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 -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마음의 비밀
대니얼 웨그너 & 커트 그레이 지음, 최호영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정말 멋진 책입니다. 편제도 우아하고, 예거(例擧)되는 샘플들도 적절 참신하며, 문장도 유려합니다. 결정적으로, 점근해 가는 결론과 주제의식도 보편 공감을 끌어낼 만큼 타당합니다(책을 완독하고 좀 더 생각에 잠기면, 참으로 심오하기까지 했다는 판단입니다). 저자 중 대니엘 웨그너는 아직은 활동을 더 이어가실 연령이었으나 4년 전에 아깝게 타계했다고 하죠. 제자인 커트 그레이의 공헌이 이 책에서 어느 정도인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으나, 앞으로 이런 멋진 저술(후속작이 꼭 나왔어야 했는데요. 작금 이 분야 연구가 점점 가속 진행되는 상황을 고려하면)을 또 독자들이 만날 수 있겠을지를 떠올리면 참으로 아쉽습니다.

제목을 보십시오. "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극상, 최하, 평균을 가리키는 건가? 글쎄요. 저는 그보다는, 이 책의 원제에 좀 주목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마인드 클럽". 클럽이라고 해도 다양한 성격과 구조를 가졌겠습니다만, 이 클럽은 일단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가입 가능합니다. 클럽에 못 끼는 이들이라면, 채소 같은 걸 일단 저자는 듭니다. (ㅎㅎ 그러나 속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갓난아이는? 고양이는? 죽은 자의 영혼은? 회사, 기업은? 세번째 것에 대해서는 그 존재를 확증 못한다뿐, 혹 그런 게 있기나 하다면 대번에 가입을 시켜야 하지 않나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이라는 게, 생전의 기억도 다 잃었고 관계 일체도 상실했다면, 그래서 그저 부유할 뿐이라면, 과연 "마음"을 가졌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죠. 네번째가 차라리 더 복잡한 문제입니다. 일찍이 기에르케 같은 학자는 "유기체설"을 주장한 바 있고,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거론한 니부어를 꼭 상기하지 않더라도 기업에 속한 개인은 순수 개인적 가치관과는 또 별개의 논리와 목표로 움직이는 법입니다. 마케팅 학자들은 "기업에는 반드시 독자적인 논리와 개성과 정신이 스며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기업은 영속하지 못한다"고도 했으니 어찌어찌 ㅎㅎ 앞뒤가 맞아떨어져 가기도 하는군요! (농담입니다)

동물이 고차 사고 능력을 못 갖췄다는 데에는 많은 이가 동의하겠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어난 여러 사고나 범죄 등에 대해 "그들"이 책임을 져야 옳을까요?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현재 사고를 일으킨 동물 등에 대해서는 관련 법규가 살처분 따위를 강제하지만, 그게 그 동물들에 책임을 묻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지은 죄에 대해 벌을 내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대개는 입법 목적이, 같은 위험을 재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인간과 사회를 방위할 의도로 그런 조치를 집행하는 거죠. 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도, 인간에게만 이행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동물은 그럴 자격조차도 없는 겁니다. 아동, 심신상실자, 지적 장애인, 만취자(단, 여기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예외가 적용되나 근래 근본적인 재고가 이뤄지는 편이고, 독일에서는 예전부터 정상인이나 거의 같게 취급합니다[하도 술을 많이 마시니 봐 줄 수가 없음]) 등에 대해 법이 책임 감경을 지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몇 해 전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장애인이 어린 아이를 창 밖으로 던져 숨진 사고가 일어났고, 바로 며칠 전 맹견이 어느 한식당 대표를 물어 사망케 한 끔찍한 일도 있어서 더욱 실감이 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목청을 높이고, 자신의 과오를 합리화하기 위해 또 엉터리 구실을 지어내는 인간도 이와 같다고나 할까요? 여튼, 어떤 경우에도, 개한테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오히려 인간의 품위를 훼손하는 겁니다. 선반 위에서 무거운 다리미 등이 떨어져 발을 다쳤다고 치고, 그 다리미를 마구 때리거나 부품 해체 하는 식으로 "벌"을 내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습니까? 다만 그 도구가 꽤 보기 싫다거나, 재발 방지를 위해 보관 장소를 바꾸거나 아예 갖다 버리거나 할 뿐입니다. 개도 마찬가지죠. 법에 의해 물건처럼 처분(도살 등)될 뿐이지만, 정말로 "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런 분들은 진짜 개한테 마음이 있고 선악을 분별할 능력이 있다고 믿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뭐 누가 알겠습니까? 사정이 진짜 그럴 수도 있고, 이 책의 흥미로운 탐구 방향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진짜 압권은 물론 우리 "인간 마음"에 대한 분석입니다. 저자는 행위자(agent)와 수동자(patient. 이 단어를 이런 용법으로 쓰는 게 혹 독자에게 낯설까봐, 책에서는 우리의 당혹을 다 이해한다는 듯 친절한 설명부터 베풀고 시작합니다. 참으로 공감 능력이 뛰어난 저자들!ㅋ)로 대별하고, 다시 이를 선과 악 두 상황으로 나눠 2x2 매트릭스 프레임으로 논의를 전개합니다. 결론만 말씀 드리면, 우리 인간의 마음은 일단 타인(그러니 분명 사람입니다)을 평가할 때, 이 네 가지 범주 안에 일단 편입시킨 후, 경우에 따라 대단히 부당한 평가도 내리곤 한다는 겁니다. 히틀러 같은 악의 행위자를 무작정 단죄(심지어 그가 아주 어린 시절 한 일이라든가, 극히 드물겠지만 부분적 선행을 했다고 쳐도)하는 건 뭐 그러려니 합니다만, 테레사 수녀 같은 "영웅"에게도 우리는 그녀의 고통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해진 채, 부당하게 의무와 과업을 지우려 듭니다. 이게 너무나 재밌다는 겁니다. 긍정/부정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이런 타입에 대해 감정의 투사를 안 하려 든다는 거죠. 이를 두고 우리의 마음은 "행위능력은 상당하지만 경험 능력은 없다고 판단한다"는 게 저자의 관점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기제가 무엇인지, 또 지각 대상에 따라 각각 어떤 다른 기제가 발동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입니다. 이 용어들은 타 분야 용례와 매우 다른 성격이므로 주의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특히 "행위능력"은 법학에서의 쓰임새와 전적으로 무관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 유명한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의 말을 인용하는군요.

