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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평전 - 격동기의 경세가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7년 2월
평점 :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우리가 막연히만 알고 있던, 저자 김삼웅 선생의 규정에 따르면 "격동기의 경세가" 중 한 분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평전입니다. 의암에 대해서라면 천도교계의 지도자라든가, 개화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분 정도로 아는 게
고작이었습니다만, 이 책을 통해 의암의 생애에 대해서는 물론, 강점기 초기 핍박받던 겨레의 현실에 대해서, 또한 나라가 쇠망해가던
시절 민족의 지도자들이 어떤 정신적 열의와 구체적 수완으로 민족의 명운을 구하려 드셨는지 그 행적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 중
하나가, 의암께서는 중인 가문 출신이며, 그것도 적자가 아닌 서자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김삼웅 선생도 본문 중에서 각별히
언급하는 바가 있습니다만, 정확히는 첩의 자식이 아니라 본처 사망 후 다시 맞이한 재가녀와의 결합에서 태어난 경우인데, 여튼 크게
보아(물론 왜곡된 유교 도그마의 파생적 폐습입니다만) 서얼의 범주에 드는 출생이므로 그를 보는 눈이 고울 리 없었습니다. 이 책
중에도 나옵니다만 가문의 제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그에게 문중의 어른들이 방해의 언동을 보이자 위력과 당당한 언사로 맞받아치는
그의 모습이 나옵니다. 서얼 출신이라는 점이 여전히 사회적 활동에 장애가 되었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통념상으로는 신덕왕후 강씨의 자녀들을 "서자"로 몰아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방원이 이 원칙을 세웠다는 통념과 달리,
김삼웅 선생은 명백히 전거를 들어 가며 "서얼, 천출이었던 정도전이 난을 일으켜 질서를 어지럽혔으므로 향후 이들의 출사를
금고한다"는 정확한 유래를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뭐 정도전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어떤지는 구태여 재론이 필요 없겠고, 김
선생의 저서는 이처럼 주제에 대한 명철하고 폭 넓은 분석뿐 아니라 역사 주변 지식에 대한 정확한 상기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여튼 요점은 이게 아니라, 한 개인의 자아실현을 옭아매는 요인으로 시대적 상황(국운이 멸망의 시점에 몰림), 개인적
한계(서얼 출신) 둘을 동시에 짚어 가며 개인사와 역사의 입체적 분석을 도모하는 저자의 바람직한 서술 방침입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의 문하에서 의암은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책은 꼼꼼한 서술을 이어갑니다. 재미있는 건 우리가 잘 알듯 백범
김구도 청년 김창암(창수) 시절 동학 조직에 몸 담아 번잡한 실무를 맡으며 평판을 쌓았는데, 갓 입문한 시절 손병희를 먼발치에서
보고 이후 <백범일지>에 당시를 회고한 대목이 있다는 거죠. 책은 <백범일지>에서 해당 대목을 발췌,
인용하는데 독자로서는 정작 <백범일지>를 읽는 동안에는 무심히 넘긴 부분에서, 이처럼 의암의 생애를 조명하는 맥락으로
새로운 의의를 찾아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인용문에서
백범이 의암을 "최시형의 사위"라고 말한 건 백범 자신의 착오이며, "청년"이라고 표현하지만 백범보다는 의암이 15년이나
연상인데다 사회 생활을 백범 못지 않게 일찍 시작한 그이기에 이무렵이면 까마득한 선배이자 스승에 가까운 위상이었겠습니다. 김연국에
비해 젊어 보였다는 뜻이겠고, 김연국은 사실 의암보다 겨우 4년 연상에 지나지 않으니 초췌한 그의 풍모까지 짐작되는 바
있습니다. 부처님도 아끼는 제자에게 화장실 청소부터 시켰다는 일화가 있듯, 해월 최시형도 일부러 시험하려고 의암에게 온갖 까탈을
부렸는데도 묵묵히 지시를 따르는 그의 인품에 감탄했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그 앞에도 나오지만 의암은 청년 시절부터 혈기가 엄청난
성격이었다는 점, 우리 독자는 상기할 필요가 있죠(이런 분들이 대개 나이보다 좀 젊어 보이기도 합니다).
