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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 살인 사건 - 카뮈의 <이방인>,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카멜 다우드 지음, 조현실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월
평점 :
음..
예컨대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같은 작품이 트리컨티넨탈리즘의 관점에서, 그간 그저 타자화되기만 했던 "현지인"의
감성과 의식과 의지를 제자리로 어떻게 복권시켰는지는 우리 한국의 독자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부당하게 일방적이고 무책임하게
우상화되었던 "백인 주인님" 로빈슨 크루소의 시점이 아닌, 본의 아니게 충직한 노예로만 철저히 자리매김되었던
방드르디(프라이데이)의 이야기도 한번 들어는 볼 필요가 있고, 식민자가 아닌 피정복민으로서의 아픈 역사를 공유한 문화권의 독자라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정직한 맞대면을 위해서라도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을
이유없이 죽여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규범과 당위에 철저히 무관심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뫼르소의 사연이 그만큼
충격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공감을 주었다면, "그저 뜨거운 태양 때문에" 값없는 죽음을 당한 "그 아랍인"의 시점에선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개 범법자, 일탈자에 불과한 뫼르소가 열광의 대상이 되어 온 데 비해
그야말로 억울한 피해자일 뿐인 "그 아랍인"의 죽음은 과연 뫼르소가 그날 그렇게나 무신경하게 취급한 만큼이나 제3자들로부터 계속
외면당해 마땅한 무가치한 사건인지도 어쩌면 당연히 의문이 제기되었어야 했습니다. 뫼르소는 무자비한, 또 아무 명분 없는 살인 한
번으로, 이방인은커녕 뿌리 없이 떠도는 현대인들 사이에선 아예 우상이 되어버린 판에, 난데없이 (그에게는 진짜 이방인이었을
살인자에게) 목숨을 앗긴 "그 아랍인"은 시대과 공간을 초월하여, 심지어는 그가 속한 동족으로부터까지, 잊혀지고 무시된
"이방인"으로 떨어지고 말았죠. 그런 이유에서 이 소설은 "누가 진짜 이방인인가?"를 우리에게 다시 묻는, 왜 이런 질문을 여태
누구도 하지 않았던지 새삼 각성케 하는 매우 진지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1인칭 화자 하룬의 입으로 여러 번 강조되듯, "해변에서 그때 죽은 그 아랍인"은, 뫼르소의 자랑스러운 무용담에서
이름도 한 번 언급되지 않고, 심지어 용모에 대한 묘사조차 거의 없습니다. 하룬 노인은 "이름을 아는 자는 쉽게 죽일 수 없다"는
말로 뫼르소의 동기, (그의 표현에 따르면) "현란하게 꾸며낸 알리바이"를 설명합니다. 사람 하나를 죽여 놓고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그토록 화려하고 멋있게, 책 한 권을 써 가면서까지(그냥 자랑만 하고 말 것을) 합리화할 수 있을까, 찬탄과 복수심이 그의
어투에 공존하는 이유는, 바로 하룬 노인 그가 죽은 "그 아랍인"의 친동생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신원을 밝히면서 우리는 근
70년만에 피해자의 이름이 "무싸"인 줄 알게 됩니다.
