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박스 - 컨테이너는 어떻게 세계 경제를 바꾸었는가
마크 레빈슨 지음,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당연한 듯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두꺼운 책 <더 박스>는 재미있고 생생한 묘사와 설명, 그리고 경제와 경제학 상의 중요 이슈와 의문을 규명한 재치와 통찰로, 세계적 화제를 모은 경영 논픽션입니다. 개정완역본의 한국어판에만 실린 저자 서문에는, 어느 외국 기자의 아티클로부터 인용하여, "폐소공포증에 걸릴 것만 같은 부산의 어느 도로에서 해안을 내다보아도 도대체 바다가 보이질 않는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블록처럼 몇 층으로 쌓인 컨테이너들이 시야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재미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폐소공포증" 운운은 그리 달가운 표현은 아니지만, 실제 부산의 끔찍하게 열악한 도로망 사정을 감안할 때 실감나는 지적이긴 합니다. 그리고 겹겹이 진을 친 컨테이너 야적 환경이 해안선 감상을 방해한다는 말도 마치 사진처럼 정확합니다.

이 책의 저자 마크(Marc) 레빈슨 교수(전직 이코노미스트 금융 담당 편집자)는 "컨테니어 운송이 그리 당연하거나 자연스럽지만은 않았던 시대"를 실제로 살아 봤을 만큼 나이 지긋하신 분입니다. 광안리나 해운대 등 주거지구 쪽에선 그리 자주 눈에 띄는 광경은 아니지만, 어쩌다 집 근처를 벗어나 서쪽으로 이동하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게 거대한 컨테이너들의 야적 상태였습니다. 어린 눈에는 그게 흉물 이상으로 비춰지질 않았는데,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부산이 뉴욕이나 함부르크 등 유수의 무역항을 제치고 세계의 으뜸 항만 중 하나로 우뚝 서고, 나아가 한국이 굴지의 무역 대국으로 올라서게 된 건,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이 컨테이너의 발명 덕분이었다"는 거죠. 그저 당연할 뿐 아니라, "시시하고 흉하게까지 보였던" 것이, 사실은 "무역대국, 혹은 일류 항만으로 성장하기에 근본적 한계(거대 시장인 북미와 서유럽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입지 조건 때문)를 지녔던 도시와 국가"를 부강하게 키워 준 은인이었던 셈입니다.

컨테이너 운송 시스템의 고마움을 알려면, "컨테이너 이전에는 과연 무엇으로 해상 운송을 했을까"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책은 챕터 하나를 할애해서, 이른바 "브레이크 벌크 방식"으로 통칭되는(제 생각에는 이 역시 retronym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즉, 컨테이너 방식이 출현하고 나서야 종전 시스템을 그리 부르게 된 거죠. 마치 스마트폰- 피처폰의 관계처럼요), 불과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각국 무역항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매우 비싸고 더럽고 혐오스러우며 범죄적이기까지 했던" 시스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 1장을 보면, 불과 반 세기 전만 해도 세상이 이처럼이나 불편하고, 안심할 수 없는 곳이었음을 알고 경악하게 됩니다.

어떤 나라도 자급자족으로 모든 경제적 수요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부족한 물자는 외국에서 들여 와야 생활이 곤란해지지 않습니다. 한편, 같은 나라 안이라고 해도 특정 지역에 모든 물자가 고루 공급되거나 산출될 수는 없고, 다른 멀리 떨어진 고장에서 물산을 사 와야 하는 게 일반적이죠. 그러자면 항구를 통해, 원격지에서 누군가가 보낸(판매자일 수도 있고, 친족이나 지인이 선의로 부쳐 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품을 들여 오는 게 필수입니다. 헌데, 그 운송비가 막대하여 물건 값보다 더 비싸게 치이거나, 운송 과정이 엉망으로 관리되어 분실, 도난이 일상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세상에서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어려울 뿐 아니라, 평온한 개인의 일상마저 위협 받을 수 있습니다.

부두 노동자들이 운송품을 험하게 다루거나, 아예 포장을 뜯고 물건을 훔치거나 (음식, 주류의 경우) 마구 소비하는 건 (앞서 말했듯) 불과 반 세기 전만 해도 매우 흔한 행태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건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나빠서 그를 보상, 보전"한다는 게 명분이었다고 하니 기가 차죠. 운송비가 치솟는 건 이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불법 파업 등 실력행사로 인한 임금 인상 뿐 아니라, 업종의 현실에 걸맞지 않은 2교대 근무가 만연하는 등(비번일 때는 휴식을 취하는 게 아니라 근처 술집에 가서 고주망태가 됨) 임금이 노동생산성을 지나치게 초과했기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애써 생산된 부가가치의 상당부분이, 세금도 안 내는 매춘부, 혹은 뚜쟁이나 포주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뿐이라면 전체 경제 성장에 이로운 영향을 줄 리가 없죠.

