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막의 게르니카
하라다 마하 지음, 김완 옮김 / 인디페이퍼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암막의 게르니카"라고 하니 무슨 뜻일까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있겠는데요. "검은 장막을 둘러친(~이 드리워진) (피카소의) 게르니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게르니카는 작품 이름일 뿐 아니라, 해당 작품의 창작 모티프가 된 (나치 독일에 의해 민간인 살상이 벌어졌던) 바스크의 지방 이름이기도 합니다. 일본어 "の"는 종종 너무 광범위한 뜻을 담기도 하죠.

이 소설은 상당 부분이 실화에 근거를 두었으며, 실존 인물의 이름들이 그대로 나오는 등 "팩션(요즘은 트렌드가 지나가서인지 이 말을 잘 안 쓰더군요)"의 성격도 짙게 풍깁니다. 물론 소설의 뼈대가 된 줄거리, 즉 이미 40여년 전에 스페인으로 돌아간 해당 대작(大作)이, 대서양을 건너 뉴욕 MoMA로 다시 전시차 여행을 떠나며, 무사히 특전이 성사되기까지, 해당 기획을 추진한 큐레이터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된다거나 하는 기묘한 곡절이 다 개입했다는 등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입니다. 소설 중에도 여러 번 강조되듯, 이 예술 작품이 워낙 큰 규모를 가진 터라 웬만해서는 거동이 어렵죠. 일본에서는 구미에 비해 고급 문화 창작, 향유의 주변부라는 컴플렉스가 널리 자리해서인지, 문예나 영상물 속에 이런 마스터피스들의 전시회 성사를 어렵사리 이뤄낸다는 동기가 여럿 등장하는 편입니다. 단, 이 작품은 주인공 여성이 일본인일 뿐 배경은 미국이고, 일본스러운 피처를 작중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제에 대해선 선명하게 "반전(反戰), 평화, 정의로운 시민들의 연대, 휴머니즘"임을 명확히합니다만, 그 평화의 "적(敵)들"로 규정된 무리라면 나치 독일, 프랑코 원수 추종세력, 파시스트 이탈리아, 호전적인 미국 매파 진영, 바스크 분리주의자 등이 거론될 뿐 지난시절의 "제국주의 일본"은 빠져 있습니다. 물론 작가님의 주제의식 그 순수성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겠고요. 구태여 언급 않아도 수치스러운 과거사에 대해서는 당연한 반성이 전제되었다는 쪽으로 독자는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일본풍의 서술, 소재가 거의 발견 안 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 장편이 더욱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향함도 확인 가능하죠.

소설은 각 장(章)이 두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오가며 교차하는 식의 편제입니다. 우선 1930년대, 파리에 거주하며 미술 트렌드의 첨단을 소화하고, 타고난 재능 덕을 입어 이를 자신만의 표현양식으로 경이롭게 소화하는 한 천재,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라기보단 이미 명성을 확고히 굳혀 가는 신성으로 군림하던 시절의 그를 다루는 과거가 펼쳐집니다. 이어, 2000년대 초반, 요코 야가미라는 젊고 유능한 MoMA의 기획자와 그를 둘러싼 여러 인물(하나같이 높은 신분, 탄탄한 사회적 지위를 갖춘 이)들의 사연이 소개되죠. 이런 juxtaposition의 의도라면, 시대적- 공간적 배경은 달라도, 평화와 반(反)폭력, 연대(solidarity)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영혼들의 결단과 행동, 그 숭고한 노력의 결실이란, 반 세기라는 간격을 두고서도 그 평가에 차이를 둘 바 없이 소중하다는 쪽이겠습니다. 그렇다고, 파블로 피카소와 요코 야가미를 놓고, 서로 미러링하는 관계로까지 볼 건 아닌 것 같고요. 파블로 피카소에 대해서는 작중에서도 도라 마르의 입을 빌려 "창조주"로까지 극구 칭송되지만, 요코는 비록 선한 마음을 지닌, 똑똑한 유명인사일망정 그 정도의 신적 재능을 부여받은 이는 아니니까요.

각 장에 교차하는 두 별개 흐름의 이야기들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스페인 유수의 공작 가문 출신인 파르도 이그나시오는, 1930년대 후반 파리에서는 갓 실연(연인을 조국에게 빼앗겼습니다)한, 유약하고 소심한 청년으로, 열렬히 이 예술의 "신"을 숭배하고, 도라 마르에 대해서는 누나를 향한 애틋한 우애를 간직하는 모습으로 세팅됩니다(단, 나중에는 <게르니카>의 반출, 소장을 위해 미국 측 거물들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특유의 교섭력을 발휘하는 등 귀족 가문 핏줄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 주죠). 이랬던 그가, 배경을 바꾸어 2000년대 서유럽에서는 "자국 총리를 시종처럼 졸졸 따르게 만드는" 위엄과 관록 넘치는 실력자의 중후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두 세계를 넘나들며(물론, 이 두 세계는 시간적으로 연속된 구조고요) 숭고한 정신의 단절을 막으려는 듯 때로는 필사적으로, 때로는 초연하며 우아하게, 때로는 야속하게 처신하는 이 노귀족은 많은 독자들에게 주인공 못지 않은 흥미와 매력을 발산하는 듯합니다.

