노선 전환을 보이며, 나중에는 사회주의자, 맑시스트로까지 변신합니다. 이 챕터 끝에는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풍채가 근사한 젊은 날의 김일성이놈도 보이고, 그 뒤를 백범이 걸어가는 귀한 사진도 실려 있습니다. 아마 저자의 의도는 이 남북협상단의 일원으로 최익한이 참여했음을 독자에게 상기시키려는 거겠지요. 백범은 본인 자신이 유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므로 어느 기준에서도 "선비"에는 못 끼는데, 책에는 유림의 유(儒)가 겁쟁이 유(懦)와도 통한다더냐?라고 비웃던 그의 일화도 나와 있습니다. 백범은 이 책에서 여러 대목에 등장합니다.

심산 김창숙이나 단재 신채호처럼 그야말로 굽히지 않는 절조와 강단으로 일생을 채운 분들도 나오는데, 저자는 특히 "해방 후 점령군처럼 느닷 성균관을 장악한" 심산을 두고 여러 소회가 엇갈리시나 봅니다(모교의 창설자이시기도 한데). 이처럼 비범한 기개와 총기를 자랑한 분이 있는가 하면(다수죠), 머리가 그리 좋지 않아 이십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진로를 고민한 이병헌 같은 선비의 일생도 우리 독자에겐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백범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만년에는 무도한 약육강식의 풍조에 염증을 느껴 "유교의 종교화"만이 모두가 살 길이라는 결론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는 사실 성균관이 지금까지도 말끔히 해결 못 한 난제이고 고민이기도 하죠. 선비들의 고뇌와 번민에 가득찬 행보를 보며, 우리 민족이 이 근세를 얼마나 힘들게 통과했는지 더듬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