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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 스타트업 바이블 - 세계 최고의 투자자가 전하는 성공하는 창업가의 조건
리샤오라이 지음, 나진희 옮김 / 살림 / 2017년 1월
평점 :
스타트업(start-up)이란
말도 요즘은 너무 흔히 쓰여 모호어법으로도 충분히 대상 특정이 가능함을 보여 준 좋은 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1998년
외환위기 후 "창업"이 일상용어화한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전까지 "창업"이라 함은 <삼국연의>에서 손씨 가문의 동오
건립 정도 되는 활동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소 한 마리 끌고 상경한 어느 유명한 국졸 청년의 개업 정도를 화제에 올릴 때나 쓰인
말이었죠. 하긴 자신의 미미한 시작이 반드시 창대{昌大)한 창업(創業)이 되리라는 기대를 잔뜩 투영한 어법으로 보면 또 충분한데,
기대가 기대로만 그치지 않으려면 튼실한 준비가 또 필요합니다.
스타트업
그 시작은 미미하여도 끝이 "창대", 다른 말로 위대하려면 일단 창업자의 아이디어부터가 위대해야 한다고 저자는 아주 단적으로
짚으며 시작합니다. 다른 말로 풀면, "안 위대한 아이디어로는 창업을 아예 시도하지 말라"게 저자의 지적에 가깝습니다. 물론 어느
법칙에나 예외는 있어서 다른 장점(하다못해 창업자의 출중하고 투철한 의지, 집념)이 정말 특별하다면 성공할 수 있겠지만, 매사가
의욕만으로 쉽게 개척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외(위대한 아이디어 외)에도 저자는, 1) 일단 스타트업에 적합한 이들은
청년이어야 하고 2) 그 주위에 인재가 충분히 뒤를 받쳐 줘야 한다고 합니다.

1)의
이유는, 스타트업은 본디 실패와 좌절이 밥먹듯 벌어지는 분야라서, 창업자의 나이가 젊지 않으면 그런 실패로부터 다시 재기할
의욕이 안 생기고, 또 패배를 깨끗이 인정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청년들은 "내가 부족해서 망한 거다"라며 현실을 지저분한 미련
없이 받아들일(swallow) 줄 안다는 거죠(다른 말로 하면, 감정적 앙금이 계속 남아 있으면 나이가 젊어도 청년이 아닌,
최소한 스타트업에 적성이 맞는 청년은 못 된단 소리겠습니다). 어느 가수(원 공연자, 저작권가 전인권이 아닌, 원로 가수 쟈니
리라고 하는군요)가 부른 노래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라는 가사 한 소절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2)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혼자 힘으로는 창업을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근간 스타트업 전문서나 성공 사례를 담은 책을 읽어 보면
반드시 기량이 출중한 인걸들이 창업자의 곁을 밀착 보좌합니다. 당신은 이런 여건을 갖춘 창업자입니까?
재미있는
지적 또 하나는, 소위 "똑똑함"이란 적성, 재능은 스타트업 성공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저자의 지적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높은 IQ 같은 것은, 나쁜 상황에 닥쳐 축복보다는 재앙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군요. 저자의 근거는 첫째 이런 사람들은 성장을
거부하는 유형일 수 있다(이미 완성된 인재라고 스스로를 여김) 둘째 시련과 실패가 주는 교훈을 감정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질 못하고
현실을 부인하려 애쓴다 등입니다. 제 주변의 경험에 비춰 봐도 백 번 맞는 소리입니다. 요즘 같이 변화무쌍한 세상에선 실패 없이
한달음에 성장하는 타고난 스타트업 천재를 찾아 볼 수 없죠. 다만, 머리가 좋은 이들이 EQ까지 연동되는 경우도 꽤 볼 수
있으므로, 회복 탄력성으로까지 재능계발이 잘 이뤄졌다면(다시 강조하지만 이런 분들이 꽤 많습니다) 당연히 높은 IQ가 강점이
됩니다. 가장 비참한 건 머리도 나쁘고 멘탈도 유리멘탈인 경우입니다.