또한 기껏 생산된 혁신적 상품이, 단지 운송(비)의 제약 때문에 소비자에게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되질 못한다면, 전체 경제가 활력을 얻고 살아나는 효과가 지속될 리 만무합니다. 저자는 정통파 경제학자답게, 수백 년 전 고전파 경제학자 리카도의 말을 인용하며, "운송비 0의 세계가 본디 이상적인 자유무역 모델의 큰 전제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운송비가 전체 원가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구조에선 시장 경제의 혜택을 모든 경제 주체가 누리기 어렵다는 점을 일찍부터 간파한 소치라는 거죠. 이처럼 이 책은 정통 경제학자의 시선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저널리스트나 일반 논픽션 작가의 책과는 달리 "학문적 바탕"이 탄탄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학부생 경제학도가 시선을 넓히기 위해 부교재로 읽기 알맞은 책인 이유입니다.

무역 일 처음 하시는 분들(신입사원)이 어려워하는 게, 대체 "브레이크 벌크" 같은 용어의 뜻이 헷갈린다는 겁니다. 무역용어(혹은 영어)라는 게 말만 책에서 배워 알 수가 없고, 시스템 전체를 파악하는 눈이 길러져야 애매모호한 개념들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브레이크 벌크"에서 포인트는 "벌크"가 아니라, "브레이크"입니다. 화물이 통할하여 한 단위로 관리되는 게 아니라, 화물 하나하나마다 포장이 따로이며 운송자가 적재와 관리에 "개별" 노력을 기울여야 하죠. 뿐만 아니라 육상 운송, 항만 적재, 선적, 이송, 하역 등이 다 개별(수동) 과정을 거친 후에야 제 임자 손에 들어갑니다. 한마디로, "자동화", "연속성", "표준화"가 결여된 성질이 저 "브레이크"라는 말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 재래식 브레이크 벌크 시스템으로는 국제 무역에서 수지를 도저히 맞출 수 없다는 게 이미 1950년대부터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지적하는 바였다고 책에는 나옵니다. 이 오래된 장애, 그러나 누구도 타개할 생각을 못 했던 애로사항을 두고, 말콤 맥닐이라는 어느 트럭 운송업자가 처음으로 "까짓것 어디 다 갈아엎어보자"는 야심을 품었다고 합니다. 책에서도 지적하듯 본디 이 사람은 해운 운송에 대해 문외한, 국외자나 다름없었는데도 이런 "엄청난" 업적을 이뤄낸 거죠.

이 책은 "컨테이너 박스 시스템"의 "생애"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운송업의 거인, 원가 절감의 혁신가" 말콤 맥닐의 평전도 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디 영세한 트럭 회사 사장에 불과했고, 어차피 제살깎아먹기가 고작인 육상 운송(도로 운송이나 철도 운송 분야 모두)에서 경쟁 자제, 담합 같은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당시에, 천재적인 아이디어와 수완으로 업황을 재편했습니다. 신규 노선 면허가 나지 않으면? 기존 업자한테 사들이면 됩니다. 트럭이 부족하면? 유휴 자원을 가진 이들에게 임차(책에는 임대라고 되어 있습니다만...)하면 되죠. 비싼 값을 주고 차를 지입해 봐야 남는 게 없다면? 이 당시 미국 정부는 제대군인 지원책의 일환으로, 저리 융자(혹은 보조금 지급)를 통해 트럭을 한 대씩 구입하게 해서 생계를 잇게 권했다고 합니다. 맥닐은 바로 이거다 싶어, 싼 값으로 트럭을 들인 제대군인들을 대거 채용, 시설 투자 문제를 해결했다는 거죠.

뿐만 아니라 그는 연료 소모를 최소로 줄이는 트럭 개조에도 관심을 쏟았고, 한 번 노선을 달리고 빈 차로 돌아오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각종 운송 패턴의 실사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같은 노선을 달려도 원가를 최소로 줄이는 방식을 개별 운전자에게 교육시켰고, 이들을 모범 운전자로 만든 후 후배들에게 그 방식 그대로를 전수시키는 인센티브를 마련했죠. 그의 경영 방식을 보면 경영학 각론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교의의 가장 모범적인 실전 응용이나 다름 없습니다.

육상 운송을 제패한 그가 다음에 눈독을 들인 건, 매번 느려 터지고 의욕과 활기가 없고 비리와 비효율은 몽땅 다 갖춘 듯한 항만 운송 방식이었습니다. 이 영역에서 엄청난 원가가 발생하는 이상, 어떤 매력적인 상품도 한번 물을 건너면(잘 건너기나 하면 그나마 다행이죠) 다른 시장(외국)에서 도대체 팔릴 가망이 없습니다. 맥닐이 꿈꾼 방식은, 육상에서 표준화한 "상자, 박스"에 실린 상품들이, 항만에서도 그대로 기계가 번쩍 들었다가 배 안에 차곡차곡 사뿐히 올려 놓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손을 번잡하게 거칠 것도 없고, 무한대에 가까운 노동과 정성도 발휘될 필요 없으며, 혐오스러운 절도범의 손길이 장난을 칠 가능성도 최소로 줄어드는데다, 포장과 운송이 튼튼하기까지 한 방식, 상상력이 풍부하고 도전 정신이 강한 그의 머리 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광경이었습니다.