과장과
왜곡이 끼어들었겠지만(이 이유도 중요한데 나중에 논해 보겠습니다) 어렸을 적 하룬이 바라본 "형 무싸"는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키도 크고 강건하고 남자답고, 지금은 노인이 된 하룬이 일생 동안 한 번도 거쳐 본 단계가 아닌, 의젓한 남성,
어른으로서 그 젊은 시절부터 정체성을 확립한, 어머니를 포함 가족 모두의 기둥과도 같은 인물이었죠.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가정에서 자라난 것도 이 형에 대한 의존을 강화하는 한 계기가 되었겠는데요.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그 어머니 되는 여인의 모든
기대를 한몸에 받은 아들, 또 그럴 자격이 있는 아들이 그처럼 비명에 죽었으니, 남은 가족, 특히나 그녀의 속으로 그를 낳은
어머니가 얼마나 피폐해졌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허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1인칭 화자인 하룬이었는데요. 어머니가 죽은 장남의
역할, 그에 품었던 기대를 모조리 이 어린 소년에게 투사하는 바람에, 그는 자기 자신으로 올바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온전한
성인 남성으로도 정신이 자립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생부의 정체를 알 수도 없었지만, "현실에 발을 디디지도 인간들의 고통을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증오"한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이 부친이란 "신" 그 중에서도 이슬람의 신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비유이자 동시에 직서[直敍]). 이렇게 보면 "신과
같았던 형 무싸"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더 넓은 이해가 가능하죠. 하잘것없는 백인 식민자가 그저 짜증난다는 이유로 죽여 버린 형의
죽음은, 가족(종족) 전체에게 (맞는지 그른지 검증의 여지 없이) 주입된 어떤 당위(이슬람적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모욕, 신성
모독으로 이제 의미가 확장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뫼르소가 무싸를 죽인 사건은 그저 정신병자에 의해 저질러진 하찮은 사고가
아니라 이제 역사적 의미까지를 띠게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 중엔 심지어 하룬과 무싸의 어머니가, 뫼르쏘의 할머니로 추정되는 어느 노파에게 가서 화풀이하는(복수라고 생각) 장면도
나오는데, "그녀가 과연 친할머니인지 뭔진 모르지만 여튼 같은 roumia 아니겠어?"라는 종족적 구실까지 만드는군요.
"루미아"는 프랑스어이긴 하나 마치 Gringo처럼 현지인의 어휘에서 역수입해온 경우죠. 비잔티움 제국을 일러 아랍인들은
"룸"이라 불렀고, 아나톨리아를 셀주크가 뺏어 온 후에도 현지에 세운 정치 단위를 "룸 술탄국"이라 가리킨 역사를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무싸는 뫼르소에게 아무
이름(=의미) 없는 존재였는데, 마치 로빈슨 크루소가 흑인의 입장은 고려하지도 않고 멋대로 "금요일"이란 이름을 붙여 줬듯,
살인자에게 그 희생자의 이름이 무싸이면 어떻고 "오후 2시(살인 사건이 일어난 시각)"면 어떻냐며 하룬 노인은 죽은 형을 일러
"주드"라고도 부릅니다. 물론 이 주드는 존 레넌의 아들 줄리언도 아니고 토마스 하디의 "주드 디 옵스큐어"도 아닙니다. 프랑스어
원 텍스트에선 이를 Zoudj라 표기했는데, 아랍어로 쓰면 زواج입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나가는 철자를 로마자로 그대로
전사했을 뿐인데요, 사실 저 단어 زواج는 아랍어 사전에 등재된 것도 있고 안 나오는 사전도 있습니다. 표준 아랍어가 아니라
마그레브 일대에서만 쓰이는 방언에 가까워서입니다(북아프리카는 표준 아랍어와 방언이 모두 쓰이는 대표적인 이중언어 지대이죠).
زواج, 이 말의 뜻은 토박이 알제리인인 작가 카멜 다우드가 너무나 잘 알듯, "숫자 2, 쌍둥이, 결혼" 등 다양한 의미를
품습니다만 의미가 차이 날 때마다 발음이 (주쥐, 좌쥐 등으로) 달라지기도 합니다(아랍어 표기에는 모음이 없습니다).
