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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평점 :
지난주에
대만 여성 작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소설 <검은 강>을 읽고 리뷰를 썼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주에 읽은 이
책 <레티시아> 역시, 2011년에 프랑스, 나아가 유럽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어느 소녀의 실종, 사체 발견, 이후
드러난 연관 범죄 스캔들을 집중 취재, 분석한 논픽션입니다. 두 책은 1) 픽션과 논픽션, 2) 모두의 화제가 된 여성이 범죄의
가해자이냐 피해자냐 하는 점 3) 저자분의 성별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현대 사회의 후미진 구석에 드리워진 여전한 폭력, 학대,
비뚤어진 윤리관, 계급 간 갈등, 빈곤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이런 구조적 모순의 가장 손쉬운 희생양이 바로
"젊은 여성들"이란 안타까운 깨달음을 독자들에게 환기하는 점이 서로 닮아 있습니다.
故
레티시아 페레는 실종 신고가 접수되고 그 용의자가 검거될 무렵 겨우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가 직접 관심을 보이고, 국민들(프랑스뿐 아니라 인근 서유럽 여러 국가, , 혹은 동료 EU 회원국에 널리)에게 주의를
촉구하며, 나아가 (특히 용의자 토니 멜롱의 검거와 관련하여) 누범(상습범)에의 처벌, 선고, 관리를 태만히 했다며 법관의
"징계"를 언급하기도 해서 이 기간 중 대중 사이에서 큰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편
이때로부터 몇 달 후, 죽은 레티시아 쌍둥이 언니인 제시카 페레가, 그 양육가정의 가장인(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 양부 노릇을
했던) 질 파트롱 노인을 성 추행 혐의로 고소하고, 이듬해 파트롱이 징역형을 선고 받음으로써 큰 후폭풍을 빚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전 국민의 입방아에 오르고, 이른바 Marche Blanche 같은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기도 한 큰 사건이었지만, 저자는
혹 그 이면에 우리가 놓치고 미처 보지 못한 다른 면은 없었는지, 가해자를 타매하고 지탄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반성할
대목은 없었는지, 입체적이고 성숙한 시선으로 사건의 총체적 모습을 분석합니다.
저자는
중후한 연령대의, 근사하게 늙어가는 듯한 은발의 미남 교수님입니다. 책 중에도 언급이 되어 있듯, 그는 넉넉한 중산층 가문
출신이며 유대계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비록 방대한 분량의 엄정한 필치(적어도, 사건의 진상을 추적, 정리하거나, 당사자들의 신상
관련 부분을 요약할 때는)로 희대의 사건 그 의미를 탐구하지만, 그 외의 대목에서는 다분히 개인적인 감상을 투영하기도 하고,
비장한 소회라든가 제도에 대한 비판(사건의 본체와는 거리가 있는), 혹은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 책은
다분히 저자 개인의 세계관이 뚜렷이 반영된 체계이며, 동시에 프랑스 지성인들의 저작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소재의 인문,
형이상학 환원" 경향을 드러낸다 하겠습니다.
저자가
다분히 친밀감을 느끼는 이들은, 비슷한 또래의 전문가들입니다. 이에는 예심 판사, 검사장, 헌병대 준위(이분만은 좀 젊은
연령대인 듯), 변호사 등이 포함됩니다. 변호사라면 일단 제시카 페레 사건을 맡았던 세실 드 올리베이라가 이 책의 주요 인물인데,
저자는 이 여성을 대단히 능력 있고 자상하며 직업적 소명의식에 불타는 인물로 묘사합니다. 이 책이 저술되는 과정에 큰 기여를 한
분이기도 하죠. 프랑스 사법사상 재심 청구가 인용된 예는 극히 드문데, 그 중 한 건을 이분이 성사시켰다는 점에서, 법률적
소양과 적성도 대단하거니와 법정 밖에서 관계자들을 만나고 진실을 유도하는 인간적 매력이랄까 열정(외모는 그러나...)도 대단한 분
같습니다.
변호사 중 다른 한
사람은 장피에르 피카인데, 이분은 사르코지 대통령 임기 중 측근에서 자문을 맡기도 했던 실세이기도 했습니다. "(전) 대통령에
대해 그 어떤 불리한 증언도 사양하겠다"는 언질을 받고서야 인터뷰에 응한 그를 두고, 저자는 "요즘 같은 세상에 극히 보기 드문
충성심이란 미덕"이라고 평하는데, 사르코지에 대한 그의 감정이라든가 정치적 경향성을 감안하면 다분히 반어적인 코멘트로도 보입니다.
다만 그의 외모에 대해선 대단한 미남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데, 제가 보기엔 저자분이 훨씬 더 잘생긴 것 같습니다(나이는
저자분이 몇 살 더 아래라는 점도 고려는 해야 하지만요).
