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들의 지혜 - 현대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허해구.진실연구회 지음 / 지식공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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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명은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족의 진보와 발전이 안겨다 준 "빛" 못지 않게, 뒤따라 드리워진 그림자 역시 짙고 깁니다. 故 마이클 크라이튼은 자신의 어느 장편 속에서 캐릭터 이언 말콤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 식기 세척기, 세탁기 등 가전 제품은 물론 주부의 노동과 수고를 덜어 주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 인간의 삶이 질적으로 나아진 바가 무엇인가?" 2500년 전 노자, 장자 등이 만약 되살아나기라도 해서, 현대인들이 어머니 대지에 자행하는 작태를 보면 과연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저자는 말합니다. "(전략)... 인류도 하나이고 지구도 하나이고 우주도 하나이기 때문에, 진리도 사후세계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 (중략) 그러므로 기독교와 불교도, 동양철학과 서양철학도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법과 도덕, 진리와 인간의 길도 결국 하나로 통한다.(후략)" 옳으신 말씀이긴 합니다. 다만 그 길이 아직 우리 인류에게 명확히 제시가 안 되어서 아쉬울 뿐이지만요.

"현대문명의 한계를 극복할"이란 보조 제목이 함께 붙은 이 책 <성자들의 지혜>는 일단 장정이 참 예쁩니다^^ 저는 책 덕후라서 일단 외관이 기품 있고 멋진 책들, 두꺼운 책을 참 좋아라 하는데, 이 책은 일생긴 모습이 그 조건들을 모두 갖춰서 너무 좋았습니다^^ 지금도 혹시 가운데가 벌어지지 않게, 조심조심해 가며 한 장 한 장 넘기고 특유의 책 향기도 맡는 중이죠.

이 책 제목에 표기된 "성자"는,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소크라테스 등 인류 역사와 문명에 지대한 기여를 남긴, 말 그대로 만인의 모범이 될 만한 분들입니다. 책 표지에 적힌 대로, 결국 하나의 진리를 말했으나 어리석은 후대인들이 여러 갈래로 오해, 왜곡하고, 심지어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싸우기까지 하는 우(愚)를 범했을 뿐이죠. 저자는 이런 소중한 가르침을 다양한 불경 등 권위 있는 텍스트에서 인용하여, 저자의 심원한 식견으로 한 줄기로 섞은 후 우리 독자에게 준엄히 가르칩니다. 읽어 보면 다 지당한 가르침들입니다^^

p94에 보면 마이클 샐던의 책으로부터 그 유명한 예화를 인용하십니다. 선로 위에 놓인 1명의 목숨과 5명의 목숨 중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이야기인데, 사실 이는 샐던이 처음 고안한 것도 아니고 독일어로 Pflichtenkonflikt라고 하는, 대학 강단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논쟁적 이슈로 다뤄지던 과제였습니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주제로 자세한 논증을 한 적이 있죠. 저자께서는 어차피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협소한 상대론적 관점에서 인위적으로 비틀어 유사 딜레마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지적하시는데, 바로 그 앞 대목의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었으나 이런 이슈들이 다분히 말을 위한 말로 상술처럼 가공된다는 진단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이 책 전체를 꿰는 저자의 주장은 "자기 입장에서 이거다 저거다 현상과 과제를 왜곡하지 말고, 만물의 진리는 오로지 하나일 뿐이라는 관점에 동의한 후, 모두가 마음을 열고 화합하여 궁극의 진리에 순응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씀이나, 인류의 지난 역사라는 것도 지성이 뛰어난 개인이 돌출하듯 이색적인 주장을 방대한 체계로 펴 나가면, 기존의 체계와 충돌을 빚게 되고, 입장들이 치열한 논쟁을 주고받으며 어느새 집단 지성에 의해 발전적으로 융화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모두가 순응, 승복해야 할 단일 체계의 진리란 게 어느 시대에나 강조되었으나, 역시 인간의 제한된 지혜에서 빚어졌을 뿐이니 그 효용이란 제한될 범위에서 발휘될 수밖에 없었죠. 발전과 모색을 위한 불협화음이란, 그래서 혹여 그 과정에 교란, 불화가 빚어지더라도,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도 등한히한 채 시간을 낭비"하는 작태 역시, 그 사람 입장에서야 보람 있고 좋은 일에 열심을 바치는 중이겠으나, 객관적으로 보면 자신도 망치고 자신 주변의 사회관계망 모두에 폐를 끼치는 헛수고일 뿐이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제가 흥미롭게 본 건, 공동체 도처에서 빚어지는 갈등, 이익 충돌, 밥그릇 싸움 역시 대승적 관점에서 하나의 정의를 직시하면 결코 빚어지지 않으리라는 저자의 관점이, 이 사이비 종교 현상을 비판할 때에도 적용된다는 겁니다. 결론은 차이가 없는데, 그 논거 구성 면에서 저자만의 고유성이 드러납니다. 사이비 종교 믿는 사람들이 꼭 되묻는 게 이렇죠. "우리 OO교가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남한테 피해 안 끼치고 도덕적으로 살려고 애씁니다." 이런 질문에 대개는 아무 대답도 안 하고 무시하지만(시간과 정력의 낭비), 엄밀히 말해 우리한테 그럴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단죄하고 무시하려면 그럴 만한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하죠. 제가 주목한 건, 저자가 구태여 그런 이슈에 대해서까지 논거를 마련하려 애쓴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사실 서양철학(중에서도 대륙의 합리론)의 본질적 방법론과도 통합니다. 이 책에도 여러 번 원용되는 칸트의 저서를 읽으면서도, 평범한 이들 생각에는 "대체 그런 문제를 왜 해명해야 하며, 이처럼이나 번거로운 과제를 파고들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같은 회의가 떠날 새가 없습니다. 허나 이런 문제를 짐짓 경시하는 듯 젠체하는 소양 없는 무자격자들도, 어디서 본격 인문 주제가 논쟁의 핵심으로 대두하면 그제서야 인식론, 해석학의 기초 개념을 (벼락치기로 베껴 온 후) 뜻도 모르면서 급조한 수다 속에 허세를 떠느라 정신 없습니다.

