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를 읽다 - 빈센트 반 고흐 편지 선집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기고 엮음 / 레드박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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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나 수필이 불특정 다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과 달리, 편지나 서간 문학은 일단(원칙적으로) 분명한 청자를 염두에 두고, 비공개로 쓰여진 글입니다. 서간 문학 중에는 가상의 수신인을 설정하고 쓰여진 것도 있으나, 여튼 상대를 향한 절절한 마음이나 진정어린 정서는 물씬 배어나게 마련입니다. 이런 편지에서는 글쓴이의 성향이나 개성뿐 아니라, 이 편지를 받는(받았던) 사람은 누구였기에 이토록 유려하고 아름다운 고백, 소통의 대상이 되었을까, 혹은 준열한 분노와 항의가 향해졌을까 같은, 추측과 상상과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예술가들은 대개 작품으로 말을 하기에, 비(非)언어 예술 창작에 종사했던 이들이 남긴 글을 엿보는 건 특히나 흥미롭습니다. 그 중에서도, 반 고흐(판 호흐)처럼 기행(奇行)과 극단적 선택으로 일관한 천재의 삶은, 과연 그가 "발병"하지 않은 차분한 일상과 평정한 정신을 유지할 때는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해 유력한 단서를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고흐처럼 치열한 내면의 갈등을 겪었고, 피곤할 만큼 사색에 몰두한 정신적 편력가였으며, 지나칠 만큼 영혼의 순결을 추구한 인물이 능숙한 문장가이기까지 했다면, 또 서신을 받은 상대방들이 대개 그가 각별한 애정을 품은 인물들이었다면, 그가 남긴 이런 기록들이 더욱 궁금해질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우 오히려 일기보다 바른 말을 하는 게 편지들입니다.

고흐는 생전에 워낙 방대한 양의 편지를 썼고 그 중 상당수가 운 좋게도 오늘날까지 전해지기에, 우리는 그의 작품에 매혹됨과 동시에 그 작가적 배경까지를 마음 놓고 캐어 보는 멋진(한편으론 가슴 아픈)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신 미학자 신성림 선생이 선별하여 번역한(선별, 엄선이라고는 하나 여전히 내용이 방대한) 이 책은, 그의 작품과 인생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전문가의 접근, 옮김이라는 이유에서 우리 됵자들에게 신뢰를 줍니다.

고흐는 작품의 완결성, 완벽을 추구할 때에도 다소 광적인 집착을 보였지만, 이 편지를 통해 훔쳐 볼 수 있는 그의 내면은 "도덕, 신적인 영성,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동참, 친지와 이웃에 대한 관계의 유지, 회복, 발전" 등 모든 면에서, 역시 사소한 흠결도 용납하지 않으려 드는 그의 (미친 듯한)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예술가들 중 상당수가 속세의 인연, 관계, 사회적 접촉은 등한히하고, 더 나아가 더러운 무엇을 보는 듯한 초연함을 유지하는 태도와는 매우 차별된다고 하겠습니다. 흔히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일체의 속됨, 참여 등을 가차없이 경멸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그는 삶과 도덕과 예술과 인간이 혼연일체가 된 경지를 추구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전성기와 평판과 인정을 다 손에 넣었던 장프랑수아 밀레에 대해, 그는 이 사실주의 화가의 작품(속 피사체)에서 오히려 "고결한 영혼, 내면의 아름다움"에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pp. 52~53). 밀레 역시 가난한 농민들의 삶에서 신과 종교와 내면의 궁극적 완성태를 포착하려 애썼으며, 고흐가 이런 대선배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겠습니다. 아름다운 외모 뒤에 숨은 추악함, 이기심, 탐욕이야말로 인간을 신에게서 가장 멀어지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인식(혹은 강박)은, 거의 일생을 두고 연인을 곁에 두었을망정 여색은 멀리한 그의 기묘한 행적을 잘 설명해 줍니다.

"많은 슬픔을 겪었으나, 그런 경험을 통해 영혼을 얻게 된 여인이 내 곁에 있다면 그게 행복이겠습니다."