책은
이후 갑오농민혁명 양상을 잠시 언급합니다. 녹두장군 전봉준과 의암(역시 두 분이 나이 차가 크게 안 납니다) 사이의
간단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인연을 소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죠. 여기서도 저자는 1) 과연 전봉준은 동학 교도였음이 정확한가 2)
남접과 북접의 치열한 갈등은 과연 사실인가(혹시 일본 당국의 편견 섞인 자료에 지나치게 의존한 인상은 아닌지) 등에 대해
객관적인 의문의 시선을 던집니다. 이런 부분이 참 유익했고요, 앞으로 학계의 연구가 좀 더 필요한 이슈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배운 내용에 대해 너무 의심 않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죠. 물론 의심과 비판, 전복과 재정립도 기존의 성과를 바탕으로
해서 이뤄져야 "근본 있는" 태도입니다.
책에서도
그런 서술이 있지만 이 동학운동 진압 과정에서 일본 병력의 손에 의해 수십만 명이 학살되었고, 이 정도 시련을 거쳤으면 동학
조직이 거의 궤멸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주 최시형은 혹독한 문초 끝에 (책에 사진이 나오는 대로) 목숨을 잃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헌데 어떤 곡절인지, 동학 조직은 이후 재건에 성공하고, 손병희 선생이 망명(문제가 있는 표현입니다만- 적국에의
망명이 있을 수 없으니 - 저자의 견해대로 다른 마땅한 대체 용어가 없어 서평에도 그대로 씁니다)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왔을
때도, 4만에 가까운 인파(모두 동학교도는 아니었겠으나)가 몰렸다는 점으로 보아 이 의암의 놀라운 수완으로 조직이 보기 좋게
부활한 듯합니다("듯하다"는 건 독자로서 제 개인의 시각입니다).
손
선생의 "망명"은 사실 조정(고종의 대한 제국)이 워낙 역적이라며 핍박을 가했기에, 반정부 인사로서의 망명이라면 그나마 맞는
구석도 있는 표현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책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는데요. 일본 당국의 허술하고 부정확한(저자의
표현입니다) 보고서를 길게 인용하시는데, "...여러 여인을 거느리고 돈을 물 쓰는 듯하는 태도로 보아 한국 정부에서 원조를
받거나 따로 큰 자금줄이 있는... " 같은 부분을 우리 독자들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암은 1912년에도 메이지 일왕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후에도 따로 일제 당국에 거금을 기부하여 조직의 안위를 꾀한 바 있습니다. 물론 워낙 배포가 크고 멀리
내다보는 시야를 지닌 인물이라 지엽말단의 행보를 두고 전체를 평할 수는 없습니다만(그래서 저자도 "경세가"란 표현을 쓴 겁니다),
객관적으로 확실한 건 그의 수중에 돈이 상당히 많았다는 겁니다. 일제에 돈을 내려 해도 지닌 돈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또
1900년대 초반의 망명기에도 여튼 그가 현지에서 돈을 넉넉히 쓴 건 사실처럼 보입니다. 이런 수완 좋은 인물의 빼어난 조직
경영 능력이 아니었으면 동학 조직이 그 결정적인 위기를 버텨 내지 못했으리라는 게 상식에 비추어서도 타당합니다.
저자도
아쉬움을 표하는 행적 중 하나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한반도 패권을 둘러싸고 본격 충돌의 조짐이 보이자, 의암은 "기왕 나라의
명운이 기로에 놓인 것, 승전국에 가담하여 향후 발언권을 높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결단으로 당시 참모총장 다무라와 접촉,
러시아와의 결전에 병력과 자금 등을 지원할 계획이 실행 단계에까지 접어들었던 사실입니다. 사실 독자로서도 뒷맛이 개운치
않았습니다만, 이때만 해도 향후 역사의 전개가 어떤 국면까지 갈 지 알 수 없었으며, 의암으로서는 어디까지나 민족의 자존을 지키는
한 방편으로 택한 길이죠. 참고로 책 첫머리에는 재미있는 일화와 함께 소개된 곽씨 부인이 나오지만, 사실 생전에 의암은 부인을
여럿 둔 바 있습니다. 그 중 우리가 잘 아는 분은 동학의 지도자이자 독립 운동가를 겸했던 여걸 주씨 부인이죠.
한편
그와는 별개로 제가 흥미롭게 본 건,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일본의 승리를 점쳤다는 사실인데, 1) 원거리에서
물자와 병력을 나르는 러시아군에 승산이 없다 2) 일본은 문명이요 러시아는 야만이니 전자가 승리하는 게 필연이다 같은 그들 나름의
근거였습니다. 특히 2)에 대해서는 유럽과 전세계가 오히려 반대 시각으로 파악하는 게 대세였는데 우리 조상들의 날카로운 통찰을
입증하는 바인지는 좀 더 생각이 필요하겠습니다. 참고로 러일 전쟁 발발 직전에도 이 교활하고 음흉하기로는 첫째를 다툴 두 나라는
로젠- 니시 협정(양국 외무 당국자의 이름입니다)을 맺어 시간을 벌 속셈이었는데, 이 책에는 "서(西) 로즌 협정"으로
표기되었으니 행여 오해는 없어야겠네요.