이분을
만난 이유는, "레티시아 살인 사건"의 한 당사자가 바로 사르코지 당시 대통령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당시
법률자문직이었던 피카 씨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할 필요). 그는 사건 초반부터 레티시아와 가해자에게 국민들이 시선을 주고
공분할 것을 촉구하고, 이 와중에 여러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기도했기에, 어찌 보면 이후의 곤경은 자신이 자초한 면도
있습니다(저자는 이를 두고 "범죄 포퓰리즘"이라고까지 규정합니다).
저자뿐
아니라 상당수의 진보 성향 프랑스 지식인들이 사르코지를 보는 태도는, 한국에서 좌파진영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대하는 스탠스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자는 이 두꺼운 책 중 한 챕터의 제목을 "파트롱과 사르코지의 축"이라고까지 달았는데,
"축(l'axe)"이란 말이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독일 나치의 동맹 이래 언제나 심각한 비난성의 정치적 함의만 담았다는 걸 생각하면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이 사건에서 사르코지가 잘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만. p287:1에 보면 <샤를리
엡도>가 사르코지의 이런 행태를 두고 먹잇감을 쫓는 독수리에 비유하여 풍자했다는 기술이 있는데, 물론 우리가 작년의 그
테러 때문에 잘 아는 그 잡지입니다. 그새 대통령이 두 번이나 바뀌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죠. 책 뒤에 보면
"Laetitia, c'est moi(레티시아, 그녀가 바로 나다)."라는 말도 있어요.
죽은
소녀 레티시아는 적어도 매력적이라고는 부를 수 있는 분위기였나 봅니다(꼭, 희생자에 대한 미화 예찬이나 기억 왜곡이 아니라).
그녀는 또래 아이들이 보통 그렇게 자기 인생을 기록하고 채워 나가듯 페이스북 활동에 열심이었는데, 여기뿐 아니라 상당수 다른
흔적에서도 맞춤법을 자주 틀립니다. 이 책 후반부 어느 챕터의 제목이기도 한 "tro kiffan"은, 사실은 "trop
kiffant"이라고 써야 정서법에 맞죠. 우리식으로는 "졸라 쩌는" 정도의 표현과 통할까요? 국어 공부는 게을리해서 맞춤법엔
약했을지 모르나, 소녀는 일탈 행동을 삼가고 직업 교육 과정에서 가르치는 기술을 열심히 습득하는 등, 꽤 성실한 마음가짐을 지녔던
듯합니다. 말이 그리 많지 않고, 신상에 대한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과거의 아픈 상처들 때문이죠), 장래에 대한 설계를
야무지게 챙기는 편이었다는 점에서, <검은 강>의 자전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저자는
레티시아가 위탁 가정을 전전해야 했던 이유를 파고드는 과정에서, 그 생부와 생모, 외삼촌, 친삼촌 등을 두루 만납니다. 생부는
대단히 폭력적이었고 그 과정에서 생모의 정신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기도 했지만, 여튼 딸에 대한 사랑은 깊었다(...)는
쪽으로 결론을 저자는 내립니다. 이에는 저자 특유의 사르코지에 대한 악감정도 다분히 개입한 게 아닌지 저는 판단합니다. 사르코지는
죽은 레티시아의 보호자였던 질 파드롱 노인에 대해 꽤 편을 들고 나섰는데, 그가 중후한 외모에다 자신의 정치적 가치를 대변하는
듯한, 그럴싸한 쇼맨십도 언론을 향해 선보였기 때문에, 그의 실체를 간과했던 거죠. 저자는 이를 두고 사르코지가 "소아성애자의
편을 들어 강간범과 맞서 싸운 셈"이라며 그를 신랄히 비꼽니다.
여튼
질 파드롱 노인은, 전적으로 악한 인간이 아니었을지는 모르나(그 부인은 문제가 크게 불거지기 전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듯합니다), 레티시아 쌍둥이 자매 이전에도 위탁 아동에 대해 성추행을 저지른 행적이 드러난 데다, 법정에서도 가증스럽게 "내
본분을 잊었다"며 오열하는 듯 과장된 행동을 보인 점에서, 전혀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유형이겠습니다. 이런 사람을 잠재적
동맹자(?)로 고른 사르코지도 경솔했고 말이죠.
