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타당하고 논리적으로 정합성을 갖춘 과학적 이론이라도, 그것이 당대 대중의 어리석은 감정과 (근거 없는) 신조에 위배된다면,
그것이 가진 올바른 정도와 무관하게 엄청난 반대에 부딪히게 마련입니다. 그저 논제를 놓고 서로 다른 입장에 섰을(의견을 달리할)
뿐인데, 때로는 도덕적 단죄, 법적 의율에까지 이르기도 한다니, 상대주의적 열린 지식관에 기반하여 운용되는 현대 사회의 관점으로는
황당할 수밖에 없는데요. 이런 무지몽매한 자들의 손에 의해, 한두 세기에 한 번 날까말까한 천재의 목숨과 이론적 성과가 그대로
매장될 뻔한 위기가 있었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하긴, 무지한 자들의 그악스러운 선동과 모함에 의해 진실이 가려지는 건 지금도
다를 바 없는 사정입니다. 무자격자는 언제나 자신의 자리(랄 것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가 위태하기에, 그저 목소리만 높이고
엉터리로 우기는 행동으로 무능을 보충하려 들게 되어 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행태에 대해 정면대응하지
않고, 대신 이런 명저를 남겨 우매한 이들을 교화하려고 했습니다.

역자
이무현 박사님의 서문에 보면, 다비트 힐베르트의 평언에 근거하며 이런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 그가 재판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철회를 통해 목숨을 구걸(1633)한 건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종교는 그 전파와 확증을 위해 순교자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과학적 진리는 시간이 지나면 인간 이성에 의해 자연히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왕이면
무지몽매한 체제에 의해 진리가 억눌리고 탄압 받는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바람직하겠으며, 그런 역할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정도나
되는 석학, 지성인이 몸소 나서지 않으면 누가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압력에 굴하여 양심을 팔고 본심과는 반대되는
증언을 했던 그의 태도가 그리 당당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위신과 정의감을 희생하기까지하며 그가 얻어낸 건, 또 세상에 선사하려
했던 건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다름 아닌 이 책, <대화(1632)>와 그의 후속편격 저서들입니다. 그가 그 유명한,
법정에 서서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게 만든 계기가 된 게 바로 이 책의 출간, 이 책이 부른 종교적 논란이었습니다.
진리의
판정을 어리석고 사악한 소수가 독점하는 체제에서, 그는 아무리 논리정연한 주장을 (편파적인 법정에서) 설파해 봐야 헛수고일
뿐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과정을 두고 역자 이무현 박사님은 "... 그가 분별력을 잃지 않은 결과"라고 평가합니다. 무모한
싸움을 벌이느라 괜한 정력과 재능을 낭비할 게 아니라, 많은 독서인, 글을 읽을 줄 아는 지식인들을 자기 편(아니, 진리의
편)으로 만들어, 개인과 체제의 싸움이 아닌 진리와 억압 기제의 싸움으로 판을 바꾸려 든 게, 그의 현명한 처세술이었다는
뜻이지요. 역자의 평가에 따르면 "최초의 대중 과학 교양서"의 자리를 점하는 이 책은, 과학 기술 분야에 한정되지 않고 학문과
지식 전방위에 걸쳐 통달에 가까운 이해를 지녔던 그가, 유쾌하고 발랄한 문체와 이야기 솜씨를 통해 어리석은 이들을 설복, 교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구태여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면, 이 책의 후속편 격인 그 모든 명저들이 출간되지 못했겠으며,
아마도 세계는 그의 재치 넘치는 가르침과 빛나는 영감을 전수받거나 공유받지 못했을 겁니다.