파는 사람, 사는 사람, 항만 당국, 운송 회사 모두가 만족할 만한 시스템이었으나, 발전을 거부하고 기존 방식을 맹목적으로 고집하는 세력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전문가라는 이들도 "컨테이너 방식이 기존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대체하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을 장담하는 풍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어떤 항구 도시는 많은 돈을 들여, 재래식 운송에 필요한 인프라를 새로 대대적으로 건설하기까지 했으니, 판이하게 바뀐 미래가 코 앞에 닥쳤는데도 애써 현실에 눈을 감는 인간의 둔감함이란 이 지경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맥닐이 대세를 타고 대박을 친 데에는, 당시 막 기하급수적 성장을 일궈 나가던 일본에서 대세를 바르게 내다보고, 신식 컨테이너 항만을 대거 건설했던 기막힌 운수도 작용했습니다.

맥닐의 방식이 마냥 옳았던 건 아닙니다. 앞서 "없으면 빌리면 된다"는 게 그의 수완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는 차입 경영의 대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엄격한 기준으로는 아찔할 만큼, 뭔가 전망이 보이면 바로 가진 전부를 다 쏟아붓는, 소위 "분산 투자의 원칙" 따위는 정면으로 무시하는 과감한 행보와 결단이 그의 특징이었습니다. 이것만큼은 경제/경영 교과서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거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고 털어 놓기도 했으며, 우리의 예를 보면 실제 이병철씨 같은 인물이 말년에 그처럼 반도체에 올인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삼성은 없었을 겁니다. 그럼 우리도 이런 방식을 따라해야 하느냐? 그건 또 아니죠. 맥닐도 위험할 때에는 과감히, 그간 애써 가꿔 온 사업을 팔아치웠으며, 차입도 자제했습니다. 무작정 차입 곡예만 벌이다 결국 파멸을 맛본 예로는 김우중 회장 같은 분이 있죠. 그래서 언제 "고"를 외치며, 언제 "스테이"를 할지가 어려운 겁니다. 이걸 일일이 촉으로 맞히는 사람은 진짜 하늘이 낸 거고요.

컨테이너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산업 번영과 무역 활황은 없었을 것이다? 대체 그 투박한 직육면체 상자가 뭔데 말입니다. 이 컨테이너가 지금 이런 표준화한 모양이 되기까지는, 역시 맥닐 등 많은 선구자들의 시행 착오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맷슨 내비게이션(현 Matson, Inc.)은 맥닐의 회사와 함께 유력한 경쟁자였던 굴지의 업체였는데, 책에서는 두 업체의 상반된 경영 스타일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습니다. 맷슨은 OR(작전 연구. 혹은 경영수학이라고 번역되는)의 창시자 격인 분이 경영에 합류하는 등 이지적이고 우아한 방식을 추구했는가 하면, 맥닐 쪽은 창업자의 개성처럼 밑바닥부터 일단 부딪혀가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일이란 거죠. 저자는 도요타의 그 유명한 JIT 방식도 이 컨테이너의 발명이 없었더라면, 선적까지 무한정 기다리며 재고비용을 소진하는 등의 한계 때문에 출현하지 못했을 거라고 합니다. 싱가포르 역시 국제 무역항으로서 오늘날처럼 번영하는 위상이 아니었다고도 하고요.

요 몇 달 전 한진해운의 파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해운 산업의 엄청난 리스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책에도 잘 나오듯, 컨테이너 운송 방식이 정착하고 나서도 마냥 해운회사들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 건 아닙니다. 일단, 기존의 방식은 해운 경기가 불황이다 싶으면 노동자를 정리해고한 후 고정비 지출을 줄이면 됩니다. 그러나 이 현대식 자동화 시스템을 유지하려면, 거액의 시설 임차료나 유지관리비는 일감이 있든 없든 지불해야 하며 전혀 융통성이 없습니다. 신문기사에서 왜 "해운업은 주기적으로 엄청난 위기가 찾아오며, 이 위기를 잘 넘긴 곳만 다음에 기회를 맞이한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분들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 답이 그대로 나옵니다. 바로 컨테이너 시스템이 몰고 온 빛과 그림자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무역과 해운으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우리들이, 대체 무엇이 오늘의 편익을 가져다 주었는지 곰곰 진지하게 생각하게 도와 줄, 흥미로운 "역사책이자 전기"입니다. 결코, 당연한 게 당연하지만은 않았다는 진리, 박스가 인간에게 깨우치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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