인재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필요한 자원입니다. 본인이 인재이건, 아니면 인재를 부려 쓰는 입장이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고
저자는 다시 강조합니다. 저는 책이 <...바이블>로 제목이 붙어서 좀 뻔하고 당연한 사항을 잘 정리한 책인가보다
여겼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물론 정리도 잘 되어 있지만 저자가 여담처럼 꺼내드는 이야기에 오히려 체감상 많은 영감이 온다 할까
주변에서 겪고도 예사로 지나쳤던, 그러면서도 의미심장했던 가르침, 토픽이 많아서 그 재미가 오히려 쏠쏠했습니다. 이를테면
헤드헌터가 주로 누굴 노리는가 하는 화제입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삼류들은 아예 건드리질 않고, 이류, 경력 가꾸기에 따라
일류로 충분히 부상할 수 있는, 다만 현재는 만만하고 평범한 이류를 주 타깃으로 삼는다는 거죠. 그 다음 말이 걸작인데 "이렇게
지목받았다는 사실에 우쭐거리고 만족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좀 모자란 이들이다"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건, "성장이 끝났다(나는 완성된 인재)"고 여기는 마인드셋이야말로 실패에의 직행 통로라는 점입니다. 벌써 이런 지적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사람은 요즘 같은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는 수준으로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당신에겐 이런이런 기능이
필요합니다." "아 그런가요? 지적해 주셔서 감사하며, 목표를 만들어 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냉큼 책상으로 달려가(혹은 필드로
나가) 배우고 채워 넣어야 합니다. 인공지능이 당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판에 "이렇게 하면 길이 생깁니다"같은 가이드라도 받는 게
어디겠습니까?
책에는 한국계록스타인
최건의 히트곡 가사도 나옵니다. 우리도 잘 아는 "날카롭게 벼린 칼날" 운운하는 대목인데, 저자는 문제의 핵심을 한눈에 파악하는
능력의 절실함, 귀함 등을 떠올릴 때 이 가사가 함께 연상되는가 봅니다. 성공하는 설문 조사는 질문을 날카롭게 만들어야 합니다(이
점에서, 제가 며칠 전 읽은 "혁신가의 질문" 즉, 질문 설정이 문제 해결의 반이다 같은 주장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시장에서
과연 대중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날카로운 안목을 가진 이는 정말 놀라운 직관으로 한눈에 캐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날때부터 타고난
재능에 지나지 않을까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정주영 창업자 같은 이인데, 이분이 학식이 뛰어나다거나 심지어
기술적 IQ가 그리 높은 타입도 아니었습니다(그 동생분들이 그런 유형이었죠). 그의 비결은 "자나깨나 그 문제만
생각한다"였습니다. 이게 성심성의라고 봐도 좋고 근면성실로 이해해도 됩니다. 이 책도 "고객의 니즈에 그 누구보다 집중하고
진심으로 접근하라"고 합니다. 결코 평범한 주문이 아니라는 건 무엇인가를 놓고 자나깨나 그것만 생각해 본 사람은 다 압니다.
개인의
저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꼭 성공하라는 법은 없는데, 사업가들의 성공 사례를 보면 꼭 종잣돈 이야기를 합니다. 이 종잣돈이 어리면
어릴 때 모이고 수중에 쥐어질수록 유리합니다. 이게 안 되는 사람은 (이 책뿐 아니라 어느 스타트업 책에서도 강조하는)
앤젤투자자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그런 투자자의 눈에 잘 드는 것도 재능이라면 분명한 재능입니다. 그 재능 요소 중 하나로
"절묘하고 적확한 비유 능력"을 저자는 드는군요. 아이템도 컨텐츠도 없으면서 말빨만 키우라는 소리가 아니라, 속에서 차고넘치도록
키운 아이디어를, 남과의 소통 과정에서도 (적어도 있는 제 가치나마 그대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단 뜻입니다. 저자는 또 재미있는
지적을 하는데, "평균적인 투자자는 똑똑하다고 봐야한다"입니다. 가망 없는 투자처에는 결코 돈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며, 그런
똑똑한 투자자는 당신을 가망없는 스타트업으로 여겼을 수 있다며 자신을 언제나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어설픈
투자자 흉내만 내고 현자 코스프레, 소설 속 주인공 행세에 재미 붙인,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얼빠진 인간도 있으니 이는 창업자
본인이 현명히 필터링할 과제입니다.