의암의
친일(미미합니다만) 행적을 완전히 상쇄시켜 주는 일등 공신이 한 명 있는데, 우리가 (의암만큼이나 이름이 익은) 일진회 리더
이용구가 바로 그 장본인입니다. 이용구는 본래 의암이 매우 아끼던 후배 중 한 명이었는데, 어쩌다 가장 못된 길로 진로를 틀어
민족 자존의 훼손은 물론 동학 조직의 약화, 의암 개인의 속을 톡톡히 썩이는 행보로 악명이 자자했습니다. 이놈을 두고 악질
친일파로는 우리가 잘 알지만, 마치 석가모니의 가는 길마다 훼방을 놓았던 제바달다 캐릭터와도 같았던 면모는 이 책을 통해서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여튼 이런 놈 때문에 우리가 의암의 진면목도 오해 없이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의암은
중국에 체류할 당시 아직은 확고한 명성이 없던 손문(쑨원)이라든가 원세개(위안스카이) 등과도 만나 교류를 텄다는 기록이 이 책에
잘 나옵니다. 쑨원은 참고로 의암보다 네다섯 살 아래입니다. 일본에서 그는 이등박문을 만나 엄청난 주량으로 기를
죽였다거나(그러나 이토는 이때 이미 노인이고, 의암은 아직 장년의 나이였으니...), 고종의 사위 박영효를 만나 그 방종한 처신에
호통을 쳤다거나 하는 일화가 책에 실려 있습니다. 이 일화들은 의암선생사업기념회에서 출간한 다른 전기에서 저자가 재인용한
내용인데, 독자로서 믿고는 싶습니다만 그런 일화가 당시 크게 회자되었다는 정도로 좀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해당 종교 단체의 입장도 강하게 반영된 내용이기도 하겠으니 더욱 말입니다.
앞에
말했듯 의암은 망명 전엔 내내 대한제국 정부와 긴장 갈등 관계였습니다. 러일 전쟁 발발초기 그는 논설을 통해 "...상책은
폐혼입명이겠고 중책은 악정부를 멸하고 신정부를 앞세움이겠으나..." 같은 주장을 합니다. 이 "폐혼입명"에서 "혼"은 당시의
맥락으로는 별 의심의 여지 없이 "혼군, 암군"을 뜻합니다. 그러나 뒤의 "입명(명철한 군주를 세움)"에서 알 수 있듯, 아직은
그가 철두철미한 공화정 사상에까지 인식이 이르지는 않았다는 점도 눈치챌 수 있죠. 이처럼 여전히 전근대적 인식의 프레임에 한
발목이 잡혀 있는 듯한 한계는 김정인 박사의 학위논문(서울대학교) 인용 파트에서도 드러납니다. 참고로 책 중의 그 인용은 손병희
선생의 저술이 아니라 김 박사의 논문 일부이며, 말투가 옛것이라 혹시 착각하는 독자들이 없었으면 합니다(^^). 여튼 이러던 게
귀국 후에는 <만세보>를 창간하고, 이인직의 <귀의 성> 등 신소설을 연재케 하는 등 유연한 처신으로
고종에게 은사금까지 받았던 사실은 그의 정치적 수완이 매우 빼어났음을 잘 드러내 보입니다.

김삼웅
선생의 평전이 언제나 그렇듯 다양한 자료를 철저히 분석한 후 적시적소에 인용하는 학문적 태도가 돋보이는 책이기도 합니다(p35
중간쯤의 "들어낸→드러낸" 같은 오타는 아마도 이이화 선생 책 원문의 오류인 것 같네요). 이 책의 완독을 독자가 치를 떨며
이루는 게 되는 주된 이유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대로 3.1운동(이 명칭에 대해서도, 그저 고종의 인산 일자를 앞둔 단순 일자를
표시하는 게 아니라, 삼위 일체 등 신학문 신문물의 세례를 받은 그의 식견에 따른 보다 의미깊은 해석이 나옵니다) 이후 일제의
의해 주동자로 몰려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한 폐인이 되어 풀려난 후,
후유증으로 서거하시는 그 참혹한 과정에 있습니다. 후손으로서 이런 대목을 접할 때면 참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