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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브레인 - 삶에서 뇌는 얼마나 중요한가?
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전대호 옮김 / 해나무 / 2017년 7월
평점 :
당연히 잘 알고 있어야 할 대상이 여전히 미지의 장막에 싸였다는 그 사실이, 어쩌면 우리의 관심을 더 집중시키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저는 어떤 어휘를 고르고, 책의 어떤 내용을 보다 부각하며, 그 전에 책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먼저 기억을 해야 서평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건 타자를 치는 손가락에도 의존해야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이지만, 그보다는 우선 뇌, 머리에 기대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히포크라테스 이래 수없이 반복되어 온 외-내과 수술, 혹은 시신에의 부검을 통해 신체의 다른 부위에 대한 지식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내장 기관이나 혈관, 골격의 구조, 힘줄의 작동 등에 대해서는 웬만큼 알고 이식과 교정에도 능숙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해가 충분하지 못하며, 근래 늘어난 약간의 지식에 기댄 것만으로 어느 응용공학 분야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둔 신체 부위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의 뇌입니다. 머리를 써서 만물의 영장이 된 인간이건만 아직 그 머리의 동작 원리를 충분히 모른다는 역설이 수 많은 천재들의 도전을 유발하며, 연구를 거듭할수록 더 큰 신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비로소 처음 일깨우는 미지가 도사렸다는 점이 더욱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이 책 역시, 우리들의 의문을 시원하게 풀어준다기보다는, 열심히 애 써서 지금 여기까지에나마 올 수 있었다는 현황의 정리, 보고에 가깝습니다. 다만 최고의 전문가가 최고의 필력을 구사하여 쓴 책이기에, 어느 책보다 쉽고 유익하게 읽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손이나 발, 심장, 간 등의 구조, 혹은 각종 호르몬의 생성과 기능에 대해 배우는 건 문외한이나 그 지식을 생업으로 활용할 일 없을 이들에게도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심오한 철학이나 생의 근본 원리로까지 이어질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뇌"에 대한 연구, 천착은, "나는 누구일까", "실재란 무엇일까?" 처럼, 먼 예전의 현인들이 "머리"를 싸매고 연구한 과제에 대해서까지 어떤 해답, 적어도 의미 있는 시사를 줄 수 있습니다. 저자는 "머리만 (다른) 신체에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 신체 역시 머리와 긴밀한 상호 작용을 주고 받는다"고 하시며, 마치 인간의 뇌가 생각만큼 절대적인 비중은 아님을 슬쩍 흘리는 듯 무심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바로 저자께서 이 책 중에 잘 설명하고 있듯 사실이 어디 그렇겠습니까. "존재의 해명"은 인문, 철학, 문학의 전 역사가 그 존재 이유를 걸어 온 의문입니다.
책의 상당 부분은 결국 "자유의지"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연결됩니다. 뉴턴이 외계(물리계)에 대한 거의 완전한 해명을 이뤄 낸 이래(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고, 여튼 위대한 업적임에는 틀림 없죠), 유럽의 지성계는 오히려 내면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져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로 의사를 결정하는지, 아니면 모든 것이 에고와는 무관하게 이미 결정되었는지를 놓고 끝없는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양자역학은 사물 질서에 있어 "무작위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규명하여, 다시 이 논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 책은 근래 발전한 뇌과학의 성과를 소개하며, 우리가 어느 순간 우리의 의사를 "결정"한다고 믿는 건 큰 착각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여러 뉴런은 (아직도 그 과정이 명쾌히 밝혀지지 않은 모종의 메커니즘을 통해) 무엇인가(무엇이 되었든 간에)를 타협적, 절충적으로 결정하며(그의 경험, 취향, 생존 가능성에 대한 전망, 냉정한 계산 등 개인차가 있을 여러 요소에 의해), 다만 이를 자유의지에 의한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기제의 힘까지 덧입어, 그 의사결정 주체(허구입니다만)를 안심하게 한다는 거죠. 그러니 내가 내리는 결정은 내가 내리는 게 아니며, 더 나아가 "내"가 과연 있기나 한 건지에도 근본 의문이 생깁니다.