이
زواج는 작품 속에서 아주 다양한 함의로 변조, 응용되는데요. 후반부에 드러나는 충격적인 사실처럼, 하룬은 형이 죽은 후 거의
정확히 20년이 되는 알제리 독립 투쟁 과정에서, 현지인 해방 부대에 소속되었다거나 그의 지침을 따르지 않고 프랑스인 식민자 한
명을 "새벽 두 시"에 죽여 버립니다. 어머니에 의해 강요된 "죽은 형의 삶"을 살며 자신과 주변 모두로부터 소외되었던 하룬은,
이런 영웅적 행위로 "오해"될 만한 사건을 저지르고도 끝내 동족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질타를
받습니다. "왜 하필 '(휴전 협정)이후'였냐? '이전'이었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것 아니냐?" "새벽 두 시라는 (경계성)
시간대인 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요?" 형의 삶을 외투처럼 뒤집어써야 했던, 평생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하룬에게,
زواج는 사실 그의 형이 아니라(쌍둥이가 될 수 없는 게, 성격이나 외모 등 모든 면에서 너무도 다른 형제였기 때문이죠),
오히려 형의 살인범 뫼르소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랍권에서 가장 흔한 이름 "하룬"은, 알고 보면 아랍인도 그렇다고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인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진정한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하룬은
(저 위에 쓴 것처럼) 신을 두려워하고 미워합니다. 무슬림들은 꾸란을 거의 암송해야 할 만큼 텍스트와 친숙하지만, 하룬은 오히려
그의 형이 비참하게 살해당한 기록인 소설 <이방인>을 달달 암기하는 수준입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형이 죽은
살인사건의 "수사 도구"가 바로 프랑스어였고, 프랑스어는 그에게 세계를 해석하고 탐구하며, 불쌍한 어머니에게 그 세계를
"번역(여기서도 작가의 트리컨티넨탈리즘적 세계관이 드러나죠)"하는 통로였습니다. 원제 "Meursault,
contre-enquete"에서 뒷부분은 "재조사"란 뜻인데(작품 중에도 "재수사"란 말이 나옵니다. 추리 장르에서 자주 등장하는
"케이스 클로즈드"의 반대, "케이스 리 오픈"이죠), 1인칭 화자 하룬은 아무도, 심지어 알제리인 동족들도 망각하고 무시해
버린 억울한 살인에 대해, 혼자 힘으로 가망 없는 "진상 규명"에 일생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이게 민족의 울분을 대변한다거나,
심지어 형의 원한을 풀기 위한 동기도 아니었으며, 그보다는 어머니에 의해, 동족들에 의해, 프랑스 식민자들에 의해, 마침내 자기
자신에 의해 참된 정체성이 묻혀 버린, 스스로를 찾아 나서는 고독한 여정이라고 보는 게 맞지 싶습니다. 이 점에서도 그는
"실체도 모호한" 무싸(혹은 주드, زواج)라는 형의 쌍둥이가 아니라, 바로 사형수 뫼르쏘의 쌍둥이입니다. "처형당한 자가
어떻게 풀려날 수 있는가?" 하룬은 이렇게 묻지만 그 근거는 바로 방황하고 뿌리 없는 자신의 행적이죠.
어머니의
영향 때문에 남자로서 자립 못 하고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야 했던 하룬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 미리엄은 과연 실존
인물이었을까요? 저는 그에게 세상의 창을 열어 준 "프랑스어"의 은유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살인범의 자랑스런 회고담이 얼마나
우아하고 멋들어진 외관을 하고 있는지에 경악한 그는, 이 프랑스어를 두고 자신의 존재 구원, 혹은 영구 미제를 해결할 매개자(혹은
다른 의미에서 쓰였던 "전령")로 인식합니다. 삶도 자존도 형의 죽음과 어머니의 개입에 의해 빼앗긴 그에게, "투르망(영어의
torment하고는 좀 색깔이 다르죠)"을 상쇄할 유일한 길이 바로 텍스트에의 몰입이었겠습니다. 미리암이 허상이나 비유였다면(사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단단한 실체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일체의 비유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1인칭 하룬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대학원생"은 그럼 누구일까요? 여기서 그 젊은이와의 대화 중 ton peuple이라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역자 조현실
교수님이 적절히 지적하듯 이는 프랑스 식민자에 대척되는 알제리의 일반 민중일 뿐입니다. 이 학생은 그럼 타자의 위치에서 모든
상황을 객관화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학생"이긴 하되, 그 출신은 작가 다우드와도 같은 알제리 토착인인지도 모릅니다. 흔한
이름 "하룬"이 알고보면 경계인, 주변인을 대변하듯(실제로 작가 다우드는 이슬람 율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은 적까지 있다고
하니!), 이 학생 역시 다우드의 자아 한 부분을 대변할 뿐 아닐지. 욕구에 가득찬 실존과, 허깨비 같은 종족의 우상 사이에서
고뇌(투르망)하는 개인은 뫼르소나 카뮈 뿐이 아니라는 작가의 처절한, 그러면서도 쿨한 독백이라고 파악할 수 있겠네요.
책 디자인이 참 예쁜데 리뷰에 사진은 나중에 넣겠습니다.