저자께서 주장하시는 만물일통의 세계관에서는, 저 사이비 종교에 미혹되어 인생을 망치는 어리석은 무리들이나, 진리의 일면만 보고서는 망령되이 편린적 진실을 전부인 양 우기는 무자격자들이나 결국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뜻입니다. 똑 같은 사이비 신도가 다른 사이비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니 이보다 더한 촌극이 없죠.

저자의 탁견은 특히 Part3에서, 어떻게 하여 담백하고 질박한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이, 번잡한 말과 말 속에서 본지가 타락하고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현학 공론의 장으로 변했는지 설명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특히, 사도 바울 이후 기독교는 선행의 실천을 강조한 예수의 순정한 초기 지침을 잊은 채 유대교처럼 인격신을 전면에 내세우며 형식적 교리가 득세함으로써, 정작 예수의 가르침과 멀어졌다는 통박은, 현재 기독교 교단의 정통파 신앙과는 까마득한 거리를 두겠으나 중립적 독자 입장에서는 경청할 가치가 충분했습니다.

또한, 석가모니 이래 여러 제자나 권위자들의 입장을 거치며, 부처님의 "원음"이 무수한 왜곡과 가필을 거친 채 이제는 무엇이 본지였는지도 혼란에 휩싸일 뿐이라는 저자의 지적 역시 강력한 설득력을 지닙니다. 이 저자의 논지와는 별개로, 아소카 왕 이래 확립된 엘리트 불교에서 어떻게 대승과 유식론이 갈라져 나왔는지, 또 이후 이 입장들이 어떻게 힌두교 측과 발전적 논쟁을 거치며 영향을 주고받았는지의 서술이 참으로 명쾌합니다.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든 않든, 이 대목은 보편적 교양 습득을 위해서도 한번 읽어 볼 만합니다.

부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 모두, 사회가 폭력과 범죄에 물들어 극한 타락의 길을 걸었을 때 출현한 성자들(저자의 관점)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오탁악세"라고 하는데, 이런 성인들이 나타나 인류가 자멸과 종말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지 않게 심오한 가르침을 베풀었듯,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테러와 증오의 악순환이 뭇 백성의 작은 안위도 차마 담보하지 못할 판이며, 이 판에 일부 불순분자들은 폭력을 부추기고 엉뚱한 반사회적 사고를 공유하며 한심한 제 처지를 합리화하기에 바쁩니다. 이런 난세를 두고 오히려 저자는 "그나마 이 세상이 아직 법계의 자격을 유지한다는 증거이다. 도덕의 문란과 위법의 수위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응보인 혼란상이 빚어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문제 아니겠는가?" 같은 주장을 합니다. 명시적인 언급은 없으나, 이런 오탁악세에 다시 한 번 성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어 위대한 가르침으로 누리를 씻어낼 기대도 어느 정도 함축하는 논리입니다.

저자는 모 추기경이 선도한 "내탓이오" 운동 역시, 악행을 저지르고 온갖 탐욕과 비리를 앞장서 부추긴 세력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나 결과면에서 다를 바 없다고도 합니다. 말하자면 권선징악, 신상필벌을 내세움이신데, 역시 해당 문단을 읽는 독자 개인이 알아서 잘 새길 일이겠습니다. 같은 대목에서 정치인들이 한데 모여 구국기도나 법회를 열었던 행태도 신랄히 비판하시는데, 행실은 따르지 않으면서 입으로 무슨 기도나 염불을 읊은들, 원인 없이 결과가 하늘에서 떨어지길 비는 꼴이라며, 연못에 던진 돌멩이가 느닷 수면 위로 떠오르길 바람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시네요.

저자는 후반부에서 플라톤의 철인 정치론을 소개하며, 작금의 한국은 계층과 직역 불문하고 각자의 분수를 알며 현실의 의무에 충실하자는 자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으로 결국 쇠망하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반대로 각자가 생업에 충실하며 헛된 망언으로 정신을 더립히지 않고 정직과 진실에 힘쓴다면, 팔천만 인구로도 세계를 이끌 으뜸 민족이 될 수 있다고도 하시네요. 정부가 개입해서 불완전한 시장의 작동 원리를 가다듬어야 한다는 케인지언 스탠스와, 그 대척에 서서 완전한 자유방임만이 일체의 비효율을 제거한다는 시카고 학파의 주장까지 소개하는 등, 저자의 시야가 참으로 넓고 보편의 상식에 부합하는 청론(淸論)이라서 쉽게 잘 읽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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