보는 건, 듣는 건 과연 우리의 경험일까요? 저자는 "마이크"라는 한 장애인의 임상례를 소개하며,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맛본다고 믿는 지각과 체험의 실체가 무엇일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각막이 손상되어 아무것도 못 보는 상태였는데, 의학이 발전되다 보니 이런 경우, 즉 그저 각막"만" 다친 경우는 그 부위만 잘 다스려 정상의 시각을 되찾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의료진은 주목했습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그는 당연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이게 웬걸, 그는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웅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답니다. 혼란스럽게 여러 신호(빛)이 감지되긴 하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겠고, 이를 자신의 행동에 어떻게 연결시켜 해석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고 했다는군요. 눈이 먼 시절부터 그는 스키를 자주 탔으며 그럭저럭 능숙하게 동작했는데, "시력"을 되찾고 나서는 스키 실력이 오히려 떨어졌다고 합니다. 도움도 안 되고 익숙하지 않은 정보가 자꾸 들어오니 집중을 전보다 더 못하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우리는 알고 보면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머리로 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본다는 건 외계의 객관을 눈을 통해 정확히 접수, 재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단편적이고 불명료한 정보들을 뇌가 재구성, 시뮬레이션하는 작업에 불과했죠. 다만 우리는 앞서의 그 기제에 의해 "우리가 직접 본다고 착각"했을 뿐입니다. 만약 헬렌 켈러가 갑자기 시각을 되찾게 되었다면, 그는 앞서 마이크가 겪은 시행 착오나 곤란을 덜 겪었을까요? (물론 그는 다발 기관이 손상된 중증 장애인이라 저렇게 간단한 한 차례의 수술만으로는 시력을 찾기 어렸웠겠습니다만)
순전히 상상이지만 제 생각으로는 아마 그랬을 것 같습니다, 헬렌 켈러의 경우 적성이나 성격이 유별나서이건 조력자의 능숙한 도움과 지도 덕분이었건 간에, 센서의 도움을 상당 부분 대체할 만큼 순수하게 뇌의 지력과 기능이 발달한, 매우 드문 예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평소부터 "보고, 듣는" 훈련을 열심히 해 온 그는, 더군다나 여성 특유의 섬세한 심성까지 곁들여져, 가상의 체험과 진짜(이 책에 의하면 심지어 그마저도 진짜가 아니라고 합니다만) 감각의 초기 불일치를 단시간에 극복하고, 정상인처럼 볼 수 있는 단계로 금세 진입했을 것 같습니다. 저 마이크의 사례에서 "소리가 났다"고 하는 진술도, 그는 여태 모든 자극을 청각으로 소화했기에 그런 느낌을 받았을 뿐, 실제 빛의 진행에 어떤 소리가 날 리가 없습니다.
재미있는 뇌의 가소성, 혹은 융통성에 대한 평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일관된 취향과 지향성을 가진 존재라고 자부하지만, 사실 뇌는 개체가 무난한 생존이 가능하게끔 끝없이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수정하며 (이게 가장 중요한데) 최적화합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뭔가 달라져 있지만, 우리는 그를 쉽게 인지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인정하기도 거부하려 드는 성향입니다. 이런 마음대로의 착각을, 뇌는 오히려 따스이 편안히 허용하거나 돕고, 우리는 그런 착각 속에서 자아의 (가상적) 연속성이 유지되는 양 안심하며 살아갑니다. 뇌는 자신이 속한 개채를 오히려 아기 돌보듯이 보살피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뇌는 특히 다른 이들의 감정을 파악하며, 언어 외적 신호를 민감히 살피는 쪽으로도 진화했습니다. 이 부분이 태어나면서부터 손상된 이는 타인과 원활히 소통할 수 없고. 몇 번의 쓰라린 실패를 거치거나 아예 시도조차 안 한 채 자신만의 고립된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간혹 특이한 경우도 있어서, 전혀 근거 없는 자아 하나를 지어낸 후 남에게 무작정 인정하라며 강요하는 기이한 패턴을 보이는 인간도 있습니다. 이런 변형된 자폐증 환자의 경우 어떤 식으로 뇌가 손상되어서 그런 행태를 보이는 건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체험과 지각과 성취와 감정은 각각 독특한 "패턴"으로 개인의 뇌 뉴런에 각인되고, 이 독특한 패턴이 각 개인의 인지 능력과 속도, 개성의 차이를 낳습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나이, 비슷한 체험 과정에도 불구하고 다른 개체보다 훨씬 뛰어난 학습 능력을 보이거나,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며, 나아가 행복한 일상을 영위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행동 양식이 미숙하기 짝이 없고, 그저 내가 맞다며 우기는 것 외에는 어떤 현실 대처 방식도 발전시킨 게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설령 뉴런 패턴의 장난으로 의사 결정을 대행할 뿐이지만(그러고도 스스로 했다며 착각하는 이중의 함정에 빠지지만) 이처럼 개인별로 주체적인 패턴을 이룰 수 있기에 위대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하긴, 그 역시 뉴런 컴포지션이 교묘히 유도하는 또하나의 착각 기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차피 낱낱이 해명되기에는 아직 길이 너무나 먼 과제 아니겠습니까? 그때까지는 최대한 착각의 행복에 빠지는 것도 인간만의 특권 아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