엔젤투자가가
마음에 두는 걸, 왜 창업자까지 염두에 둬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야 그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책 7장은 그런 사항까지(즉 투자자가 이 책을 읽을 때 충고해 줘야 할 사항까지) 차근차근히 알려
줍니다. 첫째 리드투자나 팔로투자나 투자하려는 사업의 구조에 따른 리스크는 동일하며, 투자처가 실패할 시 돈을 날린다는 점은
같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리드투자는 어지간히 판 전체를 보는 안목이 있은 후에야 감행하는 거지, 어설픈 직관력이나 만용으로
함부로 달려 들 게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리드투자라고 해서 원금 보전이 잘 되는 것도 아닌데(당연한 소리죠), 뭐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미개척지에 뛰어들겠냐는 겁니다.

둘째(책에서의
순서는 이보다 앞이지만), 투자가와 투자를 받으려는 사업 주체는 지향하는 가치관이 동일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심지어
"비슷해서도 안 되고 완전히 같아야 한다"고까지 합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게 어차피 불확실성은 누구의 진로 앞에나 전개되는데,
투자자에게 납득이 가는 판단과 전략으로 (설령 돈을 날려도 날려야) 타격이 적겠기 때문이죠. 아무리 실패로부터 회복탄력성이
뛰어나야 한다고 해도, 거금을 날리고 멘털이 온전하기란, 누구한테나 가슴을 저며파는 시련에서 쉽사리 재기하기란, 결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건 나라고 해도 별 수 없었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야 상대와 나를 동시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꿈을
실현하게 돕는 게 투자자"라는 말은 많은 경우 공염불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창업자의
실패는 많은 이들로부터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상대적이긴 합니다). 반면 투자자의 실패에는 다들 무관심할 뿐 아니라, "때에
따라 경멸의 대상까지 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지적인데 참으로 날카롭다 하겠습니다. 이래서 투자자의 선택은 몇 배는 더 신중해야
하고, 스타트업 경영 주체가 "이 정도 사업 이점이 있으니 이 비즈니스 모델로 밀어붙여 보자!" 같은 과단성을 미덕으로 유지해야
하는 것과도 차별됩니다. 이런 투자자의 입장을 창업 주체로서는 언제나 이해해야 하며, 자신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음을
반드시 투자자에게 납득시켜야 합니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많은 경우 수적 우세가 곧 진리인 줄 아는 완고한 믿음과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저자는 강의를 하면서
참으로 황당한 체험을 하는 게, 분명히 틀린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그 틀린 생각이 머리 속에 자리를 잡으면, 아무리 더 유력한
논거가 나와도 자신의 신조가 맞는 줄로 우긴다는 겁니다. 이들은 많은 경우 우쭐함이나 지적 우월감까지 보이며 일단 우기고 보는데,
빼도박도 못한 근거를 들어 보여 주면 승복이나 하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머리 속에 논리나 건전한
판단 기제가 갖춰져 있지 못하고, 어떤 권위자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베껴서 기준으로 삼는 이들이죠. 그런데 그런 "권위"조차,
객관적으로 사회가 인정하는 권위이면 그나마 나은데, 그게 아니라 알고 보면 자기가 주관적으로, 막 느낌으로 부여하는 그런
권위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남을 인정하고 치하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높이는 일종의 "환각, 놀이"에 빠진
거죠. 이런 사람들한테 사업상의 중요결정권을 주면 나도 망하고 남도 망하는 겁니다.
책의
문장은 마치 서양인 석학이 쓴 것처럼 우아하고 논리를 갖춘 스타일이라서, 근 십 년 동안 쏟아져 나오는 흔한 중국 대중서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자 자신의 실제 경험을 많이 소개한, 피부로 느껴 온 스타트업 애로를 차분히 들려 주기 때문에 지루하질
않습니다. 이 책을 읽고 확실히 느낀 게, 중국이나 우리나 착각, 오류에 빠져 있으면서도 무조건 완성된 자신의 판단이라며 우기는,
자신도 망하고 남도 해롭게 하는 어리석은 유형이 꼭 있다는 겁니다. 성공하려면 이런 자들의 어리석음도 극복해 나가야 하고, 혹 나
자신 속에도 저런 "바보"가 도사리지는 않는지 철저히 점검한 후 즉시 축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자기 반성, 새롭고 절실한 지식은 무엇이든 소화하여 내것으로 만들려는 집념, 상승 의지 등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저자분이
비트코인 신봉자라는데(단, 이 책 본문에는 언급이 적습니다) 그간 부정적인 시각을 버리고 저도 좀 다시 이 분야를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