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령군 - 조선을 홀린 무당
배상열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3월
평점 :
품절


고려, 조선을 통틀어 (대개 남성이었던) 요승(妖僧)이 국정에 참섭하며 국기를 문란케 한 적은 있어도 샤먼, 무당이 실권을 잡고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은 드문데요. 이 책의 주인공이나 다름 없는 진령군(眞靈君)은, 이른바 칠천(七賤)의 신분 중 하나인 여성 무속인 출신으로 조선 고종 연간에 명성황후를 뒷배로 두고 온갖 전횡을 일삼은 실존 인물입니다. 역사에 기록이 남긴 했는데, 그 정확한 생몰 연도나 본명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매우 적습니다. 이 책 역시, 과거의 가슴아픈, 또 개탄할 만한 역사에 대해 우리 독자들에게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진령군의 생애에 대해선 상당부분을 작가님의 상상을 동원하여 채우는 편입니다.

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정치적 부상(浮上)부터, 경술국치로 나라가 완전히 망하기까지의 시대상을 다룹니다. 평면적으로 질곡과 시련의 역사를 짚기보다는, 지도자의 무능과 부패가 어떤 식으로 백성의 삶을 피폐케 하고, 나아가 공동체의 존속 기반을 무너뜨리는지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역사 에세이에 가까운 형식입니다. 그러면서도 등장인물에 대한 구체적 묘사, 사건에 대한 실감나는 재현이 결들여진 덕에, 독자들은 한 편의 소설을 읽는 양 속도감 있게 한 권의  독서를 마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구구한 묘사나 몰입감 떨어지는 대화 등의 삽입이 없는 이런 포맷이라야, 읽는 독자한테 부담을 최대한 덜어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전반부의 주인공은 이하응이고, 저자는 그의 정치적 식견과 안목, 수완, 실행력, 지능 등의 자질을 놓고 꽤 후한 평가를 내립니다. 이런 평가는 마치 역사 소설처럼 그의 굵직한 행적을 요령 있게 시간순으로 서술한 후 적절한 근거를 들며 내려지는 의견이라서 독자는 (기존에 가지던 입장이 무엇이든 무관하게) 대체로는 동의해 가며 책을 읽게 되더군요. 그에 대해 "쇄국 정책으로 근대화를 늦춘 장본인"이란 비판이 우세하지만, 집정 당시에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 프랑스 등 서구와 접촉을 시도한 일을 보면 식견이 모자라고 시야가 좁아서 대국을 그르친 협량의 소유자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자는 특히 철종 사후에 조대비(신정왕후. 효유대비)와 담판을 짓고 정치적 동맹군으로 끌어들인 후 차자 명복에게 대보를 넘겨 주게 한 그 긴박한 과정에 대해 적확히 서술하는데, 차 필력이 좋으시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들더군요. 사람(독자)마다 의견이 갈리게 마련이지만 저자의 필력이 좋으면 논제에 무관하게 일단 설득력이 생긴다고나 할까요.

호포 징수는 양반 세력의 약화와 조세 수입원의 확충 두 가지 목표를 노린 양수겸장격 조치였고, 이 과정에서 일반 서인들도 대거 양반신분으로 편입되어 결과적으로 신분제 해소까지 이르는 한 발을 내딛는 결과였음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뿐만 아니라 서원 철폐를 통해 백성의 부담을 경감한 후, 이 여력을 경복궁 중건 쪽으로 돌려 왕실의 위신을 세운 그의 노련한 정책 집행 스킬도 조명합니다. 다만 저자의 옹호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이르러 일본 측의 황후 시해 음모에 꼭두각시처럼 동원되어 위신에 큰 손상을 입고 끔찍한 수모를 당한 그의 행적에 대해서까지 후한 평가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집정 십 년을 넘길 무렵 최익현 등의 상소로, 하응의 차자 이형은 드디어 친정을 펼치기에 이르지만, 실권자가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의 처 민자영이었음은 무지몽매한 백성들도 다 아는 판이었습니다. 실각한 지 6년 만에 구식 군대(양영)의 반란에 힘 입어 재집권을 시도했던 흥선 대원군은 청의 즉각 개입으로 오히려 비참한 수인 신세가 되어 텐진에 억류됩니다. 이 책에서 중요한 건 이런 대원군의 부침이 아니라, 한때 신변의 큰 위험을 겪고 충청도로 도망한 민자영이,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 어려운 시절 어느 이름없는 촌구석의 무당을 만나 "반드시 지엄의 위에 다시 오르실 테니 결코 낙담하지 마옵소서!" 같은 격려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물론 저자의 실감 나는 픽션화이지만). 이 무당은 본인도 확신이 없었으나, 벽촌의 천한 무속인으로 일생을 썩기보다 한 번의 도박으로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자는 속셈이 작용하지 않았겠냐는 거죠.