파블로 피카소는 물론 실제 역사에서의 모습 그대로, 변덕스럽고 색(여러 의미겠죠?)을 밝히며 격정적인 성품으로 우리에게 제시됩니다만, 단 소설 속의 모습은 이무렵 이미 50대를 넘어선 것치고는 다소 젊은 언동들입니다. (과거에서의)비중이 좀 적긴 하나 두 무대를 넘나드는 인물은 파르도 이그나시오 공작 말고도, 루스 록펠러 여사 한 분이 더 있긴 합니다. 이분은 젊어서 파르드와 끈끈한 유대를 쌓았고, 나이 들어서는 이 소설의 주인공 요코 상을 결정적인 순간마다 후원하고 평생의 커리어를 쌓게 돕는 은인이기도 합니다. 소설에서는 그녀의 아버지가 넬슨 록펠러(부통령까지 지낸)라고 나오는데, 이는 픽션 안에서의 가공이며, 루스 같은 딸을 둘 만큼 나이 든 인물이 아니죠. 실제 역사를 따지자면, UN의 태피스트리 포맷 복제품은 넬슨 록펠러의 부인 마그리타 여사의 소유였습니다. 소설과 현실의 차이가 어느 지점들에서 목격되는지 따져 보는 것도 이 장편을 읽는 재미 중 하나입니다.

소설의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메인 이벤트는 "게르니카의 탈취, 훼멸을 통해 독립의 대의를 전세계에 호소하려는 ETA의 테러리즘과, 연약한 여인 요코의 대결"이지만, 전반부에서는 특히 독자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화제가 "과연 누가 게르니카(태피스트리 모조품)에 암막을 씌웠나?'하는 것입니다. 미국 국무장관 파워가 대(對) 이라크 강경 조치를 UN에서 발표할 때, 거장의 평화주의를 불멸의 예술혼으로 표현한 대작 <게르니카>가 그 배경으로 우뚝 서 있다면 이런 난감한 모순이 또 없죠. 만일 정말 그 세팅으로 보도 사진이 찍히기라도 했다면 세계의 평론가들로부터 두고두고 풍자 대상으로 회자되었을 겁니다. 주인공 요코와 그녀의 후원자 루스 여사는 이에 크게 실망하여, UN 측에 경위 해명을 요구합니다. 이 사건은 콜린 파월(극중 캐릭터와 이름도 비슷하죠)의 발표 당시 실제로 있었던 해프닝입니다. 당시 드리워졌던 커튼은 실제로는 청색이었는데, 소설 속에서는 진남색이었다고 서술합니다. 물론 "암(暗)"은 진실을 가리려는 떳떳지 못한 흉계를 비판하려는 비유적 의미이지, 색채로서의 "블랙"을 가리키는 건 아니겠습니다.

소설 중에도 나오지만 MoMA와 경쟁 관계인 구겐하임 미술관 측이 스페인 바스크 지방 빌바오에다 분점을 연 건 사실이고 지금도 운영되고 있습니다(한국에서도 여길 다녀오신 분이 많죠). 또, 이 구겐하임 빌바오 분관 당국에서 "게르니카는 우리가 영구 소장할 자격이 있다"며 마드리드 측에 양도 요구를 한 사실도 있습니다. 하지만 ETA가 세계의 주목을 끌기 위해, 특히 그 극단주의자들이 어떤 흉계를 꾸몄다든가 한 적은 없죠(그 전에, 세계 어느 미술관 측에서도 "게르니카를 우리에게 임대해 주시오" 같은 대담한 발상을 하는 것 자체가 거의 무망한 일입니다). 좀처럼 상정하기 힘들지만, 루스 같은 재력가가 파르도 같은 실력자의 힘을 빌려, 요코 같은 당차고 정의로운 기획자의 의지를 실현시키지 말라는 법도 없기에, 가능성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드는 이런 사연의 전개가 더욱 독자의 주목을 끄는 듯합니다. 이는 또한 작가 상상의 전속적 특권이기도 하겠고요.

소설 중에는 어느 카탈루냐 인의 입을 빌려, "우리도 마드리드와 사이가 안 좋지만 바스크 사람들은 진짜...."라며 혀를 내두르는 대목이 나오는데, 현 시점에서는 (얼마 전에도 뉴스에 났듯) 카탈루냐 자치정부에서 시행하려던 주민 투표 행정 관리자들이 대거 체포되는 등 스페인 정국이 꽤나 심상찮게 돌아가는 판국입니다. 황해도 신천 사건이 전파를 타자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학살>을 발표한 일도 있는데(단, 이 작품은 그리 평가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 중에는 "고야의 귀환"이라는 구절도 나오는데, 이 사건 관련해서 다소 의미심장한 말이죠),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지역의 정세가, 험한 말이 오가며 일촉즉발의 긴장을 자아내는 판입니다. "평화"는 그 무엇보다, 우리 한국 독자들의 입장에서 가장 간절히 희구되어야 할 가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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