한편
"살인범" 토니 메롱도 희한한 개성을 지닌 자인 건 마찬가지인데, 1) 우선 평소부터 성범죄자에 대한 극심한 증오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최소한 살인의 동기만큼은 성욕 충족이 아니었던 듯하고 2) 체포, 수사 과정이나 구금 기간 동안 내내 대통령 사르코지를
향해 정치적 성격이 가뜩 담긴 비난을 퍼부어 미디어를 대단히 즐겁게 해 줬다는 점도 기가 막힙니다(이 역시 사르코지 자신이 자초한
봉욕이겠습니다). 문제가 많은 최하층민 부모 밑에서 자라나, 올바른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에 방치되었다는 점을 고려는 해
줘야 온당한 평가이겠습니다. 저자는 예컨대 p191, p227 등에서, 여튼 성실한 노력으로 상위 계급에 소속되거나 그들에게
고용된 처지의 청소년을, 저 죽은 레티시아가 대변하고, 이들에 대한 반감으로 공격(여러 패턴이 있겠습니다)을 일삼는, 같은 하층민
청(소)년을 저 토니 메롱이 상징한다면서 일종의 사회학적 분석, 일반화(혹은 인문화?)를 시도합니다. 이 역시 우리가 깊이
곱씹어 봐야 할 대목입니다.
여담인데,
저자는 저들 하층민 부모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출산 직후 영아 유기를 두고 "일종의 사후 피임"이란 표현을 쓰는데, 이는 (그
재치있는 문장력은 별개로 치더라도) 좀 불건전한 인식의 반영이 아닌지 다소 걱정되었습니다. 영아 유기는 어느 나라나 범죄로
규정하여 처벌하는 악한 소행이고, "피임"은 "중절"과도 엄연히 구별되는, "여성의 권리"로 널리 옹호되는 선택일 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사회 정책으로 장려되기까지 하는 수단입니다. 그런 걸 두고 범죄와 같은 위계에 둔 "은유"를 책에서 구사하시는 건,
적어도 신중하지는 못한 처사라고나 해야죠. 극렬 여권주의자들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말입니다. 이메일이라도 보내고
싶어지네요.
저자는 지성인답게 절묘하고
재치있는 표현을 여러 군데에서 뽐내십니다. p174: 8 "기억의 착복" 같은 건 저로서는 참 오래 머리 속에 남을 것 같네요.
저자는 황색 저널리즘에 대해서도 심각한 혐오와 분개감을 표시하는데, 예컨대 pp. 176~177, p127, pp.
119~121 같은 곳이 그러합니다. 레티시아를 두고 당신들(언론계 종사자들)은 정육점에 걸린 고기, "죽음의 구경거리"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그의 통탄은 독자를 숙연하게 합니다(단, p143을 보면 타인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그들만의 고충에 대한 동감도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혹 우리가 이 저자를 그런 저질 언론인의 부류로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저자의 의도를 잘
이해해가면서 신중히 책을 읽을 필요도 있겠습니다. 이런 책 읽으면서 남의 불행에 안도하고 즐기려는 걸 고작 은밀한 쾌감으로 삼는
저질 독자들도 많기에 하는 소립니다.
저자는
레티시아를 두고 "내 딸일 수도 있었던 아이"라고 말한다든가(솔직히 그러기에는 좀 젊으시네요), 안네 프랑크나 넬리 라보브나
프타슈키나(Нелли Львовна Пташкина)처럼 시대의 모순에 청소년식으로 저항(?)한 다른 아이콘들과도 비교하는 등
여러 차례 존재 규정에 애 씁니다(혹은, Laetitia, c'est moi!). 책 부제는 "인간의 종말"이지만, 책 맨 마지막
문장은 (레티시아의 유언과도 같은 여러 기록 중에서 인용하여) "삶은 축제다!"입니다. 삶이 진정한 축제가 되려면, 불순한
세력이 책동하는 더러운 선동이나 과장된 선전에 혹할 게 아니라, 이처럼 진지하게, 현상 뒤에 숨겨진 진실에 주목하는, 성실하고
각성된 시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네요.
덧
p205:
밑에서 네번째 줄, 살인마 "질 드 레"의 철자는 Gilles de Rais이며, 레츠 일대를 다스리는 남작이었으므로
Gilles de Retz라고도 씁니다. "질 드 레츠 성(城)"이 혹시 샤토 드 티포주(티포주 성)를 가리킨다고 착각하는 분이
있다면, 아니라고 가르쳐 드리고 싶네요. 여기는 그곳이 아니라, 샤토 드 포르닉(Château de Pornic)입니다. 이곳
역시 그 악마 같은(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주장도 물론 있습니다) 남작의 소유였죠. 질 드 레가 웅거했던(그리고 아동 살인, 학대
범죄를 저질렀다는) 본진 샤토 드 티포주는 내륙 방데 데파르트망(州)에 소재하므로, 이곳 포르닉 해변(베르느리-앙-레츠 소재)과는
꽤 거리가 멉니다. 제가 예전에 그곳을 들렀을 때 차로 거의 40분을 달렸는데(동- 서 직선 거리로), 그곳이라면 ㅎㅎ 성채의
그림자가 그 먼 곳 해안까지 드리울(이 책에 묘사된 대로)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