역시 픽션의 일환으로, 이 무당이 자신의 입장에서는 진객인 민자영을 방문하기 앞서, 어떤 수완으로 향리의 "고객들"을 구워삶았는지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아이를 못 낳는 며느리에 대해선 그저 복채 지불하는 사람 마음 편하라고 후처를 저주하라든가 하는 얕고 흔한 처방을 제시하지 않고(들킬 경우 자신 역시 관헌에 의해 중벌을 받으므로), 무난한 방법으로 "이혼"을 거친 후 적당한 홀아비를 찾아 재취하라는 식으로 충고합니다. 보통 천인들은 한번 살판을 찾았다 하면 앞뒤를 돌보지 않고 폭주하다가 소탐대실하는 모습이 흔한데, 이 무당은 대단히 신중하고 앞을 잘 재는 타입이었음이 드러나죠. 그런가 하면 아들의 관운을 물으러 온 여인에게는, "내년에는 운수가 좋으니 기다리라"는 괘 풀이를 해 줍니다. "다른 무당은 북으로 가서 귀인을 찾으라던데요?"라는 여인의 대꾸에 그녀는 고개를 젓는데, 설령 여흥 민씨(다른 무당이 말한 "북쪽의 귀인")가 급작스레 세도가 지위에 올라섰다 한들 같은 종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과연 앞길을 챙겨 주겠으며, 섣불리 찾아갔다 박대를 당하느니 1년 정도 재물을 모은 후 본격 청탁을 하는 편이 낫다는 자신의 깊은 뜻을 그리도 모르겠냐며 혀를 찹니다. 물론 이는 허구의 산물이지만, 저자의 인물 형상화 내공에 독자로서 경의를 표하게 되는 대목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비록 신통력도 없고(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출신도 비천했다고는 하나, 세상 물정을 영악하게 살핀 후 모시는 분에게 유효적절한 충고는 할 줄 알았던 게 이 무당의 자질이라면 자질이었습니다. 게다가 모시는 분이 가장 힘들 시기에 그 앞에 생각지도 않게 척 나타나서 생을 거의 포기할 단계에 전폭적인 힘을 불어넣어 주었으니, 마치 로렌츠 박사를 엄마인 줄 알고 따르는 오리떼들마냥 민자영이 그녀에 정신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도 했겠습니다 (점점 누가 생각나죠?). 이 무당에게는 지극히 이례적으로 군호까지 내려졌으니, 진실로[眞] 영험하다[靈]는 이유에서 "진령군"입니다. 이 책에도 상세히 나온 대로, 군호는 공신이나 종실 인사들에게만 선별적으로 붙은 명예인지라, 이 조치가 얼마나 파격인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겠습니다.

임오군란이 터진 지 14년 후, 거침 없이 권세를 휘두르던 민씨 일문은 자영의 죽음과 더불어 권세를 잃고 위기에 몰렸습니다. 저자는 날카롭게도 "권세가를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원군은 바로 상인들"임을 지적하는데, 상인도 상인 나름인지라 권귀들의 측근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큰 그릇은 신의를 철석같이 지킴을 특히 강조합니다. 무당 진령군에 큰 신세를 입었을 만한 어느 상인은, 을미사변 후 처절한 몰락이 임박한 그녀에게 지난 은혜를 톡톡히 갚습니다. "재산을 일단 다른 이 명의로 돌리시고 은닉한 후, 움막에 숨어 살다 세인의 눈총이 다른 곳을 향할 즈음 죽음을 가장하고 다른 신분을 얻어 사십시오. 그 동안 재물은 제가 굴리고 불려 드리겠습니다." 민자영과 그의 일족은 몰락했지만 천한 무당 진령군은 이후에도 몸을 숨기고 살며, 빼돌린 재산으로 여유로운 여생을 보냅니다. "나라가 망하는 데는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나라를 망친 원흉도 처신만 잘 하면 일신의 평안과 부귀는 여튼 보장되었다는 게 독자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대목입니다.

을미사변 이후의 역사도 저자는 (진령군을 퇴장시킨 채) 자신의 평론을 곁들여 가며 박력 있게 서술합니다. 청일전쟁, 아관파천, 러일전쟁, 열강의 이권 침탈, 한일의정서, 을사조약 등이 차례로 다뤄지는데, 앞서 말한 대로 필력이 좋으셔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요. 소위 고종 독살 미수 사건은 꽤 유명해서 몇 년 전 이를 소재로 한 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만, 저자는 김홍륙에게 억울한 누명이 씌워졌다고 파악하여 새로운 가설을 내어 놓습니다(이 대목에서는 운만 띄우고, 진상은 맨 뒤로 가서야 밝혀지네요. 물론 작가의 상상이지만). 마지막 장에선 매천야록의 저자로 우리가 잘 아는 애국열사 황현이 주인공 시점을 자주 차지하는데, 국권 상실이 가까워질 무렵 그를 웬 노부인, 매우 윤택한 삶을 누린 듯하면서도 영민하고 날카로운 용모를 한 이[아, 여기선 좀 많이 아니군요]가 찾아옵니다. "책 쓰시는 데 자금이나 자료가 부족하진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다만.... 그때 커피(가비)에 독을 탄 자가 과연 누구였는지요?" 노부인은 화들짝 놀랍니다.

종두법을 보급한 공로자로 유명한 지석영이, 한창 권세를 휘두를 무렵의 진령군과 알력 관계였다는 사실은 사료에도 나옵니다. 역관 출신 김홍륙이 왕의 주변에서 권세를 농단한 건 그보다는 한참 후의 일인데, 여튼 저자께선 이 대목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독자에게 여운이 깊은 암시를 남깁니다. 책에는 고종이 따로 총애한 무속인 성강호도 잠시 언급되며, 피의 일요일 사건 당시 라스푸틴의 말을 좇아 니콜라이 2세가 무고한 민중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풍문도 나옵니다. 우리가 광해군 연간 샤르후 전투에서 요령껏 중립을 지킨 강홍립의 군호는 晉寧君으로 쓰며, 이 천한 무당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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