이
책 제목은 "대화"입니다. "대화"라고 하면 갈릴레오보다 거의 이천 년 전에 살았던 대 철학자 플라톤의 어느 저서 제목이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서양 지성과 사유 방식, 그리고 이를 표현하는 고전적 기초를 놓은 이래, "대화"는 어디까지나 논리와 이성과
상식에 의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는 기본 포맷이 되었습니다. 일방적으로 떠드는 건 진리의 소통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상대가 반박을 하면, 왜 그 논리가 그릇될 수밖에 없는지, 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대화법,
산파법"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쳤고, 플라톤 역시 "진리의 자발적 각성, 수용, 설복"을 위해서는 대화 이상의 좋은 방법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다만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 책에서 쓰고 있는 대화법은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그는 자신이 픽션처럼 구성한 이 책에서 마치 몇 세기 전의 보카치오가
구사한 테크닉처럼, 세 명의 등장인물을 무대에 올려 그들의 입을 통해 "서서히 밝혀지는 진리, 합의에 도달해 가는 법칙"을 독자
앞에 제시합니다. 이 등장인물은 물론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들도 아니고, 같은 시대에 살지 않았으니 같은 공간에 등장해 담론을
나눌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생전의 그들이 과연 이 책에서 갈릴레오가 꾸며낸 대로 저런 제각각의 철학적(당시에는 과학과 철학이
거의 동의어였죠. 아니, 그 후 수백 년 동안에도요) 입장을 견지했는지도 의문입니다. 허나 당대인들, 그리고 후대의 분석가,
연구가들에게 격찬을 받는 건, 갈릴레오가 대단한 독서가였고 박식한 학자였기에(이렇게 되려면 남의 책들을 두루 읽고, 선학의 성과를
폭 넓게 흡수해야 합니다), 자신보다 한참 앞선 인물들의 성향이나 (암시된) 견해를 거의 정확히 이해했고, 그랬기에 이처럼 실감
나는 재현이 가능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픽션으로 읽어도 (배경 사정을 아는 이들에게) 대단히 재미있게
다가옵니다(단, 여기에 대해 비판적 견해로는 역시 이 책 역자 서문 p14 중간쯤을 참조하십시오. 그 역시 건설적 비판 속에
약간의 아쉬움을 표시하는 취지입니다).

이런
기법은 예를 들어 1990년대 초에 출간된 리언 레더먼의 <신의 입자>에서도 차용됩니다. 그처럼 오래 전 시기의 한
일류 과학자가, 말솜씨도 이만큼이나 재미날 수 있다는 게 한참 후대의 연구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준 것이죠. 갈릴레오는 이 재미난
책에서 일종의 신랄한 풍자도 시도합니다. 역자 서문(p19:6)에 보면 당대의 피사 대학 교수 스키피오네(책에는 "시피오"라고
표기됩니다) 키아라몬티의 그 유명한 말이 인용됩니다. "동물이나 유기체는 관절과 근육과 팔다리가 달린 덕분에 움직일 수 있으나,
지구는 그렇지 않기에 움직일 수 없다." 역자께서는 이 발언을 두고 이 책, 즉 갈릴레오의 <대화>에 대한 반박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그가 전개했던 지론입니다. 그 증거로, p389~p428에 걸쳐 펄쳐지는 "둘째 날" 파트의
하반부 모든 내용이, 바로 관절론 망언에 대한 우습고도 통쾌한 풍자와 반박이기 때문이죠.
혹시
종교를 가진 분들은, 이 책의 역사적 의의와 파장에 대한 연상으로 불필요한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의 주류는 이미
오래 전 현대 과학의 성과를 남김 없이 수용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같은 이는 골수 반공주의자(이런 점을 이해 못하는
바보는 그저 이 교황을 좌파라고 오인합니다)였으면서도 이런 과학의 업적이라든가 교회의 과오에 대해서는 남김없이 인정하며 겸허한
사죄를 표명했습니다. 당장 갈릴레오의 당대 교황이었던 우르반 8세만 해도, 갈릴레오의 천재적 재능에 경의를 표하며 그를 일생 동안
비호했습니다. 세상은 본디 다채롭고 각양각색의 입장이 존재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며, 그걸 아는 우르반 8세나 갈릴레오 모두 융통성
있는 지성들이었기에, 흑백 논리의 대립으로 치닫지 않고 이처럼 적정선에서 타협을 봤던 것입니다. 특정 결론만이 절대로 옳다며
흑백 논리로 치닫는 어리석은 자들은, 입으로 과학을 거론할망정 속으로는 사이비에 가까운 망집에 사로잡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두뇌로는, 진리의 밝은 빛을 알아볼 수 없음을, 이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고전은 우리에게 담담히 일깨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