p134에 보면 환각사지통증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걸 두고 전에는 "유령 감각(원어의 직역에 가깝습니다)"이라고 했으나, 요즘 번역서에는 이처럼 더 기술적 정확성을 기한 번역어가 쓰이더군요. 이미 사지(의 일부)가 잘려 나갔는데도, 왜 어떤 이들은 여전히 그 부위에 대한 아픔을 호소할까? 심리학과 의학이 만나는 기묘한 지점이자 연구 과제이며, 이 책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제법 구체적인 해명을 실고 있기도 합니다. 플라시보 효과, 노시보 효과 등은 그저 무해하거나 우스운 착각이 아니라, 이런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고통 경감의 수단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최후 통첩 게임은 경제학에서도 다루는 이슈인데, 확실히 근년에는 심리학과의 콜라보가 밀도 높게 이뤄지는 경향이죠. 본디 경제학이란 게 "개인의 합리적인, 또 가장 효용(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이 높아지는 선택"을 탐구하는 데서 시작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논리적 귀결입니다. 이 말이 왜 나오나 했는데, 저자는 "마음의 부정성 편향"을 논증하며, 왜 우리가 어린아이, 오래 사용한 낡은 기계가 내 뜻대로 말을 안 들을(?) 때 더 마음씀을 강화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학문상 난제를 이처럼 일상의 쉬운 예와 결합해서 풀어 주는 게 이런 대중서의 과제이긴 합니다만, 이런 저자의 놀라운 언변과 연상 능력을 보며 그 자체가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기계(꼭 컴퓨터가 아니라도 됩니다)"의 마음이 무엇인지 무의식적으로나마 헤아리는 우리 자신(바보스럽죠)을 메타인지하게 됩니다. 적절한 예시의 항연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기억은 하는 "다마고치" 열풍이 또 빠질 수 없습니다.

몇 달 전 <기억이 사라지는 시대>라는 책(이 책은 "기억의 외주화"라는 개념을 씁니다)을 읽고 리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만, 이 책에서는 정통 심리학의 성과와 개념을 통해, 날이 갈수록 심화하는 기억의 미디어 의존 현상을 두고 "교류적 기억(transaction memory)" 같은 확립된 범주화를 더 빈도 높게 시도합니다. 그저 내 머리에만 기대는 게 아니라, 두뇌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른 매체에 연상의 끈만 걸쳐 놓고,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할 때는 더듬어 찾아들어간다는 겁니다. 당연, 인터넷이나 웹이 생기기 전에도 인간은 이런 방법을 썼으며, 부부라든가 친밀한 관계에 놓인 "사람"에게도 이처럼 기억의 편린을 위탁합니다. "당신 말야. 그 ..... 뭐였더라?" "아 .... 말이지?" "맞아!" 아주 사이가 나쁜 실패한 부부 아니라면야 일상적으로 보는 풍경이죠. 친구 사이의 추억 공유도 이와 같기에 우리는 그 "기억"을 분담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를 본 친구를 자주 불러내어 감정적 협업을 이루는 겁니다. 혼자 추억에 잠기는 것과 효용이 차이날 뿐 아니라, 기억 자체가 나눠져 있기에 혼자서는 감흥에 온전히 젖을 수도 없죠.