이런 말은 그 역시도 고난과 갈등으로 가득한 생을 살았기에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말이겠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가당치도 않은 이기심, 미숙함, 턱도 없는 자기중심성으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소외되고 마음에 바람 잘 날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번뇌를 겪으면 겪을수록 외모가 망가지고, 진정한 평화의 해안선으로부터 몇 걸음씩 더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케이 보스 스트리커는 고흐보다 몇 살이 많았습니다. 그는 이 케이를 마음 깊이 연모하여 청혼하기에 이르지만, 그녀의 대답은 "절대 안 돼요."였죠. 이는 꼭 불안정한 고흐의 처지 외에도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해서 나온 태도, 답변이었겠으나(뭔지는 책을 직접 읽어 보시면 알 것입니다), 여튼 고흐는 역시 그답게 "절대란 말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그 반대라면 무슨 마음이었겠는가?" 같은 말에서 드러나듯, 속되고 평범한 인간의 피상적인 잇속을 직시하기보다, 자기 식대로 고결한 의미를 찾으려 애씁니다. 우리는 물론 코넬리어가 어떤 사람됨이었는지 충분히 알지도 못하며, 혹여 그녀 역시 목사의 딸이었기에, 우리가 지레짐작하듯 속물 근성의 반응 외에 다른, 더 속 깊은 동기가 있었는지야 또 모를 일입니다. 허나 당사자 입장을 떠나, 객관적 3자 눈에 빤히 보이는 상황을 유독 고흐만 다른 맥락에서 애써 의미를 부여하려 드니 그게 안타깝다는 거죠. 예술혼이란 이처럼 현실 감각과는 숙명적으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음인지.

자신을 한사코 거절하는 여인에 대해, 단념하고 다른 가능성을 알아보라고 강권하는 권고가 쏟아지는 건 너무도 당연하죠. 그러나 고흐는 이런 표현으로 자신의 변함 없는 해바라기에 근거를 부여합니다. "모든 얼음은 녹게 마련이다. 대체 누가 그들에게, 여인의 차가운 얼음장이 결코 녹지 않는다는 괴이한 자연과학 원리를 가르쳤다는 말인가?" 고흐 본인이야 비통하고 절망적인 마음에서 이런 표현을 썼겠으나, 후대의 우리들이 보기엔 그 표현의 기발함(사실은 그렇지 않고, 당대 문어투의 양식 중 하나였을 겁니다. 아마도)에 놀라고, 그 중에서 일종의 위트까지 느끼는 게 보통이지 않을까요.

동생에게 이처럼 거의 매년 생일마다 다정한 편지를 보내 축하하고, 동생이 번잡한 세상사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순수함과 초심을 잃지 않기를 기원하는 모습은, 예술가이기 전 형으로서 따뜻한 우애를 간직한 그의 인간미를 증명합니다. 형으로서 그는, 그들 형제가 공유한 과거의 추억을 언제나 잊지 말자고 거듭 동생에게 상기하는데, 존재의 가치는 그가 거쳐 온 시간 속에서 확인이 됩니다. 일관성, 혹은 성실성(integrity)란, 결국 기억의 구속이 아니라면 의의를 잃습니다.

p268에 나오는 "가장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을 그릴 것이다"에서, 소박, 평범은 고흐 본인식으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말들입니다. 이는 책 저 앞 p82 마지막 줄에서도 다시 확인됩니다.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자신이 특별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야 그 같은 천재라 해서 다를 게 없죠. 그럼에도 그는, ".... 나 자신이 앞으로 비범하게 될 것이라며 그녀의 마음을 사려 하지 않는다.... 내가 추구하는 건 어디까지나 고결한 평범이다.... " 같은 말에서, 일시적 만족과 애욕의 추구를 위해 내면의 미덕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분명히 표현합니다. 이런 태도가. 예술에서건 실제 생활에서건, 혹은 그 나름의 사회 참여 속에서건, 그를 검소하고 겸손하며 도덕적으로 이끈 빛나는 철학과 각성임에도 틀림 없습니다.

돈 맥린(매클린으로 어르신들이 알고 있는)이 부른 그 유명한 노래 속에서도 알 수 있듯, 빈센트 반 고흐가 추구한 건 언제나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었습니다. 별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빛나고, 닿을 수 없을 만큼 아득하나 신비하게도 그 먼 거리에서 우리 눈에 보일 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우리가 두 발을 디딘 땅은, 크지도 못하고 남의 광선을 되받아 간신히 존재를 알릴 뿐이지만, 그 척박한 땅은 우리가 간신히 살아갈 만큼 아름답게 가꿔졌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언제나 별을 꿈꾸고 바랄 수 있을 만큼의 존재 기반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고흐에게 시공을 초월한 무한 공감을 보낼 수 있는 건, 우리 존재의 안타까운 열망을 그만큼 잘 표현하고 깊이 아파한 예술가가 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책의 앞부분에는 고흐가 남긴 대표작 여럿이 컬러도판으로 실려 있습니다. 아주 낡고 초라한 구두 한 켤레를 담은 유명한 그의 작품이 눈길을 끕니다.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중고품인데도 너무 광이 난다는 이유로, 일부러 때를 태우고 먼지로 더럽힐 만큼 신고 다닌 후에야 작품에 담았다는 그. 한 켤레는 자신을, 다른 한 켤레는 동생 테오를 상징하게 할 만큼 깊은 우애를 나눈 동생에게 보낸 편지, 혹은 그와 일생을 두고 갈등 관계에 놓였던 부친에게 보낸 서간문은, 그림이 아니라 "글로 읽고", 만나며 소통하는 고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 독자에게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갖게 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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