선전이나 세뇌 과정에서 적으로 삼아야 할 인간을 객체화, 대상화할 때, 우선 "이 자는 감정이 없다. 자비심이나 동정 따위가 없고 우리와 공유하는 바가 전혀 없는 동물과도 같은 존재다" 같은 왜곡된 관점을 주입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래야 적에게 사정 없는 공감 결여(그러니, 반대로, 공감 결핍이란, 그런 왜곡을 하거나, 그런 거짓 선전을 듣고 잘못된 판단을 한 이의 특징이죠)의 공격을 퍼부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꼭 누가 시켜서 그러는 것만도 아닙니다. 남을 공격하고 싶을 때 딱히 근거가 없으면, 자신의 동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멍청한 인간들도 워밍업이나 하듯 습관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르기도 하죠. 대체로 아주 유치한 자충수에 가깝기 때문에 악행과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만. (생각없는 동물도 여튼 살처분은 당합니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튜링 테스트, 고대인들이 일찍부터 발견해 낸 "마음, 아니무스", 전두엽 절제술 등 대중서에서 자주 접한 "마음의 전통적인 토픽"들을 다시, 다만 저자의 개성적이고 신선한 관점으로 재핵석된 채로, 만나게 됩니다. "마음"은 꼭 깨어 있고 명징한 의식하고만 연결되는 걸까요? 저자는 수면 중의 마음(?), 뉴런이 어느 정도 활발히 작동하는지는 서술하며 "마음"의 알쏭달쏭한 실체에 한 걸음 더 파고들어갑니다. p222에서도 다른 책들에서 종종 접하던 "최소 의식 상태" 등이 낀 스펙트럼 도식화가 보이는데, 아는 내용이라고 해도 저자의 설명이 워낙 유려하여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자폐아에 대해 우리가 그처럼 관심(물론 저자, 혹은 독자로서 인식적 관심이지 동정이나 공감은 아니겠습니다만....)을 쏟는 이유는, 이 환자, 수동자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함으로써 역으로 우리 자신의 의식, 마음에 대해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첵 원제가 "마인드 클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진짜 "클럽" 이야기가 나와줘야겠는데, 이 책 7장에서는 개인 단위가 아닌 집단 레벨에서 어떤 다른 차원의 인식(혹은 왜곡)이 이뤄지는지, 혹은 개인의 능력을 떠나 다소는 신비의 영역에 접근하며 어떤 깨달음에도 이르게 되는지(상당수는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나, 저자의 관심은 타당성 여부가 아니라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규명 쪽입니다)에 대해 흥미진진한 논의가 펼쳐집니다. 마녀사냥, 음모론 등은 아주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조금만 신경을 집중하면 오류라는 걸 금세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에 가담하여 갖가지 광기를 연출하는데, 이런 사람들도 사석에서 만나서 말을 하면 "자신이 가담 안 한 음모론, 집단 광기"에 대해서는 태연히 비판을 한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대개는 참된 자존감이 크게 떨어지는 미숙한 인격이라, 집단 심리에 휘둘려 순간 자신의 에고가 크게 확장되는 양 착각을 하곤 그 맛을 못 잊어 어리석은 충동에 자꾸 빠지는 거죠. 저자는 "링겔만 효과" 등 다양한 개념화를 통해, 집단 속에 빠짐으로서 자신 개인의 (못나고 초라한) 마음을 잃고, 대신 난폭하면서도 거대한 "집단의 마음"을 거짓 이식하는 어리석음을 신랄히 분석합니다.

"신 헬멧은 가장 심오하고 가장 강렬한 종교적 경험이 어쩌면 뉴런의 과잉 자극에서 비롯한 것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여기서 신 헬멧이란 마이클 퍼싱어라는 과학자가 고안한 장치로서, 종교적 법열이라는 게 일개 전기적 자극의 유도 결과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뒷받침합니다(종교를 전혀 안 믿는 이에게도 전기적 조작을 통해 비슷한 환희를 느끼게 할 수 있음). 이 역시 내심으로는(속"마음"으로는?), 우리 모두가 다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꼭 종교가 아니라도 궁극의 경지 비슷한 게 있다고 기대를 걸어 온 이들에게는 참 맥빠지는 결론이지만 말입니다. 신의 마음이란 결국, 마음에의 침잠을 통해 유한성을 극복하려 발버둥친 우리 불쌍한 인간들의 간절한 희구를 가상으로 투영한 개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죠.

"우리가 지금까지 다룬 모든 마음 중에, 신에 대한 물음은 아마도 가장 논란의 소지가 클 것이다.... (중략).... 그러나 결국은 두번째로 흥미로운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마음만큼 흥미로운 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연결다리로 삼고 저자는 마지막 10장에서 "인간 자신의 마음"을 웅대하게 정리합니다. 사후 정당화, 실행 의도, 의무 장치, 몰입 등 역시 전통적인 심리학 개념, 장치 등을 통해, 저자는 이처럼 심오한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가 가진 건 지각뿐이다. (부처님의 말처럼) 사물은 그 보이는 것과 같지도 않고, 또 다르지도 않다."

심리학이 의심의 여지 없는 전통 과학의 본령이면서, 또 왜 우리에게 그토록 유용한 도구인기도 한지 잘 확인시켜